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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랑 Dec 04. 2024

슬기로운 기초 영문법 생활

어쩌면 영포자에서 영어 학습자로 - 2

막내인 중딩이와 열다섯, 열두 살 차이 나는 오빠들의 입시를 삼수로 치러낸 후여서 그런지 제게 있어서 막내의 학업은 정확히 설명할 길 없는 초연한 해탈의 경지 입구에 그 어디쯤에 있습니다. 그러한들 여기저기 설명회의 귀동냥에 당해낼 재간 없는 귀 얇은 저인지라 조바심이 없을 리 없지만 그 얄팍한 조바심마저 귓전의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 학원 등록이나 학습지 구독으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 돈으로 그저 수영 배우고 태권도 배우고 책 사서 읽고 좋은 전시, 영화 보며 즐겁게 초등학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적표가 나오는 중학생이 되고보니 저의 눈에도 레이다가 장착되더군요.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 끝냈다는 영문법을 우리도 시작해야 해 볼까 정도의 암묵적 동의만이 저희 둘 사이에서 거미줄만큼 가늘게 이어졌습니다. 영문법 설명 듣고 괄호 안에 배운 영문법의 공식에 맞게 채워 넣는 색칠공부 같은 문법 공부 말고, 조금 다른 영어 공부는 뭘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1학기를 얼렁설렁 흘러 보내다 "어려운 레벨의 영어 속으로 밀어 넣어 영포자로 만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엄마들이 영어 공부를 해야만 한다. 반드시 반드시!!!"라는 인스타 글을 읽고는 귀신에 홀린 듯이 기초영문법 수업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렇게 7월부터 저는 기초 영문법 수업을 줌으로 듣고 있어요.


30여 년 만의 영어 수업, 7월 첫째 주 수요일부터 시작된 첫 수업 시간, 제 뇌의 전구가 반짝 켜졌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생각하는 동안의 이 짜릿함. 제 뇌속의 수많은 뉴런들이 일을 하며 쭉쭉 뻗어가는 에너지인가 싶었어요. 수업이 끝나고는 '나 살아있는 거 같다'라며 식구들에게 호들갑을 떨었어요. 짧은 집중력 탓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고 졸릴라치면 어김없이 날라오는 유머에 큭큭대는 저를, 예고없이 날아오는 질문에 당황하며 오디오를 켜는 것조차 허둥대며 우왕좌왕 당황해 귀까지 빨갛게 변해버리는 엄마를,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지개를 켜며 야호!를 외치고, 수업이 시작되기 10분 전 복습 문장을 작문하려고 낑낑대는 엄마의 뒷모습을 아이는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저에게 물어옵니다. "엄마, 재밌어?" 라구요. 멋지게 대답했으면 좋았겠지만 "뭐가, 왜 재밌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재밌네" 라고 대답했어요. 저의 목표도 아이에게 신나서 수다로 나누었는데 다행히 지루하지는 않았는지 "너도 수업 한 번 들어볼래? 엄마는 문법 설명 듣고, 문장 만들기 하는 수업이 너무 재밌어."라고 물었을때 아이의 대답은 "그래!" 였어요. 공부는 잘하고 싶어 하는 아이인지라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배운 영어 문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으나 친구들은 다 아는지 수업 시간에 질문이 없어서, 분명 다 아는 말로 설명을 해주시는데 물음표가 완벽히 지워지지 않았대요. 그렇게 저희 모녀는 9월부터 같은 시간, 각자의 공간에서 기초 영문법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영어의 오르막을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대고 있지만 적응력 빠른 생생한 뇌를 소유한 아이는 질문에 답도 척척 잘하고 문법의 완성도가 높아져서 문제가 쉽게 잘 풀린다며 신나 합니다. 기초 영문법 6개월 완성 2번 듣고 심화반 수업도 듣겠다고 열의를 냅니다. 수업이 끝나면 방실방실 웃으며 "너무 재밌어! 오늘은 나 이해가 진짜 잘됐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올 초여름 어느날 밤 기초 영문법 수업을 신청한 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며 칭찬 해줍니다.


3개월 완성 영어가 아닌 숨쉬듯이 10년 완성을 목표로 영어 공부 영어! 적어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네요. 그 말을 듣고 유레카를 외치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3개월 만에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영어 학습 관련 광고를 보며 그 누구나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아서 시작도 안 하고 있던 저였는데 '10년은 걸려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다며 꾸준하게 오랫동안 공부해야 하는 게 언어'라니 저도 할 수 있겠구나 용기가 납니다. 어쩌면 영포자였을 제가 사춘기 아이와 함께 영어 학습자로 변신 중입니다. 차곡차곡 10년 동안 꾸준히 잘 쌓아보도록 하려구요. 너무 열심히는 말고 밥 짓듯, 출근하듯 일단 영어 공부하다보면 저의 목표에 조금은 가까워지겠지요.


이쯤에서 십년 후의 저의 목표를 조금 공개해보자면,

저에게는 저의 최애 소설 빨간 머리 앤을 원서로 마르고 닳도록 읽고 싶구요

어쩌면 저의 손주들에게는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구요.

그리고 그랜드 캐니언을 가이드 없이 여행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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