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머무는 자리 만들기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비밀의 정원』, 1911
어느덧 가을볕이 마음의 창문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계절입니다.
오늘은 그 따스한 빛줄기를 길잡이 삼아
마음속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너머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정원으로 걸어가 보려 합니다.
제 안에 평생을 살아갈 작은 집 하나가 있습니다.
그 집에는 매일의 생각과 감정들이
소파 위 쿠션처럼 널려 있는 '거실'이 있고,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낡은 앨범처럼 쌓여있는 '다락방'도 있습니다.
그리고 차마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외면하고 싶은 상처들을 넣어둔
컴컴한 '벽장'도 있지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마음의 창엔 시간의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빛이 들지 않았고,
돌보지 않은 감정의 잡초들은 집 주위를 따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결심이라는 이름의 열쇠로
이 오래된 집의 문을 열고,
빗자루를 든 정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내 마음속, 작은 정원을 돌보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선 거실,
그곳엔 어지러운 생각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낙엽처럼 널려 있었습니다.
바닥에 나뒹구는 리모컨들은
수십 개의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던
공허한 마음들이었고,
읽다 만 책들은 시작만 하고 끝맺지 못한 아쉬움들이었지요.
어제 마신 커피의 흔적이 남은 찻잔엔
밤새 뒤척이던 걱정의 앙금만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먼저 찻잔을 헹궈 걱정의 얼룩을 씻어내고,
흩어진 책들은 한 곳에 모아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비로소 어지러웠던 마음에 길이 열리고
닫혔던 커튼 사이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기억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 묵은 시간의
냄새가 밴 공간으로 들어섭니다.
먼지 쌓인 상자를 열자 잊었던 시간들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상자 속 작은 장난감들.
마치 어린 날 기억의 화단에
피어난 들꽃 같은 그 순수함에,
제 입가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빛바랜 일기장 한 권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내려간,
엉뚱하지만 진심이었던
어린 날의 다짐이 담겨 있었고,
모서리가 닳은 낡은 사진 한 장은,
그 서툴렀던 모습까지도
모두 나였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일기장과 사진을
조용히 가슴에 품어봅니다.
잊고 지냈던 순수한 꿈도,
서툴렀던 내 모습도 모두 나였음을
인정하는 순간,
시간의 먼지는 비로소 별빛처럼 반짝였습니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건 가장 안쪽,
굳게 닫힌 벽장 문 앞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제가 숨기고 싶었던
약한 모습들이 웅크리고 있을 테니까요.
마침내 삐걱이는 문을 열고
조심스레 빛을 비추었을 때,
그곳에는
그저 빛을 받지 못해 그늘 속에 앉아 있던,
저의 또 다른 그림자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그림자의 여린 마음 위에는
애써 삼킨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길을 내고 있었고,
미처 아물지 못한 서툰 상처들은,
바깥공기조차 쓰라린 듯 파르르 떨고 있었지요.
저는 가만히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말없이 그 작은 그림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괜찮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나의 가장 오래된 슬픔에게,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의 집이 정돈되자,
탁했던 창문 너머로 햇살이
새싹처럼 돋아나며 안을 환히 비춥니다.
아, 이것은 단순한 깨끗함이 아니었습니다.
먼지를 털어낸 자리에 내일이라는
믿음 한 줌을 심을 수 있게 된 것.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아름답고도
장엄한 빛줄기였습니다.
그 눈부심 속에서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 『세계의 정원』의 동반 서적(Companion Book) 서문, 1993
그렇습니다. 마음의 집을 청소하는 것은 결국,
내일의 꽃을 피울 정원으로
가는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깨끗해진 집의 뒷문을 열고,
한 번도 나서볼 용기가 없었던
나의 황무지로 나아갑니다.
그곳엔 아직 마지막 남은 의심의 잡초들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오랜 습관처럼 굳어진 땅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지요.
나는 무릎을 꿇고 흙을 만집니다.
의심의 잡초를 뿌리째 뽑아내고,
단단하게 굳은 땅을 새로운 다짐의 호미로 일구어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촉촉한 흙 속에
나의 진실한 소망을 담은 씨앗 하나를 묻습니다.
정원은 언제나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늘 심은 씨앗이 내일 당장 꽃을 피우지 못하듯,
어지러웠던 공간이 단번에 천국이 되지는 않겠지요.
햇살과 바람, 비와 손길이 조율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완성되는 것처럼,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꿈꾸는 계절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뿌리개 같은 하루의 노력이
조용히 쌓여 꽃잎으로 피어나는 것 아닐까요.
정원은 그렇게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가꾸는 기다림 속에서, 색은 더 짙어지고
향은 더 멀리 번져간다는 것을.
- 볼테르 『캉디드』, 1759
우리들의 마음에는 저마다의 정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어떤 꽃을 심고, 어떤 빛을 들이며,
어떤 바람을 허락할지는 온전히
우리의 손끝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돌보던 그 정원이
우리를 돌보아 줄 날이 옵니다.
한 송이 꽃이 눈을 들어 미소 짓듯,
우리가 심어온 시간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그 순간,
여러분의 정원에는 어떤 모습의
꽃이 피어 있기를 바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