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은 엄마가 데리러 올 수 있어?”
바쁘게 출근하던 엄마를 붙잡고 눈곱세수를 하며 딸아이 하는 말.
“왜? 엄마가 와 주었으면 좋겠어?”
"응, 할머니 말고 엄마가 왔으면 좋겠어. 다른 친구들처럼."
“어.. 그래.. 오늘은 안되고 엄마가 일찍 마칠 때 지율이 꼭 데리러 갈게”
“언제~~ 언~~ 제~~ ~으앙~~~”
애용애용~1초가 소중한 출근시간에 딸아이의 울음은 비상상태, 엄마는 전시상태다.
아이의 울음을 뒤로하고 나서야만 했다. 미안해. 한마디를 남긴 채.
이러한 슬픈 서사는 워킹맘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상.
아이의 울음은 밤송이에 찔린 것 마냥 아픈 상처다. 일하는 엄마로선 감당할 수밖에.
처음 아이와 헤어지던 날, 말도 못 하던 아이가 엄마를 쫓아 현관문까지 나와
‘엄마 어디가? 나 놔두고 어디가? 나는 왜 안 데리고 가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던 아이의 슬픈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자신을 두고 영영 오지 않을 꺼라 느꼈던 것인지 현관문 뒤로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엄마는 하염없이 작아졌다. 세상 누구보다 손녀를 향한 사랑이 백 프로 충전되어있는 할머니는 엄마의 자리만큼은 대신할 수 없었던 걸까? 아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크면 크는 대로 아이는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듯 엄마를 찾는 일이 부쩍 잦아진다.
“할머니가 가면 안돼?”
“안돼!”
“할머니랑 같이 병원 갔다 와”
“싫어!”
이틀 뒤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장인에게 월급보다 소중한 연차를 쓰고 하원시간에 맞춰 달려 나갔다. ( 딸아! 보아라! 엄마는 약속 지킨다! )
엇! 먼저 마중 나와 있던 엄마가 있네? 어색한 눈 맞춤과 인사를 나누고 이내 눈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가며 고개운동을 한다. 동서남북 왔다 갔다 다리 운동도 함께.
“오늘은 일 안 가셨나 봐요?” 친구 엄마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네. 오늘 데리러 나오라고 해가지고” 내 어색한 웃음이 표시가 났었나? 한 마디씩 오고 가는 대화를 끝으로 정지화면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우리 애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선생님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할 건더기가 없다.
“혜민이 엄마! 일찍 왔네! ” 정적을 깨는 한 마디. 또 다른 친구엄마가 인사한다.
나를 힐끔 쳐다보며 눈인사를 하더니 미리 나와있던 친구엄마에게 팔짱을 끼고서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등을 돌리고서. 순식간에 커다란 벽이 생겼다.
똑똑. 저 여기 있어요. 그까이 벽 안 쌓아도 되는데요. 38선마냥 벽을 사이로 나뉜다.
그들과 나. 봄과 겨울사이.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워킹맘 해치지 않아요. 함께 이야기해요. 우리.
'무슨 이야기가 저리 재밌을까?'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옆에 가서 끼여볼까?',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인데 가서 뭐라고 한담?' 옆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인다. 내 귀에 도청장치라도 넣어둘걸 그랬다. 두 엄마의 대화는 끊이질 않는다. 한 발자국 다가가려다 다시 뒷걸음질 거리를 둔다. 혼자 돔에 갇히길 자처하며 유치원 버스가 빨리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신경을 두지 않으려 두리번두리번 애꿎은 눈동자만 동그라미를 그리며 열심히 돌아간다.
극 내향인엄마. 말을 붙여야 하나 말아를 수백 번 고뇌이는 엄마이다. 같은 유치원, 같은 또래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일하는 엄마라는 분자가 그들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다. 맨날 얼굴을 보는 사이와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보는 사이는 길어진 시간만큼이나 관계도 다르다.
처음 기관을 보낼 때는 '엄마들 사이 나만 못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혹은' 나 때문에 아이의 친구관계도 영향을 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괜한 애 핑계를 대며 놀이터에서 아이친구엄마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고 간식이라도 사서 나눠먹곤 했다. 관계를 갈망했다. 친해지길 바랐지만 그때뿐. 아님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가? '소심한 나의 탓이겠지' 하면서도 괜스레 일하는 나의 상황을 비추기 시작했다. 일과 육아, 살림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에게는 엄마들과의 관계까지 신경 쓰기에는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관계에 따른 감정소모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아이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며 가족 간의 수다가 시작된다. 한 술 뜨시던 할머니가 뭔가 생각나신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씀하신다.
“아침에 유치원버스 기다리는데 지우엄마가 혜민이 엄마한테 뭘 한그슥 갖다주더라. 딸기 같던데. 저번에도 먹을 건가 뭘 갖다주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구먼. 언니언니 하면서. 줄꺼믄 둘이서 몰래 주던가. ”
할머니의 핀잔이 늘어진다.
“내가 일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마 엄마”
사실 이런 말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신경 쓰인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꼭 친해져야 하는 강박은 버리자고. 상황이 다른데 이해해 달라고도 이해할 수도 없잖아.’ 쓴 약을 먹은 것처럼 쓰리 씁쓸한 건 안 비밀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엄마의 자리에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영원한 관계는 없다. 모든 관계에 심혈을 기울일 수도 없다. 여러 사람을 두루 만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소수의 사람만 관계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성격, 내세우는 가치, 살아온 환경 등이 관계를 맺는 기준이 된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보다는 나와 같은, 동질감을 가지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아이의 친구 만들기에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놀이를 하고 같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고 해서 벽을 쌓는 사람, 쌓지 않는 사람. 그건 내 선택일까? 다른 사람의 선택일까?
우리는 각자의 벽을 쌓고 내리며 생존의 법칙을 몸소 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혹은 이름 모를 무인도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하며.
벽...... 그거 쌓을 녀석한테는 쌓고 안 그래도 될 녀석한테는 안 쌓는다. 김려령 (가시고백), 2012
다크초콜릿처럼 쓰리 씁쓸한 결과들을 경험하며 결론을 냈다. 새로운 관계에 너무 목매이지 말자고. 욕심부리다 코 깨진다고. 무엇보다 소중한 건 바로 다름 아닌 나이기에.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서로 부족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면 된다.
엄마들과의 관계도 딱 거기까지. 마지노선을 정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다.
우스갯소리로 엄마들 사이에서 누가 인싸, 즉 인기가 있는 엄마인지에 대한 썰이 있어 잠시 소개해본다.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에 다닐 때는 먼저 말 붙이는 엄마가 인싸다. 그때는 육아로 인해 몸도 마음도 지치고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이다. 누가 말이라도 한마디 붙여와 대화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이가 초중고 학교 다닐 때는 정보가 많은 엄마가 인싸란다. 초등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이의 학습, 공부에 대한 관심도가 높기 때문에 정보력이 많은 엄마랑 친해지면 코 안 대고도 코푸는 방법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말도 잘 못 붙이고 정보력도 없는데 최고 중에 최고 인싸가 있다. 그건 바로 공부 잘하는 아이의 엄마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의 엄마는 조용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엄마들의 워너비, 엄마들의 킹오브킹 되시겠다. 공부를 어떻게 시켰는지 무슨 문제집을 보는지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 세계 어느 미스터리보다 궁금하다.
그래서 엄마들의 최고 인싸가 되기 위해 오늘도 돈을 벌러 신발 타고 뛰쳐나간다.
딸아. 엄마가 열심히 돈 벌어서 책 많이 사줄 테니까 엄마 인싸되게 해 줘.
협박 아니고 엄마 진짜 마지막 소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