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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여사 Nov 22. 2024

설여사 이야기

29년 차 시제시다바리 설여사

올해 봄 시아벗님은 숙원사업이셨던  선산에 납골당을 만드셔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상님들을 한 곳에 모셨다. 이 집 조상님들은 참 좋으시겠다. 이젠 한데 모여 담소도 나누시고 후손이 오면 같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아! 같이 묻히신 며느님들은 싫으시려나... 여태 따로 있으셨는데 굳이 한 곳에 모셔놔서 다시 시집살이를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 낯가림 심한 내향적인 설여사는 층층시야 시댁 조상님 근처엔 절대로 죽어서라도 묻히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수목장을 해달라고 아들에게 일러두었다.


시집와서 25년 동안 한번 빼고 24번의 시제음식을 시어머니와 둘이 장만했다. 그렇게 25년이 지나고 설여사도 헌 며느리가 되었고 몸이 불편하신 시어머님을 이유 삼아 더 이상 시제 음식은 하지 말자고 시아버지께 제안드렸다. 20여 명이 넘게 참석하던 시제는 점점 참석률이 저조해졌고 그것을 계기로 시아벗님은 음식장만은 안 해도 되겠다고 하셨다. 그게 4년 전 일이다. 이젠 당숙들의 나이들도 많아지시고 젊은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 시제는 그렇게 사라지려나 했는데 4년 만에 시아벗님이 납골당을 조성하시고 조상님들을 한 곳에 모셨더니 다시 일가친척들이 시제에 오셨다. 자신들의 부모님들이 볼모로 납골당에 누워 계시니 '몇 월 며칠 몇 시에 선산으로 '라는 총무를 맡으신 당숙님의 문자 하나에 교회 다닌다고, 바쁘다고 예전엔 얼굴 한번 안 보이던 남편의 사촌들까지 부모님들을 모시고 참석하셨다.

이젠 이런 시제 하지 말고 각자 부모님 기일날 와서 인사하고 가면 번거롭지 않고 좋을 텐데 우리 집 어르신들(특히 설여사 시아벗님)은 후손들이 우르르 모여 십몇대 윗 조상을 위해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좋아하신다.


시제를 끝내고 오신 총무당숙님은 자신이 시제를 요즘시대에 맞게 간편하게 지내려고 작은 도자기컵 30개를 사셨단다. 도자기컵에 물을 따라 조상님들께 정안수를 올리고 인사드리고 끝냈다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며 그 도자기 컵이 담긴 쇼핑백을 설여사에게 건네며 이제부터 이것만 잘 관리하면 된단다.

난 맏며느리도 아닌 둘째 며느리인데, 맏며느리 윗동서가 있었는데 바로 없어졌다. 그래서 설여사는 29년째 이 집의 맏며느리 아닌 맏며느리가 되었다. 어쨌든... 젠장 뒷정리는 또 내 몫이다. 난 시집와서 29년 동안 시제음식 장만에 손님접대, 뒷설거지까지 혼자 다하고 코로나 때는 남편이랑 둘이 벌초도 다니고 뒤에서 허드렛일은 다했는데 누구처럼 꿈에 로또번호 불러주는 조상님도 없다.


다른 후손들은 예쁜 옷 차려입고 와서 절 두 번 하고 가면 끝이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설여사 손엔 뒷정리할 도자기컵 30개가 전해졌다. 이 씨 집안의 조상님 모실 때 쓴 예쁜 도자기컵 30개는 마음만 대단한 큰집 장손인 우리 시아버지의 둘째 며느리, 설 씨 집안에서 시집온  설여사가 확 하나 집어던질까 하다 꾹 참고 혼자 깨끗이 씻고 물기 없이 닦아 정리했다는 건 이 씨 조상님들은 아시는 걸까.


<조상님들 전상서>

조상님들 올해가 설여사가 아무 말 없이 시제시다바리 한지 29년 차입니다. 말이 없다고 속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저마저 안 도와주면 시어머니 혼자 하셔야 하는 걸 알기에 저도 힘들었지만 꾹 참고 음식장만에 설거지했습니다. 도자기컵 30개 씻는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 의사도 물어보지 않으시고 당연히 네가 이런 거 하는 거지 하듯 무례하게 전달된 도자기컵 30개는 저를 서럽게 만들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문중 땅문서라도 같이 주셨다면 덜 서러웠을 텐데 말입니다.

납골당에 모셔진 조상님들~ 내년 시제시다바리 30년 차엔 예쁜 도자기컵 30개와 로또번호라도 같이 주시면 그동안의 서운함이 싹 사라질 것 같습니다.^^  

-설여사 올림-


시제 :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께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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