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덜 지워진 어제 위로 오늘의 선을 긋다

by 정성균

무언가를 참 잘하고 싶다는 열망은 쉽게 속도를 앞당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빌려 쓰려다 정작 소중한 현재를 텅 빈 채로 흘려보내기도 한다.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쫓느라 발밑에 피어난 풀꽃의 흔들림을 놓치는 형편이다. 하지만 내가 관찰해 온 자연의 흐름은 인간의 조급함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계절이 바뀌는 건 갑자기 일어나는 마법이 아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가다, 어느 때에 이르러 그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고요한 축적이 비로소 자신을 증명하는 순리다. 지금 창가로 스며드는 보드라운 기운 또한, 지난겨울 내내 묵묵히 이어온 느린 기다림의 산물이다.


흔들림 속에서 마주한 시간의 질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하얀 화면이 거대한 절벽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커서만 깜빡이는 무심한 자리 위로 눈길이 한참 머물다 보면, 밑천이 여기까지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사유는 중간에서 맥없이 끊기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속절없이 하루를 보낸다.


그럴 때 나는 머리를 쥐어짜는 대신,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는 절차를 가만히 따라가 본다.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올리고, 선반에서 손때 묻은 잔을 꺼내고, 가방 속에 낡은 노트를 챙겨 넣는 일들이다. 거창한 다짐 없이도 자연스레 이어지는 동작이다. 신기하게도 그 움직임이 하나씩 맞춰질 때, 멈춰 있던 내 안의 흐름도 다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알렉산더 데만트는 저서 『시간의 탄생』에서 인간이 거대한 혼돈 속에 어떻게 질서의 기둥을 세워왔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겪는 나날은 자연이 거저 준 선물이 아니라 사람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배열에 가깝다. 매일 같은 때에 원고지 앞에 앉는 소박한 구조들이 모여 하나의 틀을 이룬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행위들이 쌓여 비로소 생의 마디가 생겨나는 법이다.

글자도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 단번에 매끄러운 지면이 터져 나오는 법은 결코 없다. 균일한 틈새 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이다. 정직한 순서가 이어질 때, 길을 잃었던 생각들도 어느덧 그 뒤를 조용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도서관, 사유가 겹쳐지는 서가


봄은 결코 서둘러 도착하지 않는다. 다만 지난겨울의 사투가 기어이 꽃자리로 터져 나올 때 비로소 그 얼굴을 내밀 뿐이다. 추운 겨울 내내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서 이어온 노력이 한꺼번에 바깥으로 밀려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방향을 잃지 않고 꾸준히 움직였던 뿌리의 인내가 꽃이라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앞선 이들이 남긴 사유의 문장들 사이를 가만히 소요(逍遙)하는 기분이 든다. 수백 년 전의 고전과 엊그제 발간된 신간이 같은 책장 안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중 한 권을 꺼내 펼치면, 거쳐 간 수많은 이의 손길이 닿아 마모된 책등과 모서리가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고뇌의 겹들이 포개진다.


나는 종종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하곤 한다. 옮겨 적는 동안 손은 아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정성껏 따라 쓰고, 잠시 멈추어 그 의미를 곱씹고, 다시 다음으로 이어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분석하는 머리가 아니라, 샤프펜슬 끝이 종이 위를 서걱거리며 구르는 규칙적인 리듬이다. 필기 속에서 호흡의 간격도 어느덧 일정해진다. 낮에 적어둔 그 기록들을 밤에 다시 펼치면, 고요했던 정적이 방 안으로 다시 흘러 들어온다.


책을 꺼내다 보면 면 사이가 유독 쉽게 벌어지는 대목을 발견할 때가 있다. 누군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며 읽고 또 읽은 자취다. 눈에 보이는 선은 없으나, 해진 질감이 그 사람의 응시가 머물던 자리를 말해준다. 나는 그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다시 읽으며, 앞선 독자가 숨을 멈추었을 지점에서 잠시 머문다. 손가락을 올려두고 한참을 보낸다. 이미 지나간 타인의 기록 위에 지금 나의 분초가 아주 얇고 투명하게 포개지는 때다.


책장이 닳아 얇아진 흔적들을 가만히 훑어본다. 여러 계절을 지나오며 수많은 손길을 견뎌낸 증거다. 유구한 흐름 사이에 내 자리가 조용히 겹쳐진다.


지워진 자리 위에 다시 긋는 선


종이 위에서 지우개를 쥔 손이 바삐 움직인다. 애써 적어 내려간 문장을 문질러 지우는 일은 사실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한 번에 완성되는 법은 없기에 의심하고, 삭제하고, 다시 적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흑연으로 남긴 자국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우개를 대고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방금까지 또렷했던 글귀는 은은한 그림자처럼 그 자리에 남는다.


나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자리 위에 다시 새로운 선을 얹는다. 그렇게 같은 위치에 겹쳐진 무늬들은 처음과는 조금 다른 농담을 갖게 된다. 이전의 고민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 오늘의 문장이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형국이다. 이 절차가 되풀이될수록 글은 점차 단단해진다. 불필요한 수식어들이 지우개 가루와 함께 깎여 나가고, 정제된 진실만이 자리를 잡게 된다. 손은 같은 곳을 수십 번 오가며 원고를 다듬는다. 얇은 자국들이 겹쳐지며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구절이 일어선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낡은 종이 위에는 수많은 나날이 쌓인 층이 만들어지고 있다. 손의 움직임, 고뇌, 잔상들이 모여 비로소 독자에게 가닿는 한 줄을 이룬다. 효율이나 속도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물리적인 쓰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깊이다.


사각거리는 정적 속의 퇴적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하얀 원고지 위에 샤프펜슬을 얹을 때, 나는 가장 정직해진다. 지면의 오돌토돌한 촉감이 손끝에 먼저 닿고, 이어서 샤프심이 깎여나가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속도는 결코 일정하지 않다. 때로는 매끄럽게 흐르다가도, 때로는 짧은 멈춤 속에 잠기기도 한다.


작업이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막막한 날에도, 나는 끝을 다시 대본다. 도중에 끊기더라도 기미는 은은하게 남는다. 가루는 섬유 조직 속으로 얇게 퇴적된다. 그 연필 자국은 문질러도 닳지 않는 삶이 지나간 흔적이다.


책상 위에는 항상 어제의 원고가 놓여 있다. 퇴고를 마친 부분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지우개 가루가 미처 다 털리지 않은 듯한 생생함이 남아 있다. 손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뭉개질 듯한 글자들 옆으로, 오늘 채워야 할 하얀 빈칸들이 길게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나날이 한 장 위에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누워 있다. 서로 다른 날들이 포개어지며 비로소 한 편의 글이 완성되어 가는 풍경을 보는 것은, 홀로 쓰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고독하고도 찬란한 기쁨이다.


스스로를 믿는 일상의 매듭


도서관에서의 움직임과 책상 위에서 이어지는 손의 흐름은 결국 같은 리듬으로 이어진다. 반복되는 소박한 동작들이 모여 하루를 구성한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오면 가지 끝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눈여겨보라. 보이지 않던 나날들이 겹쳐지며, 어느 때 선명한 형태로 떠오른다.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겨우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겹쳐졌던 세월이 비로소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때다.


지금 책상 위에는 정성껏 써 내려간 원고가 펼쳐져 있다. 창밖에서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지면 위로 얇게 내려앉아, 그동안 내가 수없이 긋고 지웠던 선들을 투명하게 비춘다. 여러 번 지나간 흔적들이 포개지며 비로소 나만의 문장을 이루어냈다.


글을 맺으려 보니, 마지막 구절 끝에 샤프심의 흑연 가루가 은은하게 배어 있다. 손끝으로 문지르면 아주 작은 입자가 번지듯 퍼진다. 원고지 위에는 이미 여러 번 지나간 자국들이 얇게 겹쳐져 있고, 그 위에 방금 그은 선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이 자취 위로, 또 다른 시간이 머물 자리를 남겨둔다.

창밖에서 들어온 빛이 그 포개진 어제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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