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마음이 툭 꺾여버린 날이 있지요.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세워둔 규칙들이 생을 지켜줄 것이라 굳게 믿었고, 평범한 매일이 영원히 곁을 지켜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며, 세상 모든 것은 정해진 수치와 논리대로 움직인다고 확신했지요. 하지만 일상이란 참 묘해서, 가장 견고하다고 믿었던 지점부터 예고 없이 방향을 틀곤 합니다. 정성껏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더군요. 커다란 폭발음이 생략된,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정도의 아주 미미한 소리였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시간은 참으로 길고 막막했습니다.
사람들의 위로 섞인 말들은 점점 멀어지고, 홀로 남겨진 서재의 시간은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책상 위, 물 주는 시기를 놓쳐 바싹 마른 화분 하나를 온종일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존재는 눈에 띄는 성공이나 화려한 문장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루를 지탱하는 힘은 매일 아침 책상 위에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몇 가지 조용한 약속뿐이었습니다. 무너진 자리에 주저앉아 과거를 후회하기보다, 남은 시간을 품격으로 버텨내기 위해 새로운 기준을 세웠습니다. 인생을 재건하기 위한 가장 낮은 곳에서의 질서였습니다.
기준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돌아서기로 마음먹었던 처절한 순간부터였습니다. 이미 궤적이 어긋나기 시작한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는 이유로 붙잡고 있던 일들이 있었지요. 멈추지 못하고 억지로 끌고 오던 무거운 행보였습니다.
손을 놓지 못한 이유는, 사실 너무 뻔했습니다. 쏟아부은 시간이 아까웠고, 지금 여기서 멈추는 것이 지난 세월 전체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돌아선다는 건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 같아서 그 단어를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사실은,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의 시선이나 이제껏 쌓아온 경력이 두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하루만 더, 딱 하루만 더 하며 이미 기울어진 배를 붙잡고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울먹였습니다. 물이 새는 둑을 손바닥으로 막고 서 있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분명 해지더군요. 더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버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진실이 보였습니다. 손에 쥔 미련이 너무 무거워 손목이 시려올 때쯤, 아주 조용히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만두기로, 그리고 돌아서기로 했습니다. 그 순간,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세상이 멈춘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고요가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지요.
그 낯선 정적 속에서, 삶을 다시 세우기 위한 약속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우선 감정은 흘려보내고 사실을 남기는 법을 익혔습니다. 마음이 이유 없이 무너져 내릴 때, 슬픔의 늪에 매몰되기보다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기록했지요. 문장에서 모든 형용사를 지우고 동사와 명사만 남겨보는 방식입니다. “비참하다”는 말 대신 “오후 세 시, 낡은 구두의 뒷굽이 떨어진 걸 발견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젊은 시절 엔진을 설계할 때 오차 없는 수치에만 집중했듯, 삶의 기록에서도 감정이라는 오차를 덜어냈습니다. 불안은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같습니다. 잠시 소란스럽고 밤잠을 설치게 할 순 있지만, 집의 기둥을 흔들지는 못하니까요. 비가 그치고 빗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정직한 구조물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첫 번째 기둥이었습니다.
통제의 경계를 명확히 긋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무너짐 이후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지독한 후회와 원망이었지요.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들이 밤새 괴롭혔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나 타인의 서늘한 시선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울기엔 남은 오늘이 너무 소중했지요. 조용히 선을 그었습니다. 손이 닿지 않는 것은 과감히 내려놓고, 지금 당장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베란다의 작은 식물에게 물을 주고, 흩어진 책상을 결대로 닦는 사소한 일들이 멈춰버린 삶을 다시 움직이게 했습니다. 통제 가능한 작은 질서들이 모여, 멈춰 있던 흐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남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도 매일같이 이어갔습니다. 타인의 눈부신 성취나 이른 성공을 바라보는 순간, 손에 든 소중한 것들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지요. 남들은 저 멀리 앞서가는데 홀로 제자리에 멈춘 것 같아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틀어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삭였습니다. “자,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낡은 책상으로, 지금 써야 할 한 줄의 문장으로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성장은 타인과 속도를 겨루는 경쟁을 넘어섭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스스로를 다시 지금이라는 지점으로 데려다 놓는 인내심 깊은 반복이 인간을 진정으로 자라게 하지요. 나무가 옆 나무보다 커지려 애쓰기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집중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몰입을 통해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법도 배웠습니다. 멀리 있는 결과나 보상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견뎌야 할 공허한 대기처럼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작업에 깊이 집중하는 순간, 시간의 결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 문장을 다듬기 위해 단어 하나를 수십 번 고쳐 부르는 동안 세월은 압축되고 동시에 깊어집니다. 억지로 등 떠밀려 흘러가는 시간에서 벗어나, 안에서 스스로 차오르는 매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삶에 남는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는 수치적인 계산보다, 생의 순간순간이 얼마나 밀도 있게 깊었느냐는 본질에 가깝습니다.
말보다 삶의 무게를 앞세우는 정직함도 지키려 애썼습니다. 실천 없는 언어들은 금세 공허해지고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지요. 과거에는 수많은 계획과 다짐을 세상에 쏟아냈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가벼운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먼저 살아보기로 했지요. 남들에게 공표하기 전에 사소한 약속 하나를 끝까지 지키고, 하루를 정직하게 견뎌내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정직한 축적이 쌓이면 문장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깊은 울림을 갖게 됩니다. 삶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온몸으로 살아내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완벽보다는 '완결'을 선택하는 용기도 냈습니다. 사람을 주저앉게 만드는 건 대개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함정이지요. 최고의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시작조차 못한 일들이 서재 서랍 속에 가득했습니다. 이제 부족하더라도 제시간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습니다. 마침표를 찍어야 다음 문장이 시작될 수 있고, 하나의 매듭이 지어져야 비로소 다음이라는 소중한 선물이 찾아옵니다. 완결은 포기나 타협이 아니라, 생애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겠다는 선택입니다. 일단 끝을 내야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정의하는 삶의 언어를 갖기로 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이나 행복의 정의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할 때 마음은 가장 심하게 흔들립니다.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상태에서 마음이 고요해지는지 확인했지요. 질문을 반복하며 나만의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정의한 말은 외부의 거센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방향을 타인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결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지도가 아닌 발자국이 만든 지도를 믿기로 했습니다.
일곱 가지 지표들은 대단하거나 화려한 장식과 거리가 멉니다. 돌아서던 아픈 날 이후, 다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잡았던 작고 눈물겨운 결단들이지요. 인생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조용한 약속들이 촘촘하게 이어지며 비로소 삶의 궤적을 만듭니다. 여전히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기치 못한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약속을 놓치고 자책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길을 잃어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지점이 있다는 것을요. 돌아서던 선택은 끝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삶으로 향하는 정직한 시작이었습니다.
그 선은 가늘지만, 분명합니다.
오늘도 그 위를 걷습니다.
정직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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