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40대에 접어들며 자주 드는 생각은 모든 일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고, 각자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생 스토리에는 지금의 본인을 만들어준 결정적 순간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인생의 변곡점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순간들 말이다. 나에게는 3년 전 여름. 약 한 달 만에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남편을 만난 일이 그랬다.
나의 십 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부모로부터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아쉬운 마음은 나라는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게 했다.
"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세상의 기준으로 잘난 사람이 되어야 이해받지 못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겠다."라는 생각말이다. 나는 이십 대 중반까지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보기에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본인에 대한 이해 없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비롯된 치열함은 세상의 기준으로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나 자신을 세상의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기 일쑤였고 열등의식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라해지기 싫고 공격받기 싫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20대가 가장 행복할 시기라고 하지만 난 나의 20대가 그렇게 행복하지 만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다. 나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매력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린 8년을 연애하다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의 입장에선 내가 그렇게 매력 있는 결혼 상대방이 아님에도 8년을 만나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식었나라고 의심이 든 적 없이 항상 따뜻했다. 반면에 나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한 행동들이 많았다. 마음 한편엔 내가 이런 사람이니 나랑 결혼해 살 수 있겠니?라는 시험인 동시에,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이걸 알고도 결혼하려면 해!라는 일종의 내 결점 고지의무를 한 것이다. 아이들이 가끔 아빠는 엄마랑 왜 결혼했어?라는 물음에 "8년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의리로 결혼했어."라고 말하는 정도니 본인도 왜 나와 결혼했는지 딱히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을 하고도 내가 힘든 일이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묵묵히 곁에서 한결같이 응원을 해주었다. 결국 내 어릴 적 받고 싶었던 정서적 지지와 자아 후원을 남편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렇게 내 삶에서 남편의 존재감이 커져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고마움을 내 권리인냥 당연하게 여겼고 감사할 줄 몰랐다. 이제와 돌이켜생각해보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더니 뭐든 제값을 치뤄야 얻어지는 것들이 많다.
2021년 첫째1호가 10살이 되는 시점이 되었다.
여기서 잠깐 1회에 소개되었던 가족 중 남편에 대해 얘기를 해야겠다.
남편: #18살에 만난 2살 많은 오빠 #ENFP #연애만 8년 #세미 알코올중독 #첫째랑 비슷 #직장인
#사춘기 딸은 힘들어 #코로나 #에크모 #한 달간 의도된 수면마취 #죽다 다시 살아나 다시 알코올중독
때는 3년 전 여름으로 돌아간다.
2021년 8월
온 세상은 여전히 코로나로 시끄러웠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인 세상에서 연일 새롭게 갱신되는 코로나 환자수는 뉴스의 단골 소재였다. 다행히 백신이 개발되어 2021년 2월 코로나치료 의료진을 시작으로 8월에는 18~49세 국민 대상 코로나 19 백신접종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사회 이면에는 코로나 백신접종을 하고 부작용을 심하게 겪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과연 백신접종을 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던 시기였다.
당시까지도 살아생전 크게 아파본 적 없던 남편은 코로나로 인해 많이 아프고 힘든 사람은 주로 면역력이 약한 노인층이고 본인 같은 젊은 사람에겐 코로나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증으로 가는 환자들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은 마스크를 쓰긴 하지만 코를 내리고 턱만 살짝 걸쳐서 쓴 경우가 많았고, 사무실 내부나 아는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은 2021년 8월 21일 토요일이었다. 남편은 아주 이른 새벽, 길을 나섰다.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지인들과 오랜만에 골프 약속 이 잡혀 있었다. 날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결국, 시작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접어야 했다. 코로나로 인해 샤워 시설은 되도록 이용하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마른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내는 게 전부였다. 옷이라도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아쉬우니 스크린 골프나 치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대충 정리만 하고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코로나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골프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토요일 오전 아 홉 시도되기 전이었는데, 인근 스크린 골프장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한 20여 분을 전화 돌려서 겨우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예약할 수 있었고 남편은 지인들과 차를 나누어 타고 예약한 장소를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스크린 골프장의 실내는 날씨 탓에 매우 습했다. 골프를 치는 내내 커피와 음료수를 마시느라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 반복했다. 이날따라 유독 조심성이 부족했다. 남편에게 코로나는 여전히 남의 일 같았고,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은 대개 무증상으로 끝나는 감기의 한 종류라고 여겼다. 그렇게 운동을 마치고 남편은 인근의 장어집으로 이동했다. 옛날에 함께 때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코로나 이야기 등 화제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자리는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오전 내내 몰아치던 비도 그치고 구름이 걷혀 있었다. 남편은 돌아오는 차 에어컨 바람에 서늘한 기운이 잠깐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베란다에 환한 주황색 조명을 켰다. 홈 캠핑의 감성(?)을 연출하며, 우리가족은 베란다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고된 하루이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냈다고 만족스러워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날 비를 맞은 후에 제대로 몸도 말리지 않았던 탓에 혹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잘못 쐬었던 탓에 오한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술병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한 원인을 진단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실로 오랜만에 몸살이 난 것은 분명했다. 으슬으슬함에 안방 보일러의 온도를 제법 높였고, 두꺼운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온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게 부탁해 일요일에 유일하게 문을 여는 동네 약국에서 사 온 감기약을 먹었다. 집에 구비된 체온계로 재보니 38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다행히 체온이 내려가 있었다. 중요하게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서둘러 회사로 출근해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났더니 전날과 같이 증상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감기증상이었기에 본인이 코로나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서둘러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약국을 들러 코로나 진단 키트를 샀다. 아... 이런.. 예상대로 흐릿한 두줄이 나왔다.(코로나 양성이라는 신호) 당시만 해도 코로나환자가 발생하면 집안 가족은 물론이고 직장까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치거나 불편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동선을 추적해 접촉자로 분류되면 코로나검사는 물론 강제격리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열제 만으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검사를 받는 것이 주변사람에게 피해를 덜 끼치는 것이란판단이 들었다. 검사 결과가 빨리 나온다는 근처 병원에서 코로나 확진판정받고 남편은 격리되었다. 방역복장을 한 구급대원이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와 남편을 싣고 갔다. 증상이 약하면 짧게는 5일 만에 격리해제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하니 떠날 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젊은 사람들도 심한 경우에는 죽음까지 가는 경우가 있다 하니 불안하고 불길한 마음은 떨쳐낼 수 없었으리라.
그날 집을 나서면서 내게 남긴말은
"나 혹시 10일 뒤에도 못 돌아오면, 내 컴퓨터 엑셀 열어봐. 거기에. 자산목록 저장해 뒀어. 그파일 비밀번호는 XXXX야.."
이사람이 매를 번다 생각했다. --;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만 남편은 혹시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버려 더 이상 본인에게 불길한 기운이 남아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3-4일간은 격리된 곳에서 생활을 사진으로 보내주었다. 나를 안심시키려 잘 있다는 남편의 말에도 기침과 열이 계속 심해졌고 심지어 4일 차 정도에는 산소콧줄이 사진상으로 추가되어 있었다. 폐의 정상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수치인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져만 갔다. 그리고 자주 하던 문자도 점점 뜸해지더니 확진 5일 차 밤에는 내 문자를 읽지도 답장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확진 6일 차 아침엔 간신히 내게 전화를 해서 본인이 상태가 안 좋아 상급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전화를 짧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상급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오후 1시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남편분 보호자 되시나요? 저는 00 병원 레지던트 000입니다.
*남편분, 우리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고요. 엑스레이 상으로 폐의 반 이상이 하얗습니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레지던트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환자분 의식도 없고, 그리고 자가 호흡이 어려워 기관삽관을 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레지던트의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가 싶었다. 분명 아침에 비록 짧게지만 나와 전화 통화까지 했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의식이 없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 가. 다그치듯이 되물었다.
"아니, 우리 남편이 의식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죠? 흔들어 깨워도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건가요?" 레지던트가 대답했다.
"네, 남편 분은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린 느낌이었다.
출처 아픈 줄만 알았는데, 고맙습니다-선홍, 단해
To be continued.
p.s 런던에 있는 The National Gallery에 가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인물과 사물 디테일묘사가 섬세하고 사실적인 데다 실제 약 가로 2m X 세로 2m 나 되는 크기의 그림이라 한눈에 그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시선을 움직여 이곳저곳 훑어보아야 합니다. 명작답게 작가는 곳곳에 메시지를 숨겨 놓았습니다. 특히 화면 중앙아래 긴 바게트 모양의 해골 왜상은 그림의 오른쪽에서 봐야 제대로 된 해골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애초에 작가가 실제로 걸렸던 장소를 고려해 층계에서 내려오며 비스듬한 각도로 바라볼 때 동그란 해골 모양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만 잊지않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걸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