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th-a woman's novel&noble life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작가의 유고시집이다. 나는 우연히 이 시집을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제목에 끌렸다. 박경리작가가 자신의 노년에 대해 한 말이다.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은 삶이라면 얼마나 단출했을까. 사는 동안 정말 욕심이 없었겠구나. 그 단출함과 욕심 없음이 부러웠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떠날 때 무엇이 남을까. 줄 것은 미리 주고 버릴 것은 미리 버려야겠다고. 그리하여 버려도 될 것만 남으면 참 홀가분하겠다고.
사진은 작가의 영정사진이며 유고시집의 표지이기도 하다. 볕 좋은 날 밭일을 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이미지를 검색하면 유독 밭일을 하는 사진이 많다. 땅을 일구는 것은 그녀의 삶의 큰 부분이었으리라. 그러하므로 1969년 [현대문학]에 <토지> 1부의 연재를 시작하고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토지>를 붙잡고 탈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생전에 인터뷰에서 가장 보람 있을 때가 언제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직접 키운 고추를 말려 마지막으로 고추의 꼭지를 딸 때에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작가의 인생 여정이나 작품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손수 키우고 말린 고추의 마지막 꼭지를 딸 때의 순간이라니 단순함 속에 진리가 들어있다. 나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난 지체없이 농부라고 말할 수 있다. 1주일간 책을 읽지 않고 살 수는 있지만 농부의 수확물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손수 키우고 말린 고추의 마지막 꼭지를 딴다는 것에는 숭고함이 담겨있다. 그 말에는 작가가 손수 쓴 글을 다듬고 다듬어 탈고하는 의미도 함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유고시집에서 두 작품을 소개한다.
<일 잘하는 사내>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둘 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작가의 말처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과 순리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일 터이다. 단, 정신이 맑은 자들에 한해서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본성을 잃은 자들은 온갖 세속과 더러움에 물든다. 탁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결국 본질과 순리를 잊고 돌아갈 곳을 잃는다. 내란우두머리가 탄핵됐음에도 여전히 그 잔당들이 수치를 모르고 떠드는 이 현실. 그들은 본질에 대한 회귀본능을 잃은 지 오래다.
<바느질>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자투리 시간
특히 잠 안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나 역시 박경리작가처럼 바느질을 즐겼다. 노안이 오기 전의 일이다. 밤에 아이들 재우고 사방이 고요한 시간 손바느질을 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실을 꿴 바늘이 천을 뚫고 들어가 나온 자리에 한 땀 한 땀 자국이 남고 작은 파우치부터 가방까지 실용적인 소품들이 눈에 보이게 만들어지는 것이 좋았다. 바느질과 글쓰기는 참 닮았다. 정직하다. 처음엔 서툴지만 쓸수록 는다. 딱 내가 쓴 만큼만 결과물이 나온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수정이 가능하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들 수 있다. 누구나 아름답게 만들고 싶겠지만 결과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꼭 미적인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기 위해 희생되는 자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밀도 높은 것은 연민이에요, 연민.
연민이라는 것은 불쌍한 것에 대한 것,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또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지요.
- 박경리 작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그릇에 담고자 하는 가치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글들은 어떤 식으로든 박경리작가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작고 연약한 것에 대한
연민과 숭고한 사랑은
본질에 대한 회귀와
순리에 대한 그리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치이다.
작가의 약력을 끝으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