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둔 3학년 수업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약속 없이 만나서 하루에 몇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졸업하고 나면 너희가 아무도 빠짐없이 다 모일 수 있는 날은 남은 인생에 정말 거의 없을 거야. 게다가 학창 시절이 아니면 이렇게 긴 시간을 매일 보는 인연은 정말 많지 않더라. 특별한 인연이야. 서로 더 친한 사람끼리는 쭉 보기도 하겠지만 졸업하면 안 친했던 친구들은 다시 만날 기회도 별로 없더라.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던 친구가 있다면 꼭 전했으면 좋겠어. 자기에게 그런 기회를 주길 바란다.”라는 말로 시작했던 수업.
동그란 원 모양으로 빙 둘러앉은 학생들. 교실 가운데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를 부르고,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토킹 인형을 전해준다. 3초 눈 맞춤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규칙은 없는 수업이었다.
인형을 받은 사람은 다시 누군가를 원 가운데로 부를 기회를 얻고 그렇게 교실 안 대화가 이어진다. 한 번 인형을 받은 사람에게도 또 줄 수 있다.
사실 이런 수업을 할 때면 교사인 나는 혹시나 상처받는 학생이 생길까 긴장한다. 그날도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까지 교실 속 2명이 친구들에게 이름을 불리지 못한 채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2명 중 A는 자폐가 있고 동 학년 아이들보다 한 살이 더 많은 학생이었다. A는 수업 내내 배경음악으로 켜둔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에도 음악이 나오면 종종 그랬기 때문에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자기가 받은 토킹 인형을 들고 춤을 추고 있는 A를 향해 다가갔다. 춤에 빠져 통 집중하지 않는 A와 눈을 맞추기 위해 자기 무릎을 꿇고 “형, 우리랑 같은 반 해줘서 고마웠어.”라고 말했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나와 다른 학생들은 숨죽이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른 기억은 많이 흩어졌어도 그때 마주친 학생들 눈빛이 참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어진 다음 순간엔 더 많이 놀랐다. 관심 없는 듯 춤만 추던 A가 자신이 받은 토킹 인형을 들고 혼자 지목을 받지 못한 B에게 다가가 말없이 토킹 인형을 던져주고 왔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는 또다시 서로의 눈을 봤다.
나는 말보다 눈빛이 마음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느꼈다. 촉촉한 눈빛들이 메마른 내 마음 어딘가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B는 특정 분야의 책을 자기 책상 위에 가득 올려놓고 어떤 수업 시간이든 관심 있는 분야에만 몰두하는 학생이었다. 평소 쉬는 시간마다 교실 컴퓨터를 독차지하거나 과제를 잘 하지 않아 다른 학생들이 같은 모둠이 되길 원하지 않던 학생. 말을 걸면 웅얼웅얼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길게 늘어놓았는데 혼잣말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항상 날씨와 무관하게 늘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검은 후드티 모자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어려운 B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실 난 당황한 B가 토킹 인형을 받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긴 할지 그 짧은 순간에도 또 걱정하고 있었다. 내 걱정과 달리 B는 실장을 불렀다.
자기 때문에 1년 동안 고생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1년간 들었던 B의 말 중에 가장 짧은 말이었지만 가장 선명한 말이었다.
학급 실장은 책임감이 강하고 실장이란 이유로 B가 하지 못한 역할을 채워야만 할 때가 많았다. 선생님들은 실장이 짊어진 짐을 알면서도 수업의 진행을 위해 B를 잘 이끌어 주길 부탁할 때가 많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눈이 붉어진 학급 실장은 흔들리는 눈빛과 목소리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준 학급 친구들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마치 각본이 있던 것처럼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전하고 나니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거침없이 무릎을 꿇던 한 학생의 용기가 번져 교실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반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참 신기했다. 그런 규칙을 제시한 것도 아닌데 상처받길 바라지 않는 마음들이 서로 모여 새로운 규칙을 탄생하게 했다.
학생들의 모습에서 상처 주길 원하지 않는 마음이 상처를 낫게 한다는 걸 배웠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제목 중 <느낌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그 책 속에 이런 글이 있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잠을 자려고 하는 시인과 소설가들 앞에서 내가 춤을 추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춤을 출 때 독자들이 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한 배를 타게 되지만 그 배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벼랑으로 떨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문장을 참 좋아한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난 희미하지 않고 선명하게 <느낌의 공동체>를 목격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공유했다. 아름다운 문장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일상은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돌아서서 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겠지만 나는 ‘상처’를 ‘상처’라고 부르기보다 ‘사랑이 필요한 자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날 느낌의 공동체를 함께 본 수업 속 학생들이 일기를 썼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 일기엔 많은 말이 적혀있지 않아도, 부드러운 단어들이 등장할 것 같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이 하고 사는 모든 말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는 말일 거라고.
많은 말이 필요한 삶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따뜻하게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이해한다는 말을 더 자주 꺼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