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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씨 Nov 15. 2024

당신이 죽어가는 이유

취향의 종말과 자아의 상실

 어느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되었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아이폰을 스크롤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머릿속은 텅 비어있는데 손가락은 분주하다. 새로 올라온 수많은 피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체크한 유사언론 뉴스. 유튜브. 오늘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백만 명쯤 되는 논객들이 쌍칼을 들고 운집한 커뮤니티. 나를 더 멍청하게 만드는 탁월한 선택인 1분 남짓한 숏츠와 릴스. 그 밖에 눈앞에 펼쳐진 온갖 콘텐츠들은 당신이 고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미리 선별해서 던져준 미끼일 뿐이다. 당신은 낚였다.


커피를 주문할 때도 다르지 않다. 메뉴판은 길고 화려하지만, 진짜 선택지는 없다. -이번 계절엔 바닐라 크림에 캐러멜 소스를 추가하시는 게 대세예요- 당신이 좋아하는 인플루언서가 올린 게시물을 떠올리며 당신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세니까, 유행이니까, 모두가 하니까. 커피 한 잔조차 당신의 것이 아니다.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가는 대로 줄을 서고, 계산하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여기 맛집이라고 그 방송에서 추천했더라고요- 맛이 평범해도 괜찮다. ‘남들처럼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되니까. 직장에서도 당신은 다르지 않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싶어 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조차 잊었다. 남들이 요구하는 결과물이 곧 당신의 목표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당신, 아직도 살아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숨은 쉬고 있고, 심장도 뛰고 있다. 점심에 먹은 짜장면의 짠맛과 간장게장의 짠맛을 구분할 정도의 미각도 있다. 그런데 정말 살아 있는가? 당신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당신은 당신을 죽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트랙 위에 있다.


트랙에는 출발선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우리는 그저 앞사람의 등을 보며 속도를 맞출 뿐이다. -—남들만큼–이라는 말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었다. 성적도 남들만큼, 커리어도 남들만큼, 연애도 남들만큼. 심지어 행복조차도 남들만큼. 그러니 당신이 느끼는 안도감은 남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신의 입장이 궁금해진다. 모두가 남 부럽지 않게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대체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정작 모두를 -평타- 선상에 두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도. 옆에 있는 놈보다는 내가 2% 정도 나았으면 싶거든.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싶으니까. 인간은 신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신은 분명 망나니일 것이다.


자, 생각해 보라. 그 모든 삶의 기준은 이미 당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사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모두 스스로를 조종하는 것이 익숙하다. 사회가 만든 규칙을 마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이 스스로를 압박하고, 점차 당신을 ‘그들’로 만든다. 당신은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흘러갈 뿐이다. 자신의 의지로 책 한 권 읽지 못하면서, 영화 한 편 온전히 볼 수 없으면서. 스스로 사색하기를 포기하고. 10분짜리 압축 영상에 담긴 이야기로 모든 것을 타인만큼은 충분히 알았다 자부하며 만족한다. 그래. 그렇게 사람이길 포기하고 효율적인 돼지가 된다.


현대 사회는 취향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아니, 빼앗아간다.


당신이 골랐다고 믿는 영화, 옷, 음악은 사실 모두 누군가 미리 만들어놓은 것이다. 광고와 리뷰, 추천 알고리즘의 손을 거치며 당신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당신은 —내 취향이야!-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러나 정작 당신 자신은 그 취향의 어디에도 없다.


이 스타일이 당신에게 어울립니다-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평가받지 못하면 취향조차 존재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은 끝없이 포장하고 꾸민다. 하지만 그 안에 당신의 진짜 얼굴은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는가?


살고 있다——는 답을 내뱉고 싶겠지만, 조금만 더 솔직해져 보라. 만약 오늘, 당신이 트랙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 번째는 혼란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동안 길을 잃을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잃는 것은 곧 당신의 길을 찾는 첫걸음이기에 자그마한 희망은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언제였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당신에게 너무 낯설어진 지 오래다.


모두 살아 있는 인형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조종당하며, 타인의 기준 속에서 하루하루를 소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로는 오래갈 수 없다. 당신의 길은 당신이 찾아야 한다.


남들이 그리는 지도가 아닌, 당신만의 지도를 그려라. 설령 그 지도 위에 보이는 길이 울퉁불퉁하거나, 아무도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이어지더라도. 부서지고, 망가지고, 실패할지라도 그것만이 당신을 살린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삶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은 아마 별문제 없이 편안할 것이다. 안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이 없다. 영혼이 없다. 배 부른 돼지만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를 찾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어떤 우상도. 누구와도 같이 걸을 수 없는 혼자만의 길이기에. 때로는 무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마주해야 한다.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만이 당신을 살아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당신은 지금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가?


만약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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