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추억을 나누는 사이
외국생활을 하면 많이들 힘들어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외로움인데, 난 운이 좋게도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딱히 외로움으로 고생해 본 적은 없다.
선천적으로 외로움과 거리가 먼 성격 탓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비교적 이른 때에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그 친구를 만난 건 호주에 도착한 지 3-4달쯤 되었을 때였던 거 같은데, 지인의 홈 파티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7살이나 많고 이미 호주에 정착한 지 꽤 되어서 영주권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막 도착해서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에 넘치던 나랑은 처음부터 그리 가까워질 접점은 없었다.
유일한 접점은, 내가 그 당시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무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작은 사업체를 만들려 했었고, 그 친구는 이미 이런저런 사업들로 돈을 벌었다가 한 번의 실패 후 다시 일어서려던 시점이어서 나에게 이런저런 팁들을 주는 정도였다.
작은 접점이지만 차근차근 올라가 보려는 의지가 서로 통해서였는지 시간이 지나며 어느샌가 서로의 집으로 놀러를 가기도 하고 운동도 같이하는 사이가 됐다.
그렇게 대략 7~8년쯤 정신없는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는 그 친구와 나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를 꽤 누리는 상태가 되어서, 여러 취미 생활도 같이하게 되었고, 억만장자는 아니지만 주변 또래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나는 딱히 모난구석은 없는 편이라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지만 그 친구는 꽤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서 그 친구에게 유일하게 대놓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나뿐이라 주변에서는 오래된 부부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즈음에선가, 그 친구가 갑자기 입원을 하는 일이 있었다.
화장실에 있는데 갑자기 항문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며 기절을 해서 같이 살던 동생이 응급차를 불렀다고 했다.
평소 건강에 문제가 없던 사람이라 큰 문제는 아니겠지 했는데 병원에선 원인을 찾는데만 6개월 이상이 걸렸다.
다행히 큰 수술은 없이 얼마 후 퇴원을 했지만, 그간 열심히만 살던 그의 삶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쉬는 법을 모르던 그가 짧게나마 여행을 가기 시작하고 남들이 평소 하던 휴가를 조금씩 즐겨보려 했다. 둘이 처음 간 하루짜리 여행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건지, 그렇게 1~2년 정도가 지나자 다시 몸이 근질근질 해 하더니, 어느샌가 지인과 함께 꽤 큰 규모의 사업을 시작했고, 주변에선 모두 걱정하는 분위기였지만 고집이 워낙 센 탓에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시 사업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쯤 지났을 때, 몸에 다시 심각한 이상신호가 와서 또 입원을 하게 됐다.
이번엔 지체하지 않고 한국에 병원을 알아봤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과도 이미 안면이 있던 상태여서,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병원에 그 친구가 지난번 진단받은 병의 전문의가 있어 바로 예약을 했고, 그렇게 갑작스레 한국으로 갔다.
다행히 한국에선 1~2주 만에 결과가 나왔다.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지만 희귀백혈병의 일종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치료를 거쳤지만 효과가 없었고 마지막 남은 수단은 골수이식이었다. 한참 후에 이식 가능한 사람을 찾았다고 했지만, 이식을 거부했다.
그렇게 시간이 2년 정도 흘렀다.
갑자기 호주로 돌아온다고 했고 나는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당연히 거동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2년 만에 만난 그 친구는 배에 복수가 가득 차서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건지 그땐 알 수가 없었다.
오자마자 일단 전에 치료를 맡았던 의사를 찾아갔고 집과 병원을 몇 주간 오갔다. 우리 집에도 며칠 묵었다. 원래 성격상 아픈 동안에도 남들이 찾아와서 건네는 위로의 말들도 그리 달가워하진 않았던 터라, 자기 집에서 원래 같이 살던 동생과 한동안 지냈다.
그러다 3주쯤 되었을 때 예전에 입원했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고, 나는 먹고 싶어 하는 음식들을 자주 사서 가져다주었다.
입원한 지 며칠 지나서 복수가 많이 차서 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그게 좋아 보여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복수를 뺐다는 날짜가 지나고 다시 찾아갔을 때,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도 기력이 없고, 이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바로 드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최대한 많이 연락을 했고, 한국의 부모님께도 오셔야 될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다행히 하루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줬고, 그날 밤에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지인이 세상을 떠난 건 처음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는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너무 멀쩡한 나를 걱정할 정도였다.
친구의 가족들이 다 못 오셔서 내가 상주를 맡고, 모든 절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화장터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끝난 후, 사람들이랑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바람을 쐬는데,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혼자 멍하니 있었는데, 그걸 보던 여자친구가 옆으로. 다가왔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펑펑 울어봤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그 후로는 신기할 정도로 멀쩡한 시간을 보냈다. 오히려 다른 지인들이 이야기를 꺼내기 조심스러워했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 이야기들을 했다.
매년 기일이 되면 나름의 기억을 한 번씩 꺼내보긴 했지만, 슬픈 감정은 없이 오히려 유쾌한 기억들이 많이 생각났다.
그러다 최근에 문득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가 같이 고생했던 그 7~8년 동안의 자세한 이야기들은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내 삶에서 아직까지는 가장 다이내믹하고, 힘들면서도 재밌었던 그 순간들을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이제 없다. 세상에 나만 가지고 있는 추억이 돼 버렸다.
그 친구가 눈을 감고 뒤늦게 도착한 친구의 새어머니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었다.
한국에 있는 의사는 호주로 절대 갈 수 없는 몸이라고 말렸고, 가더라도 복수를 빼면 바로 죽는 거라 절대 빼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
나한테 끝까지 호주로 왜 온건진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랑 여행했던 곳이 호주였다는 것. 20,30,40대를 호주에서 보냈기에 한국보다 호주가 편했을 거라는 것. 그 정도가 내가 추측하는 이유다.
어제는 그 친구의 생일이었다.
장례식 후 1~2년 정도는 기일이 되면 연락을 하던 친구들도 이젠 다들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라 전혀 서운하진 않다. 내가 굳이 알리지도 않는다.
나도 그 친구도 남자들끼리는 다정한 말을 못 하는 성격이어서 어찌 보면 이게 더 우리답게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때 ‘너 보러 왔지 인마’ 한마디 했으면, 내가 생일상이라도 좀 더 이쁘게 차려주었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