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빠순이를 욕했지만, 그들만큼 치열하게 뭔가를 좋아해봤나?
지난 주 금요일,
회사에서 인사이트세션이 있다고 했다.
인사이트세션이란 외부 강사를 초빙하여 직원들에게
'인사이트'를 주기 위한 '세션'이다.
이번에 섭외된 강사는 <덕후가 브랜드에게>라는 책을 낸
KBS현직PD 편은지 씨였다.
30대 중후반 정도 된 얼굴에,
단정한 정장재킷과 함께
PD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구두를 신은 모습이었다.
한 때 방송국 물을 아주 잠깐 먹은 나로서는
그 모습이 다소 'kbs'스러운 아웃룩이라 생각했다.
강의는 재밌었다.
PD답게 언변도 좋으셨다.
(왜냐면 PD는 늘 자기가 만들/만든 프로그램을 열심히 세일즈해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광고를 얻어야 하는 입장)
강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브랜드, 마케팅에서 팬('덕후', 일본어 택인(오타쿠) :
대개 집에 틀어박혀 좋아하는 것에 심취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을 한국어로 언어유희한 '오덕후')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이다.
과거 연예인들이 마치 성역처럼 방송국 안에서
철저히 숨겨진 모습을 보이던 시절과 달리,
'라방'(라이브 방송), '자컨'(팬이 직접 만든 자체 컨텐츠) 등
팬들과 더욱 자유롭게 소통하는 과정에서
팬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최애'(가장 좋아한다는 뜻)
연예인의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더 유명해지게 잘 되게 만드는 데
전념을 다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아미'라는 가수 BTS의 팬클럽(전세계)
'영웅시대'라는 가수 임영웅의 팬클럽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강의 내용이 좋아서,
'밀리의 서재'에서 위 도서를 다운받아 읽기 시작했다.
책 속 내용이 강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우연히 떠오른 질문이
내 마음을 크게 때렸다.
물론 좋아하는 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레고를 좋아해서 집에서
하루종일 레고로 이것 저것 만들었었고,
중2때 우연히 접한 '셜록홈즈' 시리즈에 심취하여
밤 새도록 보기도 했고,
넥슨에서 서비스한 '바람의 나라'라는 MMORPG 게임으로
방학 한 달을(약 500시간) 게임만 하며 보내기도 했다.
현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미어터지는 출퇴근길에도 꺼내 읽고,
골프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서
영하10도에도 연습장/골프장을 찾는 등
추운줄, 아픈줄 모르고 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무언가를 '죽어라' 좋아했던 경험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깐의 즐거움이었고,
잠깐의 설렘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잠깐의 기간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7년 정도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최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식음과 잠을 포기하고서 '그것'을 위해
미친 열정을 보인 기억은
단언컨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것 같다.
뭘 좋아해도 적당히 좋아하고,
뭘 즐겨도 적당히 즐긴다.
재밌는 영화, 게임 등 컨텐츠가 나와도
적당히 즐길 뿐
더 알고 싶어서 전작이나 감독의 인터뷰,
나아가 연관된 다른 콘텐츠를 찾는 '수고'를 하진 않는다.
아무리 맛있다고 하는 집도
1시간 이상 기다려서 먹을 자신도 없고
그럴 가치도 못 느낀다.
말 그대로
만족을 느끼는 필요조건이 낮아진 느낌이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가는 노력이
학습된 '귀찮음'과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되는 것 같다.
계속 이렇게 살면,
늘 '적당한' 수준만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최근 인기리에 방영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는
다양한 출연진, 음식 및 구성적인 부분도 극찬할만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백종원의 재발견(?)' 혹은 '재평가(!)'가
더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외식사업가, 요리 유튜버 정도로
알려진 백종원 씨는 사실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성적으로 합격한 엘리트다.
그런 그는 젊어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대학을 다니면서 음식점에서 요리를 배우며 요식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시절 SKY 나오면 대기업에서 줄서서 모셔가던 시절에
처음부터 맨땅인 사업에 뛰어든 것도 참 대단하다)
그는 현재
다양한 프렌차이즈(흔히 아는 한신포차부터 빽다방까지..)를
운영하는 더본코리아의 대표이사이기도 한데,
주로 서민들의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사업이 메인이다보니
그가 '파인다이닝'을 평가하는 것이 적합하냐는 지적이
초반부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그는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셰프들이 사용한
음식재료 및 조리기법을
'맛만 보고' 맞춰냈다.
게다가 더 빛난 것은
누구보다도 '요리'에 진심인 그의 모습들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 장면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그가 '요리'를 좋아해서 군대도 '취사장교'로 다녀왔다는 사실에
박수를 치며 웃기도 했다.
내가 백종원 씨를 보며 느낀 결론은 바로,
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제대로 미쳐본 적도 없는 내가,
당연한 듯이
'최고 좋은 삶'을 꿈꾸는 게
부끄러웠다.
어느덧 30대를 훌쩍 넘은 지금이라도
미친듯이 좋아할만한 것을 찾아,
'최고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근처 어디까지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