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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강 Nov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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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의 시간(소설연재 2)

미리가 저 멀리 움직이는 누군가를 혹은 자동차를 그 어떤 생각도 없이, 따라서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흘러가는 물을 보듯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기억하기로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미리가 다니던 여고는 도시 변두리 조금 높은 언덕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등하교 삼 년 동안 늘어나는 건 종아리근육뿐이라며 투덜대면서 숨 헐떡이며 올라가는 등교 길에선 어김없이 ‘이과 반 종아리만 하겠냐?’고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학교의 하루를 여는 루틴이었다.


이과 반 학생들은 자신들의 종아리를 내려다보며 줄곧 자조 섞인 한탄을 했고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은 종아리를 가졌던 문과 반 학생들은 자기 위로 삼아 내뱉던 말이었다.


일 년 내내 아침마다 듣는 이과반 종아리 이슈가 신입생들에게 선입견을 만들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다른 여고에 비해 미리네 학교는 이과 반이 유독 적었다.



어쨌든 이과반 종아리 이슈는 이삼 학년 이과 반 교실들은 특별실이 모여 있던 사 층 과학실 옆에 붙박이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졸업생이 나가면 그 자리는 이학년 교실이 되고 또 그 자리에서 졸업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서 이과 반은 이년 동안 같은 학생들이 같은 교실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같은 담임과 지내는 시스템의 학교였다.


자리배치를 학생들 자율로 맡기던 담임의 운영 방침 덕분에 미리는 거의 이년 내내 제일 인기 없는 햇살 넘치는 운동장 창 쪽  가운데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미리의 같은 반동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운동장 쪽 창을 암막 커튼으로 완벽하게 막은 뒤에 전등을 켜고 공부를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하필 운동장 창 쪽 앞에서 네 번째 자리가 커튼의 가로길이가 살짝 짧아서 서로 맞닿지 않는 바람에 세로로 기다란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빛이 바래고 실밥이 너덜너덜 빠져나온 오래된 블라인드 대신 특별실 암막커튼을 옮겨 달았을 때 여고생들은 환호하였는데 설치하고 보니 가로길이가 안 맞았던 것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전등을 끄는 바람에 커튼 틈으로 더 강력해진 빛이 광선검처럼 교실을 빙 돌며 사선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엎드려 잠을 청하던 아이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연하게 늘 지쳐있던 아이들도 새 걸로 바꿔 달라며 교무실로 행정실로 쫓아가서 요청했지만 학교는 그럴 때마다 왜 대낮부터 커튼을 치고 불을 켜고 있느냐며 오히려 혼내는 통에, 학교 쪽에서 전기세와 커튼 값을 맞바꾸는 전략을 취할 경우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한 미리의 학급 친구들은 빠르게 대안을 찾았다.


커튼이 모자란 그 틈새를 따라 원소 주기율표 등이 인쇄된 과학실 포스터들을 위아래로 길게 붙여버렸던 것이다. 모자라는 맨 아래쪽은 아쉬운 대로 B4 크기의 복사 용지에 딱풀을 발라 붙여버렸다.


수업시간의 교실엔 주광색 형광등이 환했고 쉬는 시간의 교실엔 거의 완벽한 어둠이 늘 느른하게 채우고 들어왔다.



 ‘여기는 어둠의 딸들만 모여 있나?’


‘전기 먹는 하마들 같으니라고.’



 어둑한 교실에 들어와 스위치를 올려야 하던 선생님들마다 한 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그 이상의 간섭은 없었다.


미리는 쉬는 시간마다 가늘고 긴, 빛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먼 바깥 풍경을 내심 좋아했기 때문에 어느 하루 종례 후 청소당번 차례가 왔을 때 아이들이 붙여놓았던 맨 아래쪽 종이에 조심스레 물을 먹여 불리고 긁어내어 소심하기 그지없는 시야를 확보했다.



미리도 다른 아이들처럼 하루에 서너 시간은 교과가 뭣이 되든 간에 엎드려 자는 편이었고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돌렸을 때 밖을 바라볼 수 있을만한 높이에 새로 생긴, 문제집만 한 크기를 지닌 그 네모난 창은 교실 안 누구에게도 유의미한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매시간 찾아오는 짧은 십 분마다 어둑해지는 교실의 쿰쿰함을 깨는 빛 구멍을 ‘어둠의 딸들’도 싫어하지 않았다.


언제나 떠들썩하며 파란만장한 여고시절을 보내던 문과 반에서 평가하기를 대체 감성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는 이과 반 친구들도 그 빛구멍 옆자리만을 주야장천 고수하는 말도 없고 친구도 없는 미리의 자기 주도적 외톨이 기질을 대충 인정해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어슷한 사각형으로 들어온 빛은 책상에 엎드린 미리의 창백하고 얇은 눈꺼풀 안에서 투명한 주홍빛으로 바뀌었고 하루 중의 시간에 따라, 또 계절에 따라 주홍빛의 채도와 따스한 온도가 시시각각 그러데이션 되었다.


다만 그것을 느끼며 엎드려 자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자리여서 그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건 미리만의 비밀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종이를 긁어내고 시야를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엎드려 고개를 돌렸을 때 약간의 햇살이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전등 빛을 아주 좋아하는 ‘전기 먹는 하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배려를 심어 아주 소심하게 유리창에 달라붙은 복사용지를 긁어냈을 뿐이었다.


미리가 엎드려 자다 깨고 또 자다 깨고를 반복하다 바깥이 보이는 그 시야에, 남쪽을 바라보는 학교건물 맞은편 멀리 동서로 뻗은 도로가 보였다.


그 도로 뒤로는 미리네 학교가 있는 언덕배기보다 훨씬 높은 산이 하나 마주 보고 있어서 산허리를 따라 산동네들을 가로지른 산복도로까지 두 겹의 도로가 더 있었다.


그 도로들이 놓인 맞은편 산까지는 직선거리로 최소한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서 세 줄의 도로 사이사이에 겹겹이 자리 잡고 있던 이삼 층짜리 건물들이 성냥갑 크기로 보였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과 자동차들은 작은 점처럼 보였다.



어느 날인가 미리는 하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주 느린 속도로 건물 사이사이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를 반복하며 움직이는 하얀 점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문득 미리는 전율을 느꼈었다.


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이렇게나 먼 곳에서, 자신과 아무 상관없을 어느 여고생이 그것도 수업시간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르기 때문에 미리의 시선은 그가 목적지까지 원만하게 도달하는 데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미리가 자동차를 관찰할 때도 자동차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움직이는 차 속의 운전자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미리라는 존재 때문에 운전자가 탄 차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그 어떤 사고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미리는 편안해지곤 했다.


미리가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가벼웠던 미리의 눈꺼풀이 어느새 셔터를 내렸고 눈꺼풀 안에서 몇 개쯤 주홍빛 폭죽이 터지다 아른거리며 밤새 못 잔 잠으로 바뀌곤 했다.


짧지만 깊은 수면을 서너 번 반복하다 보면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 따위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마술 같은 시간들이기도 했다.


미리는 남들이 겪는 고등학교 시절의 무겁고 느린 시간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미리의 시간들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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