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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강 Nov 19. 2024

붕괴된 파동

미리의 시간(소설연재 3)

미리의 모든 시간들이 항상 그렇게 빠르게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 마냥 박제되어 절대로 흐르지 않는 정지 시간이란 게 미리에게 있었다.



그때도 가을이었다.


성숙해진 대도시의 가을은 풍성한 빛과 색의 축제였다.


거리에도, 빌딩의 바다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솟은 작은 언덕들에도, 미리네 아파트 뒷산에도 여름의 초록을 밀어내기 시작해서 드디어 승리하는 짧은 한 때, 온갖 색들이 빛을 내는 그림 같은 계절이었다.



그날 미리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식사용으로 사들고 온 통밀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웠다. 평소처럼 얼그레이 티백을 우려낸 머그잔에 따듯하게 덥힌 우유를 부어 들고 거실 창가에서 서성댔다.


차를 호로록 거리며 마시는 동안 일몰이 아직 삼십 분쯤 남았음을 가늠했다.



산을 아직 넘어가지 못한 가을 햇살이 도심 여기저기 뭉쳐있는 단풍 든 나무들 사이에서 긴 파장으로 반사되어 미리의 거실에 걸린 알버트 비어슈타트의 인디언서머의 허드슨 강이라는 그림과 거의 같은 명도로 같은 채도로 빛나고 있었다.


미국의 서부지역과 허드슨 강 주변의 광활한 대자연을 주로 그렸던 비어슈타트의 그림을 미리는 좋아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아서 대자연 속 한 그루 나무 같은 혹은 한 마리 사슴과 다르지 않은  같은 존재여서 더 좋아했다.


그림 속 인물들이 화가에 의해 통제되고 간섭받지 않았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좋아서 미리는 그의 복제 작품을 두 개나 사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산을 등진 동향 아파트는 늦은 오후 아직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전에 밖을 바라보는 데 이점이 있었다.


 역광은 얼굴을 감추기에 맞춤이다. 동향의 고층은 언제나 미리가 선호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미리는 빈 머그잔을 싱크대 개수통에 집어넣고 집 안을 돌며 화장실과 주방 싱크대 조명까지 모두 껐다.  


발코니에 자리를 잡고 앉기 전에 진한 갈색 버티컬을 두세 칸 정도만 남겨두고 닫았다.


여고시절 이과반 교실의 암막커튼이 만들었던 딱 그 정도의 폭에 그보다 조금 더 긴 공간이 미리의 집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빛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었다.



미리에게는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가정집을 들여다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원칙이 있었다.


그건 도덕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금기였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삶의 장면을 들여다보면 사적인 감정이 일어날 수 있고 사적인 감정은 모든 것을 흩으러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미리의 삶에 깊이 배어있었고 미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벽이기도 했다.       


미리의 집은 투 베이의 판상형 아파트로 15층 아파트의 10층 3,4 라인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규칙적으로 배열된 같은 규격의 불 꺼진 거실들 중 하나일 것이었다.



축제가 진행 중인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속에서 그저 이리저리 사람들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광장엔 사람 대신 대칭성으로 가득 차서 거기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특별함은 사라진다.


한 사람쯤 들어내어 광장의 다른 곳에 이동시킨다고 해도 광장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미리는 그 많은 아파트 거실들 중에 하나를 뽑아서 다른 층의 다른 칸에 바꿔 넣는다고 해도 절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대칭성이 충분한 그런 곳으로 늘 숨어들었다.


새로운 집을 찾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벌집 한 칸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동안 차를 몰고 다니며 사찰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산속 깊이 자리 잡은 사찰들의 공통점은 가는 길은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절집 마당에 서면 거짓말처럼 바깥세상이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개미집 미로 같은데 들어서서 바깥을 바라보면 너무나 관대하게 온 도시를 보여주는 산중 사찰 같은 그런 곳.


 미리는 이사 다닐 때마다 인터넷 지도를 훑어보며 동네를 찾았고 항공샷과 스트릿뷰를 참고하고 발품을 팔다 결정하면 언제나 결국은 앞이 툭 트인 산동네였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면과 평지는 주로 택지와 상가였고 그 구역을 지나면 8차선 대로가 있었다.


 8차선 대로 너머에는 산동네와는 다른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단지가 다른 세상처럼 버티고 있었지만 이쪽으로는 낡고 낮은 빌라들과 꼬마 빌딩들이 산사면의 경사를 따라 물결치듯 펼쳐져 있었다.


고도가 낮은 빌라구역의 가운데쯤 오른쪽으로 기독교 관련 신학대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대학의 긴 담장은 이층높이의 축대 위에 성벽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빌라와 꼬마빌딩들이 있는 구역에는 주차장이 부족하기 십상이라 담장 밑으로는 거의 모든 날 모든 시간 자동차들이 줄줄이 주차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미리가 덤덤하게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고 자동차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양이가 그려진 베트남산 나무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 렌즈에 왼쪽 눈을 들이대고 주정차구간 쪽으로 삼각대의 수평각도를 조정하며 옮겨가던 그때, 그 길 옆 붉은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아이보리 색  타일을 붙인 신축 오피스텔의 꼭대기 층의 창 안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보였다.


그 남자의 창은 미리 쪽을 향해 열려있었고 뭔가 기다란 원통형 물체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남자는 분명 멈칫하는 듯했다.



‘저건 망원경인데....’



미리 역시 흠칫했다.


미리가 카메라를 들이대기 이전부터 그가 미리가 있는 곳을 보고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다.


불가능해야 했다.



미리가 사람을 관찰할 때는 아주 먼 거리의 사람이어야 했다.


절대로 미리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리에서, 아주 작아서 윤곽이 불분명한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정도여야 했다.


그가 절대로 미리의 존재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에 있어야 했다.



자신을 관찰하는 존재를 깨닫는 순간 관찰되는 사람도 관찰하는 사람도 더 이상 편안해질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건 파동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미리는 더 이상 이전의 미리일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인 광장에 들어서면 미리는 자신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뚝딱거려진다는 걸 깨닫곤 했다.


빌딩들은 미리에게는 관찰하고 싶은 수많은 창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눈을 가진 관찰자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 많은 창 중에서 누군가 단 하나의 창을 통해서라도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미리를 콕 찍어 단조롭고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미리에게 그런 생각은 피할 수 없는 인과이자 업보였지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미리는 거리를 걷거나 광장에 들어서는 걸 꺼리게 되면서 차라리 수많은 인파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걸 선택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모든 설정 값이 흐트러졌다.


톱니바퀴의 어느 항목에서 값이 흐트러졌을까.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미리도 남자도, 아니 온 세상이 잠시 고요하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아주 긴 정적 같은 시간은 사실 십 초도 채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처럼 정적을 깬 것은 남자가 먼저였던 것 같았다.


아직 얼어붙어있는 미리를 향하고 있던 남자의 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던 기다란 원통형 물체 뒤로 남자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서서 남자는 계속 미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거꾸로 씌워진 하얀 캡이 어스름해져 가는 여명 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남자가 계속해서 미리 쪽을 보는 것을 느끼는 순간 미리는 의자 다리를 누가 발로 건드린 것처럼 무게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카메라 삼발이가 그녀의 발에 걸려 넘어졌고 카메라에서 망원렌즈가 분리되면서 물을 주느라 발코니에 내놨던 유리로 된 고사리 화분으로 떨어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나는 것처럼 들렸다.



미리는 겨우 일어나 서둘러 버티컬을 다 닫아버리고는 난장판이 된 발코니를 치우지도 못하고 겨우 거실로 들어왔다.  


난공불락인 그녀의 요새가 들통난 것 같은 두려움이 미리에게 몰려왔다.


밤이고 낮이고 하루에 두세 번씩 위급하게 들려오던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바로 지금, 바로 옆에서 들리기라도 하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빙빙 돌듯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미리는 가볍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모로 누웠다.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내 쪽을 보고 있다고, 꼭 나를 봤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망원경이 아닐 수도 있어.’



합리적 의심을 만들어가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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