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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고양이를 저 끔찍한 상자 속에 집어넣었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그 비밀

by 우유강


오늘은 고양이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네. 고양이 말이지요.

상자 안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상자 안 고양이라...

버려진 빈 택배 박스 안에 있는 막 구조한 아기 고양이 한 마리.

아직 떨고 있지만 조금은 안심하며 몸을 콩벌레처럼 둥글게 말고 있는 고양이, 혹은

아직 전투력이 남아있어서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사람 손길에도 참으로 하찮은 하악질을 해대는 아기고양이를 상상하셨나요?


혹은 제목을 보자마자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맞습니다.

끔찍한 상자 속에 도저히 허용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고양이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누군가는 분노할지도 모릅니다.

‘왜 가여운 고양이를 저런 상자 안에 가두었냐? 끔찍한 청산가리 가스가 분출될지도 모르는 상자에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 이건 명백한 동물학대다.’라고요.

그러니 당장 동물권리보호를 위한 시민단체나 아주 가까운 파출소에라도 신고하려고 분주하게 막 일어설 참이라면 조금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자 안에 고양이를 가두고 관찰하는 실험은 그냥 [머릿속 생각으로 하는 사고실험(思考實驗)]일뿐이거든요. 우리가 걱정하는 끔찍한 일은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거랍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고요?

흐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너튭의 알고리즘이 온통 고양이 쇼츠인 사람인지라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이런 가상의 상황을 설계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죠. 방사성 원소를 살상용 가스와 연결시켜서 고양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확률로나 따지는 이런 발상을 누가 하겠습니까?

목표 지향적이고 감정이 메마르고 비뚤어진 성향의 괴짜 과학자들이 떠오른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일반화시킨 확증편향적 차별발언이라고 역공격 받을 수도 있겠지요.

이 실험은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양자 물리학자의 유명한 사고실험입니다. 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설을 비판하고 조롱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었고, 불확정설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아인쉬타인이 손뼉 쳤던 실험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2023년에 양자역학 붐을 일으켰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대학원 시절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지도교수를 독이 든 사과로 죽이려 했었는데, 오펜하이머가 이후에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 되었던 막스 보른을 만났고 막스 보른과 슈뢰딩거가 서로 또 삐끗한 인연이었으므로 세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건 오펜하이머의 독살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네요.

영화에서는 각색된 것이긴 하지만 살해미수 혐의로 실제로 재판까지 받았으니 오펜하이머도 괴짜 금쪽이였던 건 사실인 거 같습니다.


어쨌든 그 실험을 생각해 낸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도 오펜하이머, 막스 보른, 아인쉬타인과 [현대시 과학구 ‘물리학동’]이라는 같은 동네 사람들이었던 거죠.

하마터면 빡!!! 돌아서 담임교수 살해범이 될 뻔했던 오펜하이머의 리얼 스승인 양자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상자 안의 고양이 실험]을 제시한 슈뢰딩거와 거기에 동조하며 고개 끄덕거렸던 아인슈타인도 어째 거기서 거기일 거 같은 묘한 갸웃거림이 생기네요.

어쨌든 물리학자들은 다소 엉뚱하고 기발하며 때로는 상상 이상의 것들을 찾아내서는, 우주의 비밀 따윈 난 모른다며 뒷걸음질 치는 머글들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우주의 본래면목으로 다가가게 해주는 능력들이 있으니 이 끔찍한 상자에 고양이를 집어넣는 상상쯤은 눈 질끈 감고 참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아보자고요.



상자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상자 안에는 복잡한 장치도 설치되어 있다.

1. 치명적인 독가스인 청산가리가 담긴 유리병이 있다.

2. 유리병 곁에는 조건만 갖춰지면 실패확률 제로로 유리병을 내려칠 준비를 하고 있는 망치가 있다.

3. 망치는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계수기는 상자 속에 방사능 물질이 있을 경우 그 양을 측정할 수 있다.

4. 라듐이라는 방사성 물질이 있다.

※ 참고. 라듐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방사능 붕괴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물질이며 한 시간 정도면 방사성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하며 그 확률은 50%다.

상자 안에서 벌어질 일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략 한 시간 후 라듐의 방사능 붕괴가 시작되면 방사능을 검출하는 가이거 계수기가 그걸 탐지하게 될 것이고 탐지하는 순간 청산가리 병만 노려보고 있던 망치가 바로 병을 내리쳐서 청산가리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청산가리

가스를 마신 고양이는 죽게 된다.

그런데 확률은 반반이다.

ㅡ한 시간이 지나도 라듐에서 방사능 붕괴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ㅡ언제 붕괴가 일어나서 방사능이 유출될지 모르므로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생존은 예측불가이다.


한 시간 후에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는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한 시간 후에 우리가 상자를 연다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미 죽어있는 고양이를 보거나 혹은 아직은 다행히 살아있는 고양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자를 열기 전에 이미 고양이는 죽었든지 살았든지 이미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상자를 열지 않고 모른 체하더라도 고양이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는 사실 뉴턴의 고전물리학 세계관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인쉬타인과 슈뢰딩거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별 거 없답니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의 움직임의 변화를 수와 식을 이용한 방정식으로 예측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뉴턴 물리학을 도구로 사용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운명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확실하게 샤우팅 할 수 있습니다.


예측은 신의 경지 아닙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물과 사물 사이의 ‘미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어요.

시간의 저 너머 과거는 기억 속에라도 있지만 1초 후에 일어날 일도 예측 불가였던 아주 오랜 지구대자연의 삶에서 인류에게 예측 가능한 미래는 천체의 움직임 외에는 없었을 겁니다.

자연현상 중에 가장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천체 현상을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었던 천관(天官)이 곧 신관(神官)이자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은 인류역사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뉴턴 물리학은 지상의 사물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해 낼 수 있는 확실한 도구로 방정식을 만들어 내놓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행성들의 움직임, 그때까지 미확인상태였던 새로운 행성의 존재까지 예측이 가능했으니 예측불가의 세상에서 무지몽매에 시달리던 인류는 마치 신이 되어가는 듯 기고만장해집니다.

게다가 그 물리학의 끝판왕 아인쉬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엄청나게 세련된 물리학의 세계로 인류를 데려갔으니 물리학은 뉴턴이 시작해서 아인쉬타인이 찢어줬다!!라고 환호했었지요.

하지만 물리학이 발달할수록, 관측 도구와 실험도구들이 더 세밀해지고 정확해질수록 아인쉬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으로도 도저히 풀이가 안 되는 더 깊숙한 물리학의 세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과학이 절대적인 가치를 얻는 것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물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로 이것(상자 속 고양이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상자 속 고양이에 대한 양자 역학의 해석은 우리의 뒤통수를 아주 세게 칩니다.

우리가 상자를 열어 확인할 때까지 고양이는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결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니 결정될 수 없다고 합니다. (막스 보른의 확률파동)

고양이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결정하지 않는다(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설)는 말인데 그게 무슨 이야기죠?

심지어 우리가 상자를 열 때까지 상자 안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파동의 중첩, 다중우주론)

이럴 때 ‘이 무슨 개소리야~’를 외치는 낯익은 얼굴과 소리가 환청과 환영처럼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럴 수가 있나요?’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아직 입 밖에 내지 마세요.

양자물리학을 조금이라도 엿본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바로 한쪽 입 꼬리를 묘하게 꼬아 올리면서 속으로는 ‘이 사람은 아직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는구나!’ 라며 자신에게 으쓱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계속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상자를 여는 탐구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냥 일인칭 ‘나’로 바꿔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상자를 여는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상자를 열어서 확인하는 순간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고양이의 밝은 갈색의 동그란 눈을 마주 봤습니다.

그 순간, ‘아! 다행이야.’라고 안심의 탄성이 나옵니다.

고양이는 살아있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누군가 묻습니다.

지금 살아있다고 확인했지만 현재 살아있다는 사실을 100%라고 확신할 수 있나?

양자물리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살아있는 고양이는 여전히 50% 확률로만 살아있는 거다.]

그러면 나머지 50%의 확률인 죽은 고양이는요?

나를 바라봤던 눈을 동그랗게 뜬 살아있는 고양이는 이미 내가 상자를 열기 전의 고양이는 아닙니다.

‘50%의 죽은 고양이’는 어쩌면 ‘다른 어떤 곳’에서 누군가 ‘또 다른 나’에게 발견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리학자들이 말합니다.

양자물리학자가 말했다고요? 무슨 마술사들이 아니고요?

네 양자물리학자 맞습니다.


소위 현재까지 학문으로 공인된 모든 지식들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하기도 어렵고, 전달하기는 더 어렵다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아예 자신들이 연구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써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자백하는 물리학자도 있었습니다.


아뭏든 상자 속 고양이에 대한 양자물리학자들의 해석대로라면 미래는 절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 아닌가요?라고 물으신다면 그렇다네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거시세계라고 합시다. 우리가 가시광선을 이용하여 우리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세계가 상대적으로 거시세계에 해당됩니다. 바로 이 거시세계의 대부분의 움직임은 뉴턴 역학으로 그 변화의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시세계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인 아원자 세계(즉 원자를 구성하는 그 보다 더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서는 그 움직임의 결과가 절대 예측불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복수의 예측은 가능합니다만 그 움직임이 뉴턴 물리학, 아인쉬타인의 물리학으로 표현하는 방정식으로는 절대 그 결과 값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원자 세계에서 입자들의 움직임은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결과가 나타나고 그 값은 확률밀도함수에 의해서만 예측된다고 합니다.

다시 얘기해 보겠습니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에 다가가는 나, 그리고 동시에 살아있을 수도 있고 동시에 죽어있을 수도 있는 상자 안의 고양이는, 내가 상자를 여는 순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확률적으로 죽었거나 또는 살아있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이것 참! 소름 돋지 않습니까?

내가 상자를 열었는데 고양이가 죽어 있었어요.


뉴턴 역학의 세상에서는 그 고양이는 내가 상자를 열었던지 안 열었던지 이미 그 시간 이전에 죽든지 살든지 결정되어 있었을 거라는 거죠. 심지어 내가 여는 순간 죽는다 해도 그건 내가 상자를 열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죽을 거라고 예정되어 있는 겁니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약속된 규칙과 상징들로 표현할 수 있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변화한다는 것이 일반물리학의 세계이고 어쩌면 나와 세상이 서로 통제된 조건 하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맴돌이를 하고 있느냐고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니 ‘외롭지만 가볍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에서는 말이지요.

내가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여전히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고양이의 죽음은 반드시 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상자를 여는 이벤트의 결과로써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고요. 이 얼마나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잔인하고 무거운 인과업보(因果業報)의 세계인가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양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거대하고 환상적이며 예측 가능하게 살아가는 이 멋진 거시세계에서 호들갑을 떨게 할 가치가 있나 물어보신다면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모바일, 컴퓨터, 그리고 모든 디지털 세상이 바로 양자역학으로 탄생한 세상이라는 것을 일단 상기시켜 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바지에서 삐져나온(picking out) 주머니에서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로 각자의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세상과 나는, 그저 지구와 서울 여름 하늘에 떠 있는 외로운 베가(직녀성)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거의 주지 않고 우주에서 맴돌이하는 그런 관계인 것 같나요?

아니면 세상과 내가, 나와 저 사람이, 나와 이 사람이, 그리고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순간 어떻게든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고야 마는 양자역학 속 관계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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