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만나는 평범한 일상도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전에는 말이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자꾸만 얼굴에 기어올라 따끔거리는데 옆으로 옮겨 앉을 힘과 의지조차 없다. 그러는 사이에 몇 번의 계절이 사그라졌다. 사람들에게 병색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늘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윤기 나던 머리가 다 빠져버렸다. 아픔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웃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아파도 웃고 슬퍼도 웃는 얼굴이 될 때까지.
치료가 끝났을 때 문을 밀치고 나갈 에너지조차 동이 났다. 몸은 코끼리처럼 퉁퉁 부었다. 발걸음 떼는 것조차 온몸의 힘을 짜내야 움직여졌다. 머리가 빠지기 전 내 모습과 흡사한 긴 가발을 샀다. 굽슬굽슬 웨이브가 들어가 있는 가발은 원래의 머리보다 더 예쁘고 예술적이었다. 사람들은 머리가 너무 예뻐서 그런지 더 젊어졌다고 했다. 그냥 웃었다.
무거운 맷돌을 끄는 듯 떼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일월저수지 장미넝쿨이 향기를 내뿜으며 빗속에서 봄을 건너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다가 오는 길인지 비의 걸음이 무척 바빠보였다. 오랜 가뭄 끝에 듬성듬성 마른 가지가 보였다. 투병생활로 옹색하게 웅크리고만 있던 내 마음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일월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고층을 오르내리는 사다리차가 빗속에서 휘청거리며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나에게 어려운 상황을 용감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무언의 응원 같았다.
울타리에서는 붉은 꽃잎이 비에 흩어져서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가 비를 머금고 무거워서 바닥에 떨어져 있다. 오랜 투병생활로 낡고 닳은 나를 보는 듯했다. 문구점에서 빵끈을 샀다. 하나씩 울타리에 엮어주면서 내년에는 장미도 새순을 내어 더 풍성해지고 나도 새순을 내어 회복되리라는 소망이 생겼다. 다음해에는 지친 나에게도 탐스런 꽃이 피겠지 싶었다.
매일 떼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일월저수지를 찾았다. 처음에는 30분 정도 걷다가 되돌아왔다. 조금씩 걷는 시간을 늘렸다. 한 바퀴를 도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점점 단축되어 1시간이면 가능해졌다. 발걸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일월저수지의 가장자리에는 부들 숲이 있다. 그 속에는 개개비라는 조그만 새가 살았다. “개개개 개개개” 우는 그 자그만 새소리와 바람이 불 때 사그락사그락 누웠다 일어서는 부들 이파리 소리가 너무 좋아서 종일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노을이 물속으로 잠자러 가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봄비가 마르면 가족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가는 큰고니 가족들도 만났다. 노을이 질 무렵 고니가 날아오르면 저수지 전체가 장관을 이룬다. 물닭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올망졸망 데리고 다녔다. 나는 저수지 가장자리 그 둥지를 날개 아래 자라는 산부인과 병동이라고 불렀다. 물의 품에 안겨있는 얽은 집 한 채를 품고 어미는 사방난간을 돌며 알을 데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우주가 된다는 것 그 거룩한 작업을 지켜보며 어미에게 알이 우주인지 알에게 어미가 우주인지를 곱씹어보았다. 호흡을 다독거려 물빛도 긴장한 저수지 언저리를 서성거렸다. 온기를 덧대어 끝없이 불어넣는 숨결이 거룩하기까지 했다. 봄도 막바지인데 산부인과 병동엔 두 우주가 어느 정거장에서 접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탯줄도 원천을 찾아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매일 일월저수지를 산책하며 오고가는 무수한 계절을 만났다. 나의 건강은 걷는 것뿐만 아니라 투병생활 후 7년이란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가끔씩 달리기도 될 만큼 숨 쉬는 것이 좋아지고 심장이 단단해졌다. 일월저수지의 사계절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통로가 되었다.
일월저수지의 다양한 사계절은 예기치 않은 삶의 난관을 만난 나에게 가장 큰 위로자이면서 나를 통째 품어주는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