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남의 술꾼일 뿐이다
고양주도(高陽酒徒, 고양의 술꾼)는 <사기(史記)>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고사입니다.
진류(陳留) 현 고양(高陽) 사람인 역이기(酈食其)는 글을 즐겨 읽고 똑똑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출세하지 못하고 마을 성문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고 불리며 살아가던 그는, 훗날 한나라의 황제가 되는 유방이 진류현을 지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지에 찾아가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합니다.
여기부터의 내용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사기에 따르면 그때 유방은 발을 씻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자를 보내어 '자신은 천하를 평정하는 일로 바쁘니 선비를 만날 틈이 없다.'라고 전달하는데요, 이 말은 들은 역이기는 눈을 부릅뜨며 사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빨리 들어가서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선비가 아니라고(吾高陽酒徒 非儒人也) 말씀하시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방은 역이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이 한나라의 개국공신 역이기와 한고조 유방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군대를 일으키기 전 마을의 왈패와 놀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도덕과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들을 일종의 '꼰대'로 여겼다는 묘사가 있습니다. 굳이 역이기가 '술꾼'을 '선비'와 대치시켰다 함은, '내가 쉰소리나 하러 온 꼰대로 보이느냐'라고 호통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물론 평생을 공부한 역이기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발언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유방과 만나겠다는 그의 절박함이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자는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여긴다.'라고 유방에게 진언할 정도로 실리주의자였던 그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주도(酒徒)는 보통 술꾼이라고 번역됩니다. 술을 좋아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무리 도(徒)'의 용례로는 학도병, 도당의 무리, 교도, 군도, 문도가 있습니다. 보통 무장집단이나 같은 사상, 배움을 공유하는 집단에게 붙이는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도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할까요? 같은 뜻을 가지며 함께 술을 좋아하는 무리... 오늘날로 건달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생 공부만 한 역이기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엄청나게 낮춰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역이기의 말을 이런 뜻으로 생각합니다.
"날 봐라. 내가 쉰소리나 하러 온 꼰대로 보이나. 나는 내 멋대로 여기 쳐들어온 건달일 뿐이다. 네가 호걸이라면 날 만나라. 그리고 내 말을 들어라."
나는 평생 역이기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그를 따라 나 자신을 호남의 술꾼(湖南酒徒)이라 소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