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방과 후 친구들과 PC방에서 열심히 동체시력 단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방에 두고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미국 가. 그것도 2년이나!!"
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든어택에서 총이나 쏘고 있던 나였는데, 갑자기 '해외'라니!
2007년, 아버지가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대학병원에서 안식년을 보내게 되면서 우리 가족 모두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 '이민'을 준비하게 되었다. 사실 2년이라는 정해져 있는 시간이었지만, 아빠와 다르게 엄마는 마음속으로 이미 이민을 결정하고 계셨던 거 같다. 여섯 개의 이민 가방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각자의 여행 가방까지 빵빵하게 부풀려 놓았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누나와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 대신에 무거운 짐을 들어야 했던 건 결국 아빠였지만 말이다. (아빠 사랑해!)
출국 날,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모와 삼촌, 사촌들이 모두 모인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한국으로 연락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더 각별하게 안녕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외할머니는 손수 구운 김을 챙겨 오셨는데, 이미 짐 무게가 초과라 더 넣을 수 없다는 직원에게 "이거 없으면 얘네 죽어~!"라며 간절히 부탁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도 사랑해!)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인천에서 뉴욕, 다시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비행했다. 18시간을 훌쩍 넘어 날아온 끝에, 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턴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파랬다. 보스턴 로건 공항에 발을 디딘 순간, 가슴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묘한 감정. 영어로 적힌 표지판, 낯선 얼굴들, 손에 땀이 차도록 움켜쥔 여권,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서자 스친 서늘한 공기. 이상하게도 지금도 여름 새벽 공기를 마실 때면, 그날의 간질거림이 다시 떠오른다.
미국 현지 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언어에 재능을 보였던 누나와 다르게, 나는 학습하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미국에서 공립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해당 학교가 있는 도시의 교육청에서 입학시험을 봐야 했었다. 입학시험이라기보다는 언어 능력 시험이라고 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 시험에는 여러 그림이 나오고, 그에 맞는 설명을 영어로 적으면 되는 나름 쉬운 시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다. 딱 한 그림, 낙하산을 메고 하늘을 나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너무나 빳빳했던 내 뇌를 아무리 쥐어짜도 '낙하산'이 영어로 뭔지 생각이 안 났다. "뭐였더라... Balloon은 아니고..."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쓴 답은 "A flying man"이었다.
뭐.. 날고 있긴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한국 중학교 1학년을 다시 시작하는 셈인, 7학년으로 입학했다ㅎ
시험에 적은 'A Flying Man'처럼 내 시작은 어설펐고, 그 어설픔을 모아 가르침으로 바꿔줬던 KE081. 티켓에 찍힌 그 코드가 내 유학 생활의 이름표가 되었다. 수업에서 틀리고, 말 한마디 때문에 당황하고, 길을 잃을 때도 그건 내 '여정표'의 일부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엉뚱한 답안이야말로, 낯선 땅에서 내가 배울 첫 번째 공식이었다는 것을. 중요한 건 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계속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