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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O Jun 19. 2020

02 | 나는 죄인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 양성 판정 받은 죄인이었다. 사실, 피해자였지만

역학조사관님과 여러 명의 보건소 담당자와 두 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는 지치게 만들었다.

체온계는 없어 정확한 체온은 잴 수 없었지만 점점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몸을 침대에 뉘인 뒤 생각들을 정리했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회사에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눈을 감았다.

방 문 너머 들리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금세 깬 나는 방문을 열고 본 광경에 속상한 마음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은 룸메이트가 손에는 비닐장갑에 마스크를 끼고는 갑자기 사방팔방을 닦고 다니는 것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속상함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굉장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프랑스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냉장고며 방 문이며, 화장실 도기며, 심지어 찬장 안의 식기까지 꺼내서 일회용 손 물걸레로 닦고 있었다. 하나 닦고 버리고, 하나 닦고 버리고.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시에 내가 무슨 역병이라도 옮긴 것 마냥 그렇게 사방팔방을 닦고 다니는 그 친구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지는 음성 판정받았으면서.

방 문에 기대어 그 친구가 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본인 일에 집중하던 그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는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본인이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I am just doing what I can do right now.'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사실, 이미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먼 타지에 와서 믿을 친구라고는 나 밖에 없는데 그 친구가 코로나 양성 확진 판정을 받았다니.
가족도 없는 타지에서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할 생각 하면 앞이 깜깜하겠지.
나는 병원에 입원해도 본인은 집에 머물러 지내야 하니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내가 손댔을 만한 곳 들을 계속 닦아내고 있었다.

한 참을 지켜보다 쓰레기봉투를 꺼내 들고 안내받은 대로 폐기해야 할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봉투에 다 담고 보니 한 짐 되었다. 다른 봉투에 두 번 싸서 단단히 묶어서 문 앞에 두었다.


전화를 통해 안내받은 것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짐을 챙겼다. 근데 대체 얼마나 있게 될지 알 수가 없어 얼마큼 챙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과 며칠 전까지 할머니 병간호를 했다고 병원에서 무엇이 필요할지 내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퇴원 시 폐기해야 할 것 들 위주로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 챙기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부족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친한 형님이 하나하나 물어가며 챙겨다 주었다. 그것들도 다 적었다. 이 글을 빌어 P 형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한가득 전한다.)


코로나 확진 판정
입원 시 챙긴 물품들

(만 27세 남성 기준)

수건 세 장

큰 수건 한 장

칫솔과 치약

얼굴 세안용 클렌저/기초화장품

샴푸/컨디셔너/바디클렌저

립밤/핸드크림

세탁용 막 비누

물티슈

손풍기

폰 충전기

노트북

전자책

반팔/민소매 티셔츠 3벌

속옷 3장

슬리퍼

면도기


삼분의 일 즈음 챙겼을까? 갑자기 또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구급차가 15분 내로 도착할 테니 준비하세요.'


전화를 끊으며 혼자 욕을 뱉었다. 분명 미리 언제 올지 알려주겠다던 구급차가 15분 내로 도착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죄 없는 Siri를 불러 '15분 타이머 맞춰줘' 소리를 지르고 서둘렀다. 정갈하게 챙기는 것은 포기하고, 제일 아끼지만 막 굴리는 파란색 프라이탁 더플백을 꺼내 들고 모두 다 때려 넣기 시작했다. 저질 면역력을 위해 꼬박꼬박 챙겨 먹는 오X몰 이뮨 영양제도 박스 채로 집어넣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집 앞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전화에 대고 짜증을 낼 뻔했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했더니 되려 나에게 시간이 없다며 짜증을 낸다.

'아 내가 먼저 짜증 선빵을 쳤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인가?' '좋게 말하는 나에게 짜증을 내지? 좋게 말하니 만만한가?' '주말 수당 받으면서 분명 일 할 텐데 좀 좋게 못해주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여하튼 짐은 다 챙겼다.

가방을 둘러 매니 그제야 울리는 타이머. 나는 제시간을 지켰다. 지들이 일찍 온 거지.

신발장에서 나와있는 신발을 바로 신었는데 왜 하필 또 목이 높은 하이탑 신발이었을까. 기를 쓰고 신는데 또 전화가 울린다.


'집  앞에 차를 댈 수 없어 옆 공원 앞에 서 있으니 거기로 오세요. 빨리요!'


'알겠습니다! 내려갑니다!'를 연발하며 내려가서 보니 공원 옆에 주차 한 엠뷸런스가 보였다.

내가 도착하니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 한 분이 뒤에 타라며 손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올라탔다. 운전석을 보았다. 그리고 '저 사람이 전화로 짜증 내던 인간이구나.' 하고 속으로만 씩씩거렸다. 차마 욕은 할 수 없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는 저들도 사실은 이 코로나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Front-liner이자 간접적인 피해자일 테니. '고마운 마음을 가지자'며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근데 문득 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 엄청난 죄를 지은 것 마냥 얼굴을 숨기고 쓴 모자를 푹 눌러쓰며 얼굴이 안 보이도록 가리고 올라타는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엠뷸런스에서 바라보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풍경

강남에서 살고 있지만 병원은 강북으로 배정되었다.

사실 완전히 모르는 곳은 아니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의 병원로 배정되었다. 익숙한 병원으로 배정되어 긴장감은 덜 했지만,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옅은 긴장감은 떨칠 수 없었다.

엠뷸런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한강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이질적이었다.

그날 유독 날씨가 흐렸고 안개도 자욱했다. 미세먼지인가?

 

구급차의 창문에 붙어있던 십자가를 끼고 바라보는 한강은 아마도 처음이었어서 그런 걸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계속 가슴속에서 일렁거렸다.



긴장감.
그리고 락스 냄새.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방호복을 입은 선생님이 내리고는 주변의 다른 방호복을 입은 분들과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시더니 내가 타고 있는 칸의 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곤 차에 있던 내 짐들을 내리고는 철제 카트 위에 올리시고 대형 분무통에 든 액체를 잔뜩 뿌리셨다.

곧 코를 찌르는 락스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이어서 야외 위치한 이동형 진료소 같은 데로 이동하고 간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 컨테이너로 들어가  인생의 첫 CT 촬영을 해봤다. 다른 것도 아니고 코로나 때문에.

촬영을 시작하고 마칠 때, 안내를 해주시는 분들은 '손을 대지 말라'고 계속 강조를 했다. '아마도 내가 손을 대면 소독처리를 해야 하니 그런 것이겠지'하고 최대한 가이드를 따랐다.


다시 외부로 나오니 간호사 두 분은 비닐로 된 간이 방호복 같은 걸 입혀 주시고, 발에는 하얀 발싸개를 씌워주셨다.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얼굴에는 마스크까지 씌워 주셨다. 따라오라는 말을 따라 함께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을 따라오시는 선생님께서는 뒤에서 열심히 그 락스로 만든 소독액을 뿌리며 좇아오셨다.


그리고 도착한 316호.

비닐로 봉인된 에어컨. 못으로 고정 된 문. 그리고 CCTV.

1인실로 배정된 병실에는 창문과 연결된 내 몸 만한 기계 하나와 냉장고, 환자용 침대와 혈압 측정기, 옷장, 그리고 서랍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실 밖으로는 나와서는 안된다는 설명과 함께 간단한 안내 사항을 설명해 주시고는 선생님들은 짐을 풀고 환자 복으로 갈아입으라며 환자복 한 벌과 수건 한 장을 주고 나가셨다.

창 밖으로는 작은 공원이 보였다. 창문은 열 수 없도록 나사를 박아 고정되어있었다.

에어컨은 사용할 수 없게 봉투로 싸여 있었다. 벽과 바닥을 보니 건물의 나이는 대략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접이식문(자바라커튼)을 젖히고 보니 세면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고, 뒤를 돌아 문을 열면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문을 닫으며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근데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 번쩍거리는 전광판은 나애게 매일 밤마다 눈뽕을 선사했다.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족에, 회사에, 친구에. 양성 판정을 받은 뒤 우선 문자로 가족과 회사에 이 사실을 먼저 알렸다. 물론 그 문자 이후, 전화는 계속 빗발쳤다. 나는 최대한 설명을 했지만 겁에 질린 이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나도 무섭고 모르는데.  입원 절차를 완료하고 연락을 드리겠다고 전화를 모두 끊었다. 그리고 역학조사관과의 통화 중간중간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도 함께 물었고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 두었다.


가족에 전화를 돌렸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할머니 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던 엄마에게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간 엄마에게 역학조사관에게 듣고 여쭤본 내용들을 설명해드렸다.   

가족들은 나와 식사 중 접촉을 했기 때문에 자가격리 대상자임

가능한 빠르게 관할 보건소에 가서 확진자와 접촉한 가족이라 밝히고 검사를 받으실 것

가족들의 연락처는 내가 넘겼으니 곧 연락이 갈 것  

자가격리 조치가 이루어질 것 같으니 검사를 받은 후 보건소 담당자에게 안내받으실 것

나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방문/면회는 불가

엄마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 걱정도 끊임없이 해주셨다. 나는 애써 괜찮다고 말하며 엄마의 걱정을 달랬다. 엄마한테 엄한 걱정거리 만들어 줘서 미안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은 회사.

우선은 내 소속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역학조사관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차분히 설명드렸다.   

최초 증상 발현일로부터 2일 전을 전파 가능일로 본다고 함

하지만 나는 그 가능일부터 회사를 출근하지 않고 자택에서 근무하였음

그리고 그전에 출근한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사무실 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음

사무실 내 동선은 우리 사무실이 위치한 층과 1층의 카페였음

감염이 된 시점은 주말 중으로 추정되나 평일 동안은 관련 증세가 없었음

때문에 역학 조사관이 알려준 기준으로 보면 사무실 내 전파 가능성은 없어 보임

사무실 또는 건물의 봉쇄조치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도 남겨주셨음  

회사 명과 주소 등 필요한 정보 모두를 역학조사관과 보건소 담당자에 모두 넘겼으면 필요하면 연락 갈 것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먼저 선제적으로 조사/확인 후 확인한 정보를 공유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당혹스러움은 괜히 나까지 덩달아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감염된 것 같냐?', '조심하지 그랬냐' 등 나도 몰라서 궁금한 질문들을 계속 받았지만 적당히 둘러대고 걱정 끼쳐서 죄송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그 당혹스러움은 본부장 당신의 자녀와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겠지.


잠시 뒤 울리는 전화는 다른 본부의 본부장이었다. 현재 상황을 물어보시기에 앞에 설명한 것을 다시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이어서 '확진 소식을 듣고 우리 사무실이 위치한 코워킹 스페이스 담당자가 나와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라고 말하셨고 난 별 수 없이 '알겠다'라고 하고 전화번호를 넘겨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안부 물어봐 주어서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코워킹스페이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신 담당자는 내 상태를 물었다. 괜찮다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어디 거주하시죠? 확진자 번호가 나왔나요?'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무슨 죄수번호를 묻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역학조사관 말에 따르면 최초 증상 발현일 기준 2일 전부터 전파 가능하다.

토요일 검사, 일요일 양성 판정 받았으며 최초 증상은 토요일 저녁부터 있었으며 2일 전이면 목요일이 전파 가능 시기로 볼 수 있다.

나는 지인으로부터 전달받은 소식을 듣고 목요일부터 자가격리를 했으니 사무실 및 건물 내 확산 가능성은 없다.

사무실 출입 단계부터 근무 내내 최대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글에 모두 쓰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미 수 번을 반복하여 설명했기에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시 물어보는 '몇 번 확진자이시라고요?' 질문에 속으로는 '나도 모른다고 이 사람아.'를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열다섯층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들을걸 생각하니 본인도 애가 타서 그러겠지.'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에도 이성을 찾으려 하던 내가 참 신기했다. 내 몸은 점점 열이 끓는 게 느껴졌는데.

'역학 조사가 다 안 끝나서 아직 안내가 안 된 것 같습니다. 따로 확인되면 알려드릴게요. 부득이하게 불편드려 죄송합니다.'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그저 죄인이었다.
전염병을 옮긴 죄인.

전화 통화를 하면 할수록 나는 죄인이었다.

가족에게 전염병을 옮긴 죄인.
회사에 전염병을 옮긴 죄인.
지역사회에 전염병을 옮긴 죄인.

나는 통화를 할수록 계속 변명 같은 상황 설명을 해야 했고 설명이 끝나면 다들 나에게 '어쩌다 걸렸냐? 조심하지 그랬냐?'라고 하나같이 물어봤다. 나는 그때마다 머릿속 '자주 묻는 질문 리스트'에서 '2번 질문에 대한 답변' 재생 버튼을 눌러 똑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나는 더욱이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걱정을 진정시키는 건 내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저 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난 피해자인 상황에서도 자신 당신을 잠정적 피해자로 여기며 나를 그저 가해자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그런 의도가 이니였다고 해도, 전화 넘어 내 귓속을 파고드는 그들의 말들은 그렇게 들렸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내가 확진 판정을 받기 전, 이런저런 뉴스를 보면서 나는 확진자가 어딜 다녀갔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회사의 구성원들은 코로나 확산이 시작되는 때부터  아침 화젯거리는 '몇 번 확진자가 어디를 다녀갔다.'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야기는 그 사람에 대한 기사에 근거한 추측과 억측들이 오고 가곤 했다. 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양성 판정을 받은 본인도 자기가 코로나에 걸렸는지 모른 상태로 돌아다녔을 것이고, 설사 돌아다녔다 한 들 내가 마스크를 잘 쓰고 개인의 위생을 챙겼다면 크게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욕할 이유는 더욱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마스크를 안 쓰고 돌아다니고, 비말을 튀기고 다녔으면 손가락질받아 마땅할 테지만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는 사람들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난 책임 있는 생활 속 방역을 했고(더욱이 내 면역력이 좋지 못한 것을 알기에), 어디서든 마스크를 최대한 끼고 다녔다. 결론적으로 난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고 병원에 입원했다. 코로나에 걸려버린 나와 통화를 하는 이들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부주의한 행동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몇 번이고 감정이 북받쳤다. '어쩌다 걸렸냐', '조심하지 그랬냐', '어디서 걸렸냐',  '마스크 안 썼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죄인인가요? 추궁하지 마세요. 나도 피해자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그들에게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나는 자신의 삶을 위협한 사람이었으니까.


애꿎은 마른침만 삼켰다.

목이 따갑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은 오를 대로 올라 눈이 빠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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