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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국년이냐?

막연한 동경, 미국

by 방구석도인

어릴 때 외국 사람 같다는 소리를 참 많이도 듣고 살았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사회불안증이 더 심할 때라서, 낯선 장소나 낯선 사람 앞에서는 거의 선택적 함묵증에 가까울 정도로 말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외국인이라 말을 안 하는 거라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타국의 건설현장에 나갔다 온 아빠를 마중하러 김포 공항을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인 청년 하나가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나는 낯설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얘 한국말 못 하나 봐"라고.


어릴 적 나는 날씬했고 또래보다 키가 컸으며 쌍꺼풀 진 큰 눈에 높은 콧대, 갈색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였다. 물론 피부도 뽀얬다. 내가 82년 생임을 감안하면 보기 드문 이국적 외모였던 것은 맞다. 게다가 말 걸고 싶을 정도로 예쁜 어린이였으니 다들 한 번쯤은 내게 다가와서 외국인 같다고들 했다. 현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서 해외 나가면 차이니즈 소리를 듣는다. 갈색 머리카락은 흰색 머리카락이 더 많아졌고, 뽀얗던 피부는 누렇고 칙칙해졌으며, 12살 겨울방학 때 살이 확 찌더니 30년 넘게 빠지질 않고 있어서 살찐 이후로 외모가 급변했다.

저 때국년 같나요?ㅋㅋ

할머니와 엄마는 내게 때국년 같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때국년'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으나, 대략 외국여자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치도 잘 안 먹고, 밥을 별로 안 좋아하고, 빵과 우유를 좋아하고 말이 속도가 빨랐던 내게 때국년이라고 했다. 때국년이라는 말을 할 때면 엄마는 항상 내 콧대를 쳤다. 그래서일까. 미국은 어릴 때부터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수잔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언젠가 수잔브링크의 아리랑을 영화로 만든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그 다큐 속의 수잔 딸이 한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아 밥을 잘 안 먹었는데, 김은 잘 먹었다. 어린 시절의 나도 밥을 잘 안 먹었지만 김이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는데 그 모습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랑 싸울 때면 "차라리 나도 미국으로 입양이나 보내지 그랬어!"라는 패드립을 날리곤 했다.(이건 내가 잘못했다.)


열두 살 무렵인가, 우연히 책 한 권을 읽었는데 초등학생인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책이었다. 그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지 나도 미국으로 이민 가고 싶다고, 이민 가자고 엄마를 조르기도 했었다. 중학생이 되자 조기 유학 열풍이 불며 우리 반이나 옆 반 아이들이 하나 둘 미국으로, 영국으로 사라졌다. 귀밑 3cm의 단발머리에 흰 양말, 흰 운동화에 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 시절, 나는 대한민국이 미치도록 싫었다. 유학 가는 친구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부모를 둔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체념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국어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미국은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오랜 세월 묻어두고 살았다. 자유롭고 싶은 마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 영어를 잘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 다 잊고 살았다. 나는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국어 교사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세월을,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내 마음은 미국을 향하고 있다. 스무 살의 나는 상상조차 못 했던 특수교사를 하게 되었고, 스무 살의 내 계획과 다르게 임용고시는 패스하지 못하고 기간제 교사로만 살고 있다.


기간제 교사로 부유하던 습성 때문일까. 일자리를 알아보다 한국학교를 알게 되었고, 한국학교를 알아보다 보니 미국과 캐나다에서 교사를 한다는 한국인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은 특수교사가 부족해서 취업 비자 스폰을 해주는 경우가 드물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취업비자받는 것이 어렵다면 J1비자를 받아 교환교수로 가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취업비자로 근무하며 영주권 받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되, 정 어려우면 J1비자로라도 나가려고 한다.


내가 꼭 한국에서만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꼭 한국남자하고만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꼭 한국에서만 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꼭 한국어만 하고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세월과 경험들이 나에게 알려준 깨달음들이다. 지금 여기의 내가 영원불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역시 사람은 가슴 뛰는 일을 해야 한다. 임용고시 준비할 때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감옥 같더니, 유튜브로 캐나다 드라마를 틀어 놓고 출근한 오늘, 이제야 내 인생을 사는 것 같다.


배우고 싶은 언어를 배우는 하루하루가 내겐 설렘이고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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