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스킨과 미도리 노트.
메모광인데, 게으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아직 쓰이지 않은 노트가 늘어간다.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이라는 몰스킨의 콘셉트처럼, 정말로 쓰이지 않은 책만 늘어날 뿐이다. 나의 몰스킨 노트 6권 모두 아직 쓰이지 않았다. 김규림의 <아무튼, 문구>라는 책이 시발점이 되어 '종이계의 샤넬'쯤에 해당되는 트래블러스노트, 미도리노트, 몰스킨 노트에 입문하게 되었다. 크기별로, 색깔별로 모두 가지고 있고 염소가죽커버도 가지고 있으나 5년째 한 권을 다 쓴 노트가 아직 없다. 내가 노트 한 권을 다 채우려면 아마 십 년쯤 걸리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노트 한 권을 다 쓴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브런치나 블로그에 풀어내지 않았다면 종이 노트에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브런치 계정 이전, 탈퇴한 계정에 썼던 글을 다운로드하여 두었던 폴더가 삭제되는 참사를 겪고 나니, 종이 노트에 적어 두지 않은 것이 많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에 접속한 것을 보면, 만년필로 노트에 적는 것은 진작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듯하다. 아날로그를 동경하고 타자가 느린 나조차 그러하다는 것은 정말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의 영향인지 요즘 기록 관련 콘텐츠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사람들이 기록을 많이 해서 그러한 콘텐츠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안 해서는 아닐까. 기록을 너무나 하고 싶으나 게으르고 피곤해서 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거나, 노트와 펜을 사랑하지만 기록은 귀찮다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거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듯이, 기록하고 싶지만 기록하기는 귀찮다는 나 같은 게으른 메모광도 세상엔 존재하는 법이니까.
아직 쓰지는 못했지만, 나는 몰스킨 노트가 좋다. 일단,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노트를 재현했다는 스토리텔링이 마음에 든다. 난 예술가는 아니만, 예술가처럼 살고 싶다. 자유롭고 아름답게. 몰스킨 노트는 펜자국이 뒷면에 남는 재질인데, 이 점이 싫어서 안 쓰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난 이 점이 좋다. 비침조차 예술적이고 아름답다. 다 쓴 몰스킨 노트 사진을 보면, 종이가 부풀어 부피가 커지던데 그 모습도 매력 있다. 그리고 비싸서 좋다. 노트의 가격이 비싸면 실용성과 가성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안 사기 마련이다. 몰스킨 노트 라지 사이즈 한 권이 4만 원이니, 이것의 3분의 1 가격만 주어도 얼마든지 질 좋은 노트를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스킨을 쓴다는 것은 문구에 진심이라는 뜻이다. 실용성보다는 감성과 아름다움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스페셜 에디션의 경우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갖고 싶지만 비싸서 망설이다 결국 사지 않은 스페셜 에디션은 나중에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 전에 고흐 에디션을 구입했다. 노트를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몰스킨 노트라고 생각한다.
트래블러스노트는 이름 탓인지 몰라도, 바라만 봐도 여행의 감성이 샘솟는다. 그래서 좋다.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이기도 하고, 커스텀마이징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지갑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작은 사이즈의 노트를 패스포트라고 부르는데, 나는 패스포트 하나를 지갑으로 사용하고 있다. 트래블러스노트의 가죽커버는 블랙, 브라운, 카멜, 올리브, 블루로 구성되어 있는데 색이 워낙 예뻐서 결국에는 모든 색을 구입하게 된다. 여행 관련 에디션도 많이 나온다. 나는 비행기 참이 달리고 비행기가 은박으로 찍혀있는 에디션을 하나 갖고 있다. "트래블러스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라는 콘셉트처럼, 트래블러스 노트를 보고 있으면, 삶이 여행인 듯 충만해진다. 일상이 추억인 듯 소중해진다. 무엇이든 적고 싶어 진다.
미도리노트는 만년필 사용자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노트이다. 만년필의 잉크를 잘 받아주는 질 좋은 노트. 김규림도 문구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 미도리노트를 꼽겠다고 책에서 말했다. 미도리노트는 내가 그나마 많이 사용한 노트이기도 하다. 일기장으로도 쓰고, 독서 노트, 모닝페이지, 단순 메모장, 영감 노트 등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사이즈가 다양하나, 라지 사이즈가 가장 널리 쓰인다. 표지가 새하얀 이 노트는 깔끔하면서도 고전적인 일본의 정서를 잘 담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노트다.
게으른 메모광은 메모를 하기 위한 노트와 만년필, 펜이 참 많다. 그러나 노트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쓰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마치 나의 인생 같다. 이것저것 재료는 많이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결정적인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노트는 쓰일 것이다. 나의 인생도 쓰일 것이다. 나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진정한 나의 인생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빈 노트 같은 삶이지만, 비어있는 노트이기에 쓰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