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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참 덧없고 구차해요.

정신과 상담 일곱 번째 기록(2025.4.24. 목.)

by 방구석도인

벌써 일곱 번째 정신과 상담이라니요! 새삼 감회가 새롭군요. 43살의 11월 , 단풍이 한창 예쁘던 가을날에 "내가 고자라니~~!"가 아닌 "내가 조울증이라니~~!"를 외치던 게 어제일 같은데 말이죠. 계절도 두 번이나 바뀌었군요.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도 많은데, 약 잘 챙겨 먹고 병원도 잘 다니고 있는 제가 너무 기특합니다. 요샌 오히려 병원 가는 날이 설레고 기다려지기까지 한다니깐요. 이번엔 약이 어떻게 바뀔지, 바뀐 약물이 제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지가 너무 기대되는 거 있죠! 약물에 의해 달라지는 저와 저의 인생을 지켜보는 재미가 팝콘각입니다.


최근에는 우울감이 들었어요. 이제 현실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조증 상태일 때는 조증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조증삽화가 지나가고 우울삽화가 시작되자 그때가 조증이었구나 싶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던 저였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좋아서 시작한 영어공부도 부담으로 다가오고, 살 때문에 시작한 걷기 운동도 짜증이 치밉니다. (물론 며칠 안 했습니다.) 최근에 짜증도 늘었어요. 표현을 잘 안 하는 저의 성향상 분노나 짜증을 잘 표출하진 않았지만, 단전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제 앞에 느리게 가는 자동차, 말귀 못 알아듣는 답답한 학생들, 갑자기 의료보험료 53만 원을 입금하라는 행정실, 최근에 펌을 했는데 맘에 안 들어서 다시 시술받은 일 등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어쩔 수 없으려니 했을 텐데 어찌나 속이 부글부글 끓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살이 안 빠졌습니다. 아빌리파이를 젤독스로 바꾸면서 위고비도 필요 없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단 1킬로그램도 안 빠졌고요, 오히려 0.1그램이 더 늘었습니다. 아, 지금도 이 글을 쓰며 짜증이 확 나요. 오타가 자꾸 나오는 것도 짜증 나고요.


하고 싶은 게 많았죠. 일본어 공부도 하고 싶었고, 중국어 공부도 하고 싶었고, 영어 공부도 당연히 하고 싶었습니다. 운동도 하고 싶었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는 잘 될 것 같았고, 미국에서 멋진 애인이 생길 것 같았고, 몇 달만 공부하면 원어민과 어느 정도 소통이 될 줄만 알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현재를 즐기며 사는 제가 좋았습니다. 책과 차를 사랑하고, 대학원을 두 개나 다니며 계속 공부하는 자신이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살은 쪘지만 키 크고 눈이 예쁜 제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냥 집안 소파에 앉아만 있어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주말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모닝커피 마시는 시간은 천국과도 같았습니다.


또 깜빡 속아 넘어갔습니다. 이 모든 게 전형적인 조증 증상이었는데 말이죠. 과도한 자신감, 고양된 느낌, 비현실적이고 판단력이 떨어진 모습, 충동적 소비. 그다지 고가는 아니었지만, 금반지와 금목걸이도 샀어요. 액세서리를 잘 안 하고 다니는데 , 그 당시에는 안사면 안될 것 같고 꼭 사야 할 것 같은 절박감이 있었습니다.


우울 삽화가 시작된 지금은요, 조증 때는 보지 못했던 현실이 보입니다. 쉽지 않은 영어 공부, 계약직인 저의 직업, 나이는 많고, 모아둔 돈은 없고 집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뭐가 자꾸 없습니다. 가슴도 없고요. 고양이도 없네요. 그러다 보니 우울감과 불안감이 생깁니다. 의사 선생님한테 이렇게 말했더니 이게 정상적인 상태라고 하십니다. 네? 이렇게 우울한 게 정상이라고요? 이렇게 살면 불안과 걱정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낙타는 도망갈 때 머리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현실을 직면하고 해결을 해야지요. 자신감은 좋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안 되지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조증 때의 저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현재를 즐기는, 지성적이며 예술적인 나"인데, 울증 때의 저는 "늙고 돈 없고 뚱뚱하고 외롭고 앞날이 걱정되는 나"입니다. 어떤 나가 진짜 나일까요? 저는 대체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 걸까요? 제가 좋아하는 영성인 에크하르크 톨레는 '나 자신이 둘일 수 없다'면서,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지요. 저는 지켜보는 나와 조증인 나와 울증인 나, 이렇게 세 명의 나와 함께 사는 셈인데 깨달음은 전혀 오지 않는군요. 역시 '될 놈 될, 안될 안'입니다.


상담자들이 제일 우려하는 상황은 자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항우울제인 렉사프로 5mg이 다시 처방되었습니다. 제가 의사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거든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들이 참 덧없고 구차하게 느껴진다고요. 우린 모두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고 있지요. 이른 아침 알람을 끄며 "씨발"을 외치며 일어나, 샤워하고 양치하고 밥을 먹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얼굴과 몸에 로션을 바르는 모든 행위들. 퇴근 후 옷을 벗고 또다시 양치와 샤워를 하는 이 모든 행위들이 저는 참으로 버겁고 귀찮습니다. 결국에 우리 모두는 죽을 텐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루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이럴 땐 그냥 일찍 약 먹고 자는 게 상책입니다. 영어공부 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일찍 자야겠습니다. '잠으로 향하는 도피'는 '술로 향하는 도피'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잠은 어차피 자야 하는 거니까요. 그럼 전 이만 잠으로 도망갑니다. 꿀잠과 항우울제가 저를 치료해 줄 것입니다. 젤독스를 처방받고 살은 안 빠졌지만 중간에 깨지 않고 꿀잠 자는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이번 달 제가 먹을 약은 리단정 300mg, 젤독스 20mg, 렉사프로 5mg입니다. 리단정과 젤독스는 기분조절제이며, 렉사프로는 항우울제입니다. 이 녀석들이 저의 기분과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조절해 놓을지 잘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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