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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by 방구석도인

제게는 영어가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남은 생애는 미국이나 뉴질랜드에서 보내고 싶었거든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저는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국 생활에 지쳐있었습니다. 공부만이 정당화되던 십 대 시절을 지나, 좋은 직장을 얻고 상향혼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대한민국에 저는 적잖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계약직이자 노처녀인 저는 대한민국에서 루저인지도 모릅니다. 휴식은 터부시되고 무조건 열심히만 강요하는 직장 문화도 숨이 막혔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교사자격증은 해외에서 변환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영어가 안 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지요.


2025.6.22. 일.

45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원어민에게 일대일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어가 너무나 유창했고, 저는 영어가 너무나 미숙하여 우리는 만나면 늘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이었지만 제 성격상 말은 못 하고 끙끙 앓고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다가는 안 되겠다 싶던 차에 '탄뎀'이라는 언어교환 어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료 결제를 하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검색을 할 수 있는데, 저와 14km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에게 제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인근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었고 영어가 유창하다고 했습니다. 카톡으로 옮겨와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를 서로에게 가르쳐 주기로 하고 레벨 테스트를 위해 다음날 전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2025.6.23. 월.

낮에 잠깐 통화를 하였는데 제가 리스닝 실력이 부족하여 그의 영어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날, 대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한 후 통화는 짧게 마무리하였습니다.


2025.6.24. 화.

그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들러 미니원피스로 갈아입고 평소엔 하지 않는 화장을 했습니다. 그는 31살, 저는 44살. 혹시 그가 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저와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날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추운 날이었습니다. 그를 제 차에 태워 인근 호숫가의 카페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저는 왜 해외를 나가고 싶고,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를 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상대가 이해를 못 할 때는 번역기를 돌려 보여 주었습니다. 카페에서 일어나기 전 그가 내게 보여준 번역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서른 살인줄 알았어요. 너무 아릅답습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대학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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