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예지몽.
저번에 엄마 집을 다녀 왔는데, 엄마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며 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꿈에 내가 키 작고 까만 외국 남자와 함께 있더랍니다. 제가 손가락으로 남자 입을 걸고 있더래요. 마치 낚싯바늘이 물고이 입을 꿰는 것처럼 말이죠. 이 남자는 누구냐고 물어보니 결혼할 건 아니고 그냥 연애만 하는 거라고 말하더랍니다.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스물 몇 살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 엄마는 예전부터 예지몽을 잘 꾸었습니다. 그래서 특이한 꿈을 꾸면 항상 말해주곤 했는데, 이번 꿈은 상징 적인 꿈이 아니라 아예 현실과 똑같은 꿈을 꾼 것이라 많이 놀랐습니다. 제 남자친구는 키가 작고 검은 피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이차이가 13살이지요. 혹시 제가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엄마가 어디서 보았나 싶은 마음에 저는 멘붕이 왔습니다. 친구들한테 남자친구 얘기는 했지만 부모님한테 말할 용기는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부모님한테 제가 만나는 이성친구에 대해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제가모태솔로인줄 알고 계실 거에요. 엄마의 쓸데없는 걱정과 오지랖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늘 비밀로 했습니다. 그런게 엄마가 꿈 얘기를 한 이상 밝히지 않을 수 없어 밝혔습니다. 진짜로 연하의 외국인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자 엄마도 소름 돋는다며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리고 엄마의 쓸데없는 걱정과 오지랖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헤어지면 나만 상처를 받는다는 둥, 방글라데시 남자는 거짓말을 잘한다는 둥, 결혼하면 어디에 살거냐는 둥 저만치 앞서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는데 너무 어리고 외국인이라 별로 맘에 안든다고 하셨다네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우리가 어쩌겠느냐며 인정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네요. 엄마의 예지몽 덕분에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친구랑 여행간다, 친구 만난다 등 거짓말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찜찜했거든요.
얼마전 가족모임이 있었는데 엄마가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에게 물어보니 그는 긴장된다며 나중에 부모님만 따로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부모님 집에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돼지고기는 안먹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니 닭볶음탕을 만들어달라고 엄마한테 부탁했어요. 이제 며칠 안남았네요. 제가 부모님께 처음으로 보여드리는, 제가 사랑하는 남자.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남자. 언제나 "No, problem."을 외치며 긍정적으로 사는 이 남자.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하지 않는 현명한 남자. 자신의 일과 공부를 사랑하는 남자.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 부모님께 자랑하고 싶은 이 남자.
이번 명절은 이 남자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