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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인 Nov 08. 2015

[#001] 여행, 문화, 리포트. 그리고 홍콩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리포트 작성하기.






대학 시절 작성한 자유여행 레포트 표지

                                                                                                                                                                                                                                                                                                                   

   22살. 1년 휴학 후 복학하던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수업 ‘문화 관광론’. 이 어마어마한 과제가 나오기 전까지의 내 수업태도는 엄마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에 있던 교양수업인 터라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어, 녹음기를 켜놓고 잠들기 일쑤였다. (나름 학점은 중요했던 터라 꼼수를 썼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우리에게 교수님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과제를 내놓으셨다.  


80만 원 줄게. 해외여행 다녀와.



  나는 학창 시절을 통틀어 해외여행을 계획해본 적도 아니, 가봐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권 발급하는 것 또한 어디서 신청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해외에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비행기, 숙소, 식비까지 전부 다하여 3박 4일을 저 80만 원에 가능하다는 것마저 처음 알게 되었다. 해외여행이면 당연히 몇백만 원씩 들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왔던 터라 나는 꿈도 꿀 수 없다며, 한국말로 소통이 잘 되는 국내여행에 만족하며 살아왔었다.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 멍해진 우리에게 덤으로(?) 과제에 후추를 뿌려 맛을 더해주셨다. 주제가 있는 해외여행일 것. 차라리 실습과제를 주시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겠는데요 교수님….
   나와 같은 조를 이룬 친구 역시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고 여권마저 손에 쥐어본 적 없었다. 아, 비상이다. 실습 위주인 미용예술학과에 이런 과제는 난생처음이렸다.
  여행 초짜들에게 놓인 키워드.
  


싱가포르, 80만 원, 문화체험, PPT, 성공적.


                                                                                           



   발 빠르게 이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머릿속에는 저 키워드가 떠나지 않은 채 이번 학기 성적표에 생각도 하기 싫은 알파벳이 떠있을 것만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 조원과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 커뮤니티'카페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페이스북 그룹 및 페이지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정보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었고 고민할 여지없이 한 걸음에 도서관으로 달려가 싱가포르에 관한 책이라면 전부 다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앉아 찾은 우리의 여행 주제이자 풀어야 할 숙제를 다민족 문화 체험’으로 정했다.
   덧붙여 교수님께서 쉬운 길 놔두고 먼 길 돌아서 헤매는 어린양들을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주셨다.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머리가 더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1.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일 것.
2. 한정된 80만 원에 비행기 표, 3박 4일 동안의 호텔비(게스트하우스 안됨) 모든 비용을 포함할 것. (신용카드 사용 불가.)
3. 어떤 음식을 어느 식당에서 먹었고 그 음식의 가격이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
4. 이용한 교통수단을 표기하고 교통비와 이동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여 하루를 소요하여야 할 것.
5. 부질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아니할 것.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기 등.)
6. 여행의 주제 및 목표가 명확해야 할 것.  



                                   

당시 여행을 떠날 날짜와 시간대에 맞는 비행기표를 예매하였다.

               

                                                               

  비행기 표가 먼저였다. 정해진 기간 안에 다녀와야 했고, 여비는 넉넉하지 않아 가장 크게 작용할 비행 깃 값에서 아껴야 숙박비와 식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비행기 표를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를 이용하여 비교해 보았을 때, 두 명이서 왕복 70만 원 다녀올 수 있는 표가 있었다. (인당 80만 원이었고 둘이 합쳐 160만 원의 여비가 있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여비의 절반을 소비하는 셈이었지만 당시 성수기를 피했던 시기였으며 저가항공을 이용하여 그나마 이 가격에 예매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저렴한 티켓을 구할 수 있었지만, 여행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했던 우리는 이것마저도 저렴한 티켓이라며 매우 뿌듯해하던 그때가 선명하다기보단 민망하다(?). 정말 비행기 표를 예매한 것이 아니라, 단지 했다 치는 셈이었던 것이어서 민망한 걸까.  




대중교통 이용이 수월한 호텔 중에서도 저렴한 방을 예약하였다.

                                                                                                    

                                                       

   싱가포르 강에 위치한 '프래그런스 호텔'로 선정하였다. 숙박을 선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후기에 난무하는 불평불만들은 애당초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누가 봐도 호텔이며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곳에 가장 저렴한 방이면 됐다. 번화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철역이 바로 앞에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수월했다. 숙박 예약까지 하여서 남은 금액은 1인당 16만 원.
  4일 동안의 식비와 교통비로 사용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할 여비였고 싱가포르 물가를 고려하여서 우리는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식사로 매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정말 싱가포르에 가는 것이 아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 실제로 싱가포르에 다녀온 블로거들의 사진을 보며 작성하였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의 2배 이상의 비쌌고,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 로컬 음식점보다 서양식 레스토랑이 더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지출을 줄이기 위한 꼼수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였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법한 거리를 걸었다고 했으며, 레스토랑에 들어가 가장 저렴한 메뉴 두 개만 시키고 음료 따위 감히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속 안에서 충분한 명목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봐도 내 분노는 합법적이었을 터. 리포트 점수에서 만점을 받거나 교양과목 A+을 받으면 정말 싱가포르에 보내주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토록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있는 걸까. 포스팅을 하다 보니 또 화가 난다.  




본격적으로 여행의 목표였던 문화 체험을 하였다.



   입으로 싱가포르를 즐겼다면 우리의 본 목표였던 싱가포르 문화 체험을 위해 눈요기를 해야 할 일정도 넣어야 했다. 싱가포르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인 딤섬과 불교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박물관과 사원을 방문하며 문화체험 싱가포르 여행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마치 방금 막 싱가포르에서 귀국한 것 마냥 발표를 마쳤고, 이 발표로 하여금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억울함이란 감정에 원성을 높여 불만을 표시하였다. 교수님은 그저 웃기만 하셨고, 이 억울함을 어디서 해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 되었다.
   나와 친구는 여권도 없다. 공항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한적 없다. 할 줄 아는 언어라고는 한국어밖에 없으며 외국인과 말을 섞어본 것은 고등학교 시절 원어민과의 어색한 인사말이 전부였다.
   가보지도 못한 나라의 지리를 꿰뚫다 못해 눈을 감고도 걸어갈 수 있을 지경에 지름길까지 알고 있으니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억울하다. 가야 한다. 가야겠다. 가야만 했다.  

 

이렇게 꼭 해외로 떠나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우리의 마음과 열정만큼은 한국을 박차고 떠나 세계여행 중이었고, 몸만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의 첫사랑이 싱가포르냐고 묻는다면 ‘홍콩’이다. 과제를 정해준 나라가 싱가포르였을 뿐, 정작 우리는 싱가포르와 비슷하면서 다른 매력의 화려한 홍콩을 가고 싶어 했고 다른 조의 발표를 경청하며 친구와 나는 암묵적 동의하에 홍콩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싱가포르 계획을 세웠을 때와는 달리, 여유를 가지고 홍콩의 매력을 읽고 마음껏 상상하며 앞으로 내 눈앞에 펼쳐질 매혹적인 홍콩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홍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생애 처음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표 티케팅을 하였다.



   여권을 발급받자마자 비행기 표 티켓팅을 하였다. 문화 관광론 수업이 종항하고 나는 그 해 크리스마스의 한 주를 홍콩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교양수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태껏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촌년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때 당시에는 굉장한 앙금을 품고 있었지만….)
   집순이가 여행 중독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했던 과제. 앞으로 풀어보고 싶은 나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으므로 내 과제는 끝나지 않은 걸로 하겠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과 눈으로 담고 싶은 풍경들이 너무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의 첫사랑, 홍콩.  



여행의 시작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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