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박물관으로...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집을 짓고 산 지는 오래전부터다. 집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소재도 다양하고, 방식도 다양해서 뭐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요즘 집은 부의 상징이자, 기준이 되어버려 안타깝다. 건축의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재료들도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높이도 점점 갱신되고 있다. 건물의 높이는 기술의 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수십 년 전부터 건설기술을 수출해 건축, 토목 기술은 선진국급이다. 현지 시공 사례가 증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노력한 많은 건축가가 있다. 그중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을 만나봤다.
뜻하지 않게 타인 권유로 시작된 건축
김중업은 1922년 3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학창 시절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 보들레르 등의 난해한 시를 읽고,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예술 운동인 ‘포비즘’의 그림을 그리며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그는 예술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대신 동경 미술학교 출신 일본인 미술 교사의 권유로 건축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김중업은 “미술과 시와 가장 가까운 것은 건축이었기 때문”이라며 건축을 시작한 계기를 말했다.
1939년 3월 일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 국립대학교) 건축학과로 진학했다. 그의 담당 교수는 프랑스에서 영향력 있는 미술학교 중 한 곳인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다. 나카무라 교수는 에콜 데 보자르의 전통에 따라 “건축가는 예술가”라고 가르쳤다. 이 무렵 김중업은 드로잉 실력,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를 향상하고 건축을 예술로 보는 그만의 ‘건축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가 프랑스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나카무라 교수의 지도 아래 1941년 12월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미국 코넬대학교 출신의 두 건축가가 운영하는 대형 설계 사무소 ‘마츠다-히라타 건축사무소’에 취직했다. 그는 건축 실무를 익히며 근대건축을 접했다. 근무하는 동안 만주 미쓰이 백화점, 요코하마 가네보 백화점, 도쿄 미쓰이 선원 시설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선‘이 살아있는 건축과 ’선‘이 살아있는 비운의 건축가
1952년 10월 25일부터 1955년 12월 25일까지 프랑스 건축계 거장 ’르 코르뷔지‘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르 코르뷔지가 설계하던 ’인도 찬디가르 주정부 청사‘의 설계에 참여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 후 르 코르뷔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6년 2월 파리에서 귀국했다. 귀국 후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어 본격적으로 그만의 건축 활동을 하였다. 김중업 건축의 조형적 특징은 ’선(線)‘이다. 그는 선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전통예술의 멋을 선에서 찾아 건축에 적용했다. 국내의 많은 작품에서 선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날카로운 선이 있다. 그는 국내의 건축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건축가이자 지식인이던 김중업은 건축에 있어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삼일고가도로와 더불어 70년대 한국 근대화 상징을 보여준 ’삼일빌딩‘이 그의 손을 거쳐 완공되었다. 당시 삼일빌딩은 31층으로 국내 최고층 빌딩이다. 하지만 그해 4월에는 준공 4개월 만에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던 ’와우아파트‘가 붕괴하였다. 33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33명의 죽음은 그가 이야기했던 ’살고 싶어져야 하잖은가, 꿈이 있고 詩가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정다웁게, 모여살고 싶어져야 하잖은가‘와 배치된다.
김중업은 라디오방송인 ’동아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때에도 동아방송에 기고문을 기재해 양택식 시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 도시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정부의 비판에 앞장선 대가는 컸다. 1971년 11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강제추방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건축가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다시 김중업은 프랑스에 정착하여 르 코리뷔지 재단이사로 지냈다. 1975년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며 타국살이를 이어갔다. 그 사이 국내의 15년간 경력은 사라졌다. 권력에 발맞춰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한 당대 라이벌 건축가였던 ’김수근‘과는 반대 행보가 눈에 띈다. 김중업은 건축가였지만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지식인다운 행보 또한 인상 깊다.
다시 두드린 고국의 문 그리고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김중업은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한국 정부와 편지 교환으로 겨우 여권을 발급받게 됐다. 어렵게 받은 여권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주권을 취득하고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1970년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학교에서 교수직을 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으로서는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79년 영구귀국 후 ’육군박물관‘등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발한 국내 활동을 이어갔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차기 올림픽 국가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된다. 정부는 서울올림픽 상징조형물 현상설계를 공모했다. 김중업은 ’서울올림픽 상징조형물 현상설계‘에 참여했다. 여기서도 김중업만의 ’선‘이 강조되었다.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에는 ’이상을 향하여 비상하고픈 인간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부여하였고, 그가 중점을 두었던 한국의 지붕 선에 착안하여 형태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은 그의 유작이 됐다. 한참 프로젝트 중 1984년 김중업의 건강이 악화가 되었다. 해외 생활이 길었던 탓일까? 한 정부를 상대로 내뱉은 쓴소리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스트레스가 된 탓일까? 김중업건축의 선은 길었으나, 삶의 길이는 길지 않았다. 그는 1988년 5월 11일 서울성모병원에서 향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중업이 남긴 건축 유산은 너무 크다. 일제식민지, 6.25 전쟁 동안 우리나라는 많이 낙후되었다. 해외파 김중업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부터 차근차근 조국 근대화를 실현해 나갔다. 건축학도들의 무거운 숙제를 일부 풀어준 셈이다.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은 당시 김중업건축연구소 실장으로 근무하던 ’곽재환‘이 맡아 완성하였다.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은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한 유작이 되었다. 이처럼 1세대 건축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한 집에서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 안양예술공원 여행 정보 ❘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4 / 031-687-0909
매주 월요일 휴무 / 9:30 ~ 17:30 / 주차장 있음 /
1호선 관악역 1.3km / 도보 2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