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내가 굳이 지난 일들을 추억하는 것은 어쩌면 내 삶에서 남길 것과 버릴 것들을 구분하여 분리수거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젊은 베르테르의 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내버려 두고 좀 더 보람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운명이 나에게 주는 하찮은 불행을 되씹는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를 추억하는 것은 무슨 간절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내 인생의 한 부분에 들어왔고 그 작은 돌다리 하나를 온전히 건너야만 다음 돌다리로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움켜 쥔 내 작은 손에서 시간은 모래알처럼 우수수 빠져나가 버렸고, 결핍이 많아서 더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삶의 순간을 시간에 따라 미분하고 접선의 기울기가 증가와 감소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커다란 적분 된 삶으로 살아지는 것 같이 아팠고 더러는 버리고 싶었던 순간, 순간을 묵묵히 버티고 타협한 뒤에야 비로소 비 오는 거리에 닿을 수 있었다.
제1 장, 따듯한 겨울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노인 티가 많이 났다.
귀가 어두워진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늘 고향을 미워했다.
아버지는 양평에 묻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저 어느 나무아래에 뿌리라고 하셨다.
이런 아버지를 모시고 한 번이라도 더 시간을 내어 양평을 다녀와야겠다는 아들로서의 의무감은 내게 마지막 효도 같은 것이었다.
친척 잔치에 아버지와 단 둘이 양평 가는 길.
돌아오는 길에 남한강변 매운탕 집에 들러 좋아하시는 민물 매운탕을 사드릴 생각을 하며 조금씩 차가 밀려드는 고속도로위를 달려갔다.
어머니는 강원도 홍천, 가난한 농부의 장녀였다.
할아버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탓에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 열여섯 이른 나이에 산 넘어 양평으로 시집(자기보다 여덟 살 많은 남자에게)을 갔다.
큰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아버지 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어릴 때는 머슴 서넛에 개인 글 선생까지 집에 두고 살만큼 넉넉한 집이었지만 6.25 전쟁 중에 할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끌려가 소식이 없고, 피난서 돌아오니 기르던 대여섯 마리 소는 모두 사라지고 집도 불에 타버렸다.
아버지는 졸지에 어린 가장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해서 중학교 갈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다.
땅 파서는 장래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작은 땅 판돈을 허리춤에 차고 갓 결혼한 어머니와 함께 근거하나 없던 서울로 왔다.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첫 딸을 낳았다.
첫 딸이 젖을 잘 빨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아버지가 장독대 위에 새벽 정화수를 떠 열사흘을 삼신할미에게 빌었더니 살았다고 했다.
그 뒤로 둘째 아들, 막내딸을 더 나았다.
성격이 괄괄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자식이 가난한 집 아이 티가 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특히 아들을 신경 썼는데 옷과 신발은 늘 집안 형편보다 조금은 더 좋은 것을 입히고 신겼다.
아들의 얼굴이며 손을 무척 깨끗하게 관리해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좀 더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구파발의 개천가 중간쯤에 세 들어 살았다.
서울 변두리, 논과 밭이 많아 여름이면 개구리를 잡고, 가을이면 잠자리를 쫒았다.
짙은 초록색 철 대문을 열면 왼쪽으로 어른 키보다 조금 작은 회색 나무문이 우리 집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고 창호지의 미닫이문을 열면 방 한 칸이 전부였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철이 엄마”라고 불렀다.
마당 안쪽으로 연이어 조금 큰 주인집이었다.
대문 앞부터 주인집 앞까지 흰색 육각형 보도블록이 깔려있었고 마당 끝 창고 옆에는 키 작은 단풍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마당이 아주 작지는 않았지만 뛰어놀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소란을 피워 주인집에 방해를 줄까 봐 어머니는 마당에서 놀지 말고 동네 공터에 나가 놀라고 했다.
마당에서 바라본 주인집은 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네 개의 여닫이 나무문이었고 유리는 언제나 투명하고 말끔했다.
유리 너머 거실 바닥에는 나무 마루가 깔려있었고 진갈색 장식장과 오래된 피아노가 보였다.
그러나 피아노 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연탄이 주된 연료였다.
겨울이 가까워 오면 주인집은 겨우내 땔 연탄을 오백 장, 천장씩 한꺼번에 마당 한편 작은 광에 들여놓고 겨울 채비를 했다.
배달 아저씨들이 한나절씩 광에 연탄을 채울 때 면 어머니는 넋두리를 했다.
“우리는 언제 연탄 쌓아두고 살아보나...”
우리는 열 장 혹은 스무 장을 부엌에 들여놓고 겨울을 났다.
몇 장 안 되는 연탄이 떨어지면, 어머니는 동네 슈퍼마켓(구멍가게)에 가서 한 장 혹은 두 장을 새끼에 꾀어 들고 왔다.
그마저도 외상으로 가져와서 다음 외상 때는 연탄 값을 치러야 한다고 걱정을 했다.
착하고 부지런하다고 평판이 좋아 외상도 어렵지 않게 들고 올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밤, 연탄 한 장으로 온기를 가둘 수는 없었다.
작은 둥지의 새들처럼 안고 비벼도 겨울은 추웠다.
저녁에 머리맡에 놓아둔 주전자 물이 아침이면 꽁꽁 얼었다.
삼 남매에게 두꺼운 양말을 신기고 두꺼운 털옷에 목도리까지 해주고 나서야 잠들곤 했다.
주인집 가족은 다섯이었다.
할머니와 중년의 부부와 두 명의 딸들.
딸이 셋인데 첫째 딸은 결혼하고 미국 가서 산다고 했다.
나이 이십 대 중반의 둘째 딸 중열, 고등학생 셋째 딸 선열이 함께였다.
가끔 마당에서 주인집 누나들과 마주치면 나를 반가워하곤 했다.
어머니보다 대여섯 살 아래였던 중열은 어머니와 무척 각별했다.
중열은 우리 집 안방에 놀러 와 이불에 발을 묻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머니도 역시 주인집으로 찾아가 말동무를 해주곤 했다.
가끔 어머니를 따라 주인집에 들어가려 하면 어머니는 늘 손사래를 치며 집에 가서 놀라고 했다.
어느 날, 잠결에 이야기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돈이 많으면 뭐 해, 백약이 무효인걸...”
중열이 누나는 몸이 약했다.
공부도 꽤 잘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도 조금 다녔지만 갑작스러운 간질병 증세로 여러 번 쓰러져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몸조리를 한다고 했다.
어느 순간 온 집안이 소란한 날은 중열이 누나가 쓰러져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한 날이었다.
내가 호기심에 가까이 가려하면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라고 역정을 했다.
어머니는 마치 중열이 누나의 보호자인양 늘 신경을 썼고 간질증상이 일어나면 어떻게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똑바로 눕히고, 기도가 막히지 않게 고개를 돌려 입속 이물질을 걷어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중열이 누나가 발작을 일으켜 몇 번 응급조치를 해주곤 했다.
주위에는 쉬쉬 했다.
나이가 꽉 찬 처녀가 간질병 걸렸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어머니는 전전긍긍했다.
중열이 누나는 늘 집에만 있었다.
가끔 마당에 나와 서성이곤 했다.
한 여름에도 원피스 같은 긴 옷을 입고 다녔다.
마른 체구에 핏기 없는 하얀 얼굴,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표정은 늘 잔잔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도 늘 작은 미소와 나직한 말투를 쓰곤 했다.
나름 예쁘장한 얼굴인데 꾸미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안타까워하곤 했다.
“중열아, 아무리 집에만 있어도 화장도 하고 그래.”
어머니의 말에 중열이 누나는 그저 피식 웃어버리곤 했다.
한 번은 늘 집에만 있는 중열이 누나가 안쓰러웠던지 바람을 쐐준다며 어머니가 동네 미용실에 함께 데리고 갔다.
파마를 한 머리로 중열이 누나가 돌아왔다.
어린 내 눈에도 어울리지 않았고 얼마 후 다시 원래의 머리로 돌아갔다.
아마도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파마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셋째 선열이 누나는 매우 밝았다.
키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잘 먹은 부잣집 딸처럼 생겼고 몸매도 통통한 편이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아주 가끔 마당에서 뵙곤 했고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역시 자주는 아니고 가끔 마당에서 만났다.
누가 봐도 인품 좋고, 너그러움이 배어 나오는, 부자 느낌도 조금 나는 그런 분들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집에 사람이 없을 때 중열이 누나를 지켜봐 달라고 어머니 두 손을 모아 쥐고 부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열이 누나가 어머니를 부르러 왔다.
“언니, 엄마가 언니 좀 잠깐 건너 오래.”
어머니와 아버지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중열이 누나가 또 쓰러진 모양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하얀 거즈 손수건 몇 장을 들고는 황급하게 뛰어 나갔다.
꽤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는 커다란 종이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야.”
“미국 사는 큰 딸이 명절 선물을 보냈다고 맛보라며 좀 덜어 주더라고요.”
온 가족이 상자 주위로 모여 무슨 보물 상자처럼 박스를 열었다.
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초콜릿, 영어만 잔뜩 쓰여 있는 크고 작은 과자봉지들, 처음 보는 치즈, 소시지라고 하는데 모양도 이상하고 맛도 약간 느끼한 햄 깡통, 분홍색에 메추리 알처럼 동글, 동글한 것들이 굴비 엮듯 대여섯 개씩 실 같은 것에 줄줄이 엮여있는 이상한 소시지 등등...
부자가 된 것 같은 뿌듯함과 낯선 물건들에 대한 신기함, 미국 물건이라는 경외감에 우리 가족은 흥분했다.
“함부로 손대지 말고 주는 것만 먹어.”
상자를 장롱 위에 올리며 어머니의 눈빛은 단호했다.
일주일도 더 되는 시간 동안 새로운 무엇을 꺼내 먹을 때마다 야릇한 흥분과 이질감에 히죽거리곤 했다.
“햐~ 이건 정말 맛있네.”
“이건 우리나라 거보다 별로네.”
이런 식의 품평회가 열렸다.
몇 년이 지난 후 아이들이 커가자 이사를 했다.
이른 아침, 아버지는 어디선가 리어카 한 대를 끌어왔다.
제일 먼저 찬장과 장롱을 리어카 가운데 실었다.
양 옆으로는 이불 보따리로 꾹꾹 채워 눌러 넘어지지 않게 하고, 각종 냄비와 그릇을 그 위에 적당히 뒤집어 쌓고 30분 정도 거리의 윗마을로 이사를 떠났다.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끌고 어머니는 밀고 누나와 나는 걷고 동생은 어머니 등에 업혔다.
이사 가는 날 아침, 주인집 식구들이 배웅했다.
아버지는 벌써 출발하려고 리어카를 동네 어귀까지 끌어다 놓았는데 어머니는 아직 이었다.
중열이 누나와 마당에서 울었다.
누구 하나 떼어놓지 못했다.
“언니, 자주 올 거지?”
“그럼, 중열이 보러 자주 와야지...”
리어카가 골목 어귀를 지나 사라질 때까지 중열이 누나는 대문밖에 서서 울었다.
어미 잃은 어린 강아지처럼.
멀리서도 중열이 누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사를 간 후로도 어머니는 가끔 중열이 누나를 보러 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 엄마, 이제 중열이 누나 보러 안 가?”
가끔 물어보면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중열이 누나가 결국 병으로 죽었다거나, 주인집이 집을 팔고 멀리 이사를 갔다는 소문만 들었던 것 같다.
제2 장, 마린보이의 가출
중열이 누나네 살던 그 무렵,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 준하를 알게 되었다.
준하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은 우윳빛으로 통통했다.
옷이며 신발은 꽤 고급스러운 것을 입고 신었다.
학교가 끝난 어느 날이었다.
“천아, 내가 떡볶이 사줄까?”
“너 돈 있어?”
“응, 돈 있다.”
준하는 바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매일 500원씩 준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큰돈이었다.
학교 앞 분식집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가 무심하게 쳐다본다.
“떡볶이 줄까?”
준하가 익숙한 듯이 주문을 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그리고 어묵도 두 개씩 주세요.”
아주머니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봤다.
“이걸 너희 둘이 다 먹을 수 있어?”
준하는 태연하게 말했다.
“얼마예요?”
“삼백 오십 원...”
좁은 분식점 식탁 위에 가득 펼쳐진 성찬을 먹고 또 먹어도 좀체 줄지 않았다.
음식들을 태반 남기고 분식점을 나왔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분식점에 갔다.
학교가 끝난 어느 날 준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철아, 오늘 우리 집에서 놀래?”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몇 번은 응하지 않았다.
나 역시 친구를 한 번도 집에 부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는 딱히 놀만한 공간도, 보여줄 만한 무엇이나 장난감도 없었기에 누군가를 집으로 부른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어머니도 남의 집에 놀러 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어린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주의를 주곤 했다.
혹여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라도 하면 “네가 거지새끼냐”라고 나무랐다.
준하의 요구를 몇 차례 거절했지만 차마 더는 거절 할 수 없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빈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드디어 친구가 사는 윗동네에 있는 준하네 집으로 갔다.
준하네 집은 대문 입구에 커다란 전봇대가 서있고 청록색 철문 사이, 사이로 집 마당이 들여다보였다.
마당에 잔디들이 깔려있었고 깔끔한 단층 양옥이었다.
마당에는 작은 향나무들과 이름 모를 화초들이 담장 주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커다란 베란다 창문으로 마당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대리석 돌계단 세 칸을 올라가서 현관문이었다.
현관문 아래는 은색 알루미늄으로 되어있고 위쪽은 반투명 느낌의 유리가 들어있어서 누군가 안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거실에서는 목재에서 나는 그윽한 나무 냄새가 났다.
마룻바닥은 반짝거리고 윤기가 나서 미끄러웠다.
세 개의 방, 거실과 소파, 크고 멋진 네 개의 다리로 서있는 텔레비전.
준하는 외아들이었다.
준하의 어머니는 고상하고 자상했으며 나를 무척 반겨주셨다.
준하에게는 자기 방이 있었다.
커다란 갈색 마무 책꽂이, 창문에 걸린 하늘빛 커튼, 책상과 옷장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놀랍고 신기했다.
“자기 방이 있다니...”
저녁 무렵이 되자 텔레비전에서는 만화영화가 나왔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만화책에서나 보던, 혹은 남의 집에서 어쩌다 어깨너머로 보던 만화영화를 친구와 단 둘이 정면에 앉아 보다니.
마징가 제트, 태권브이, 마루치 아라치, 마린보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찬 만화들이 온 마음을 덮어버렸다.
어린이 프로가 끝나고 뉴스가 나올 때 즈음(아마도 7시쯤으로 기억한다) 이미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학년 어린아이가 돌아다니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친구네 집에 간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나온 터라 더욱 걱정이 앞섰다.
몸을 일으켜 가려는데 준하 어머니가 붙드셨다.
“철아, 저녁밥은 먹고 가야지.”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을게요.”
절대 밥 얻어먹지 말라던 어머니의 단호한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어머, 손님을 굶겨서 보낼 순 없지.”
어린 내게 “손님”이라고까지 하며 강하게 붙들었다.
“철아, 빨리 먹고 가면 되지 않겠니?”
너무 큰 어른의, 너무 간절한 요청.
주저앉았다.
준하의 방으로 동그란 소반에 우리 둘을 위한 밥상이 들어왔다.
밥상 위의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숨이 멎을 듯했다.
밥상 위의 여러 접시 중에서도 특히 하얗게 빛나는 접시가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우리 집에서는 1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계란 프라이가 한 개씩 올려있었다.
계란 프라이는 따듯했다.
계란 흰자는 기름이 둘려져 더욱 하얗게 빛나고, 노른자는 완벽한 동그라미로 소금과 깨가 살짝 뿌려진 반숙으로 반투명하고 노랗게 찰랑거렸다.
준하가 먼저 능숙하게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먹었다.
나도 조심스레 접시 위의 계란을 포크로 떠먹다가 그만 노른자를 터트리고 말았다.
노른자가 흘러 지저분해진 접시가 무척 창피하게 느껴졌다.
접시를 핥아먹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최대한 긁어먹었다.
그리고 품위 있게 밥과 나머지 반찬을 즐겼다.
밥을 다 먹고 집을 나서는데 준하 어머니가 대문까지 나와서 마중했다.
“내일 또 오너라...”
인사를 하고 잰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내일 또”라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처음 혼자 걸어보는 늦은 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골목길은 깜깜했지만 봄날 하늘은 별들로 가득했고 달빛을 흔드는 바람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을 밟으며 집 앞에 들어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내 어깨를 꽉 쥐었다.
“ 너 이놈의 새끼, 지금 어디 갔다 이제와.”
“ 응 친구네 집.”
“ 친구 누구? ”
“ 준하...”
“ 친구네 놀러 갔으면 일찍 와야지 지금 몇 시야.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통행금지가 있어서 밤 여덟 시 이후로는 거의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즈음, 어린이 유괴 사건들이 몇 건 터지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일들이 있던 터였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난리가 날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내가 늦게 온 것은 순전히 준하와 준하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나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준하네 엄마가 억지로 밥 먹고 가라고 잡았어.”
“뭐라고?...”
“진짜야...”
나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하던 어머니는 차마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별로 말이 없었고, 자식을 야단치는 법이 없었다.
부모님은 온종일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나를 찾았을 것이다.
파출소에 실종 신고를 했는지도 모른다.
따듯한 물을 세숫대야에 떠서 부엌에 쭈그려 앉아 나의 얼굴을 유난히 박박 문질러 씻기며 어머니는 이야기했다.
“또 한 번만 그러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응...”
다음날.
학교가 끝나갈 즈음 준하가 다가왔다.
“천아, 오늘도 우리 집 갈래?”
준하를 따라가며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오늘은 절대 밥은 안 먹고 텔레비전만 보고 가야지...”
밥만 안 먹어도 어머니가 이해해 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날도 준하 어머니는 손님을 굶겨 보낼 생각이 없었고, 계란 프라이를 거부할 만한 의지가 내게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다.”
평소 같으면 발로 뻥 차고 들어갔을 철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삐-이-꺽.”
녹슨 쇳소리가 날카롭게 골목길의 어둠을 찢었다.
대문 사이로 살짝 들여다보니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로 놀래는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어제보다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너 정말 혼나볼래, 또 그러면 쫓겨날 줄 알아...”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지만 야릇한 안도감에 젖어 냉큼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후.
“철아, 오늘 마린보이 하는 날이다. 우리 집에 갈래?”
만화영화 주제가를 중얼거리며 마린보이를 만나러 갔다.
돌아가는 밤길.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하늘이 흐리고 바람은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내 그림자가 검은 고양이처럼 내 앞에 길게 걸어갔다.
집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대문 앞에 커다란 가방하나가 놓여 있다.
무심하게 철문을 밀었다.
열리지 않는다.
애써 밀어보지만 열리지 않았다.
“쿵, 쿵, 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개들이 여기저기서 “커, 커” 짖는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더 크게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엄마 문 열어줘. 엄마...”
개 짖는 소리와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 온 마을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두들겼을까 문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어머니의 목소리.
“나야 철이.”
“철이가 누구지?...”
“나라니까 철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이 울렸다.
“나가, 이 새끼야. 옷이랑 신발 그 방에 다 넣었으니까 들어오지 말고 나가버려.”
나의 두 볼에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엄마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문이 젖히더니 어머니가 쇠로 된 연탄집게로 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팼다.
나는 내 덩치만 한 가방을 질질 끌고 골목길 끝까지 두들겨 맞고 엉엉 울면서 달아났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두들겨 맞은 후에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의 천둥소리와 나의 우는 소리에 온 동네가 다 깨었다.
방 한구석에 처박혀 한참을 울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모를 뜨거운 서러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날 밤, 늦게야 퇴근을 해서 상황을 모르는 아버지는 퉁퉁 부은 채 잠든 나의 얼굴을 보았다.
“철이 얼굴이 왜 저래?”
“오늘 또 그러기에, 아주 그냥 뒤지게 팼어요.”
“그 집에는 왜 그렇게 가는 거야?”
“왜긴 왜예요, 텔레비전 보려고 그러지.”
“...”
학교가 끝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운동장에서 공 차자는 친구들의 말에 대꾸 없이.
얼굴에 왜 멍이냐고 준하가 물었지만 대답을 못했다.
오늘따라 집은 멀었다.
힘없는 발이 땅에 끌려 흙먼지가 날렸다.
대문 앞을 서성이다가 걸음을 돌려 논두렁 뒤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집이 내려다 보였다.
허리춤까지 자란 강아지 풀밭에 앉으니 푹 파묻혔다.
강아지풀 꽃에 달린 금색 털이 해를 받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지럽게 반짝거렸다.
강아지풀을 꺾어 씹었다.
어지러웠다.
하늘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바람이 들이쳤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타닥, 타닥” 언덕 상수리 나뭇잎에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린 빗방울이 목덜미 위로 떨어졌다.
"우수수~" 소리와 함께 강아지풀들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출렁거려 뺨을 따갑게 찔렀다.
머리 위로 가방을 들어 올리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문 앞에서 머리에 떨어진 강아지풀 꽃 씨앗들을 털어냈다.
그런데 방안이 소란스러웠다.
의아해하며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 웅장한 텔레비전이 네다리로 자랑스레 서있었다.
누나와 여동생은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입을 벌린 채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나는 소리쳤다.
“아빠 이거 우리 거야?”
“그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연탄 한 장 외상으로 가져올 만큼 가난한 형편에 어떻게 텔레비전이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연탄 몇 장이 있어야 텔레비전과 바꿀 수 있는지를.
제3 장, 스위스
2학년이 되었다.
학기 초, 어느 아침 조회시간.
조금 긴장한 얼굴로 한 전학생이 선생님을 뒤따라 교실로 들어왔다.
“자, 오늘부터 우리 반에 전학 온 학생이야. 박수로 환영해 주자.”
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어색한 박수를 쳤다.
조금 수줍게 선 여학생은 진초록 칠판 앞에 서니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안녕, 내 이름은 이수원이라고 해 반가워. 잘 지냈으면 좋겠어.”
검은 단발머리는 창문 너머 들어오는 봄 햇살과 바람에 찰랑였다.
까만 눈동자가 선명했고 무척 야무져 보였다.
“얘들아, 오늘은 새로 짝을 정하는 날이니까 모두 복도로 나가서 키순으로 줄을 서세요.”
복도 양쪽으로 한 줄은 남자, 한 줄은 여자가 키순으로 적당히 섰다.
선생님이 앞뒤로 다니며 키 높이에 따라 순서를 조정했다.
수원이는 맨 앞에서 15번째, 나는 앞에서부터 17번째.
나는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는 동안에 살짝 무릎을 구부리고 두 명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정도 키순이 정해지자 앞에서부터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짝이 되어 교실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내가 순서를 잘못 세었거나 선생님이 갑자기 순서를 바꾸면 어떻게 하나 하는 긴장감과 흥분으로 입장 순서를 기다렸다.
“다음, 철이랑 수원이 들어가.”
선생님의 이야기가 “쿵” 하고 내 귓가를 때렸다.
새로 자리가 정해지고 교실은 무척 활기찼다.
짝이 된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넌 시골에서 전학 왔니?”
“아니.”
“그럼 어디 학교에서 전학 왔어?”
“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를.
“그럼 어디서...?”
“ 난 지난달 스위스에서 왔어.”
나는 깜짝 놀랐다.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눈 덮인 스위스.
“스위스?”
“응, 우리 아빠가 5년 전 스위스로 발령을 받아서 온 가족이 스위스에서 살았다.”
“너희 아빠는 뭐 하는 분이신데...?”
“대사관에서 일하셔.”
수원이는 조용했지만 간혹 까르르 웃기도 했다.
목과 팔이 희었고 손은 작고 단정했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작은 귀가 살짝 드러났다.
“넌 어디 사니?”
갑자기 수원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물푸레골.”
“멀어?”
“가깝다.”
“너희 집은?”
“기자촌.”
신문사나 방송국 기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붙여진 동네 이름이었다.
인근에서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였다.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찌감치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철아, 왜 이렇게 일찍 가니. 학교 문도 안 열었겠다.”
어머니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서 뛰다시피 학교로 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학교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내 도시락은 사각형의 누런색 양은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은 늘 신문지로 여러 겹 둘둘 말려있었다.
신문지를 펼치고 뚜껑을 열면 위쪽에 작은 공간이 반찬이고 나머지가 밥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찬은 검정 콩자반, 멸치볶음, 김치 중 하나였다.
콩자반이 들은 날은 밥에 온통 검은 물이 들었고 김치가 들은 날은 벌겋고 시큼한 냄새가 밥 위에 번졌다.
가끔 김치 국물이 넘쳐 국어책이나 산수책 한 부분이 누랬다.
수원이 도시락은 분홍색 보자기에 싸여있었다.
동그란 통 모양의 보온 도시락은 위에서 돌려 열었다.
맨 위에 반찬통, 두 번째 국, 세 번째가 은빛 나는 밥통이었다.
밥에서는 아직도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런 도시락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반찬통은 삼등분으로 나뉘었는데 계란말이, 분홍색 메추리알 같은 것, 장조림이 들어있었다.
반찬들은 각각 은빛 나는 알루미늄 포일로 한 번 더 감싸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도시락을 손으로 가리고 등지고 앉았다.
등 뒤에서 수원이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철아, 이거 먹어보련?”
수원이가 반찬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
분홍색 메추리알 같은걸 하나 집어 들었다.
“비엔나소시지.”
처음 먹어보는 맛,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더 권해서 하나를 더 집어먹고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도시락을 다 먹고 잠시 있으려니 수원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하나 더 꺼냈다.
역시 분홍색 보자기에 싸여있었다.
둥글고 넓적한 통을 열었다.
세 칸으로 나뉘어 사과, 귤, 바나나가 손질되어 먹기 좋게 담겨있었다.
“점심시간에 과일을 먹다니...”
무척 놀랐다.
수원이의 권유에 과일 몇 조각을 또 얻어먹으며 그런 나 자신이 무척 싫었다.
수원이 말을 걸었다.
“너 학교 끝나고 뭐 해?”
“그냥...”
“나랑 놀래, 친구가 없어 심심해 죽겠다.”
방과 후, 스탠드에 가방을 던져두고 운동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교실 건물 옆에 만들어놓은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노란 민들레가 한창이었다.
“이건 무슨 꽃이니?”
“민들레, 나중에 홀씨들이 바람에 날라 가면 꽤 멋있다.”
내가 화단 옆 산수유나무 가지에 매달려 흔들었다.
노란 꽃들이 바람을 타고 눈처럼 내렸다.
수원이 산수유 꽃들을 따라 두 손을 펼치고 뛴다.
물끄러미 운동장을 바라보던 수원이 앞서간다.
“우리 그네 탈까? “
수원이 그네 줄을 잡고 손으로 흔들었다.
나는 옆 그네에 앉아 다리를 차고 높게 올랐다.
수원이 놀라며 웃었다.
“와~높다.”
나는 더 높이 발을 찼다. 그네가 뒤집어질 만큼.
봄 햇살에 눈이 부셨다.
수원이도 그네에 앉아 다리를 차지만 별로 오르지 못했다.
그네를 멈추고 수원의 그네를 조심스레 밀어주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까르르 웃는다.
“와~높다.”
수원이의 스커트 자락이 나풀거리는가 싶더니 순간 “악” 소리를 지르며 그네에서 떨어졌다.
하얀 스타킹 무릎 위로 붉은 피가 배어 올랐다.
나는 순간 가방에서 하얀 거즈 손수건을 꺼내 수돗가로 뛰었다.
어머니가 한쪽에 파란색 실로 내 이름을 새겨준 손수건이었다.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무릎을 지그시 눌렀다.
“아파?...”
“어...”
내 손수건을 받아 생채기 난 손바닥을 닦으며 천천히 일어선다.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 보더니 콧등을 찡긋했다.
흙 뭍은 옷을 툭툭 털며 수원이 가방 쪽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네를 발로 차 버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서는데 “삐약, 삐약” 소리가 요란했다.
매년 이맘때면 병아리 아저씨가 종이 상자에 병아리를 풀어놓고 팔았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을 했다.
수원이가 멀찍이서 나와 병아리를 번갈아보며 “와~”한다.
아이들을 비집고 들어간 나는 자리를 트며 수원이를 앉혔다.
수원이가 병아리 털을 손가락으로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내가 물었다.
“아저씨 얼마예요? “
“100원.”
아저씨가 작은 봉지에 병아리 한 마리와 모이를 조금 담아 주었다.
수원이에게 봉투를 건넸다.
“너 가져.”
수원이 놀라며 받았다.
“어... 고마워.”
수원이는 걸어가면서 봉지 안의 병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병아리 키워봤니?”
“키워봤다.”
“잘 크니?”
“응, 근데 병든 애들은 잘 죽는다.”
수원이를 기자촌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길을 돌려 집으로 왔다.
다음날.
하얀 스타킹 안쪽으로 반창고가 붙여져 무릎이 두툼해 보였다.
“무릎은?”
걱정스러운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원이 말했다.
“병아리 이름 지었다.”
“뭔데?”
“나비, 노란 나비 같아서.”
상기된 얼굴로 온종일 손짓 발짓을 하며 나비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수원이가 아침부터 표정이 어둡고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어제 아빠가 나비를 마당 목련나무 아래에 묻어주었어.”
말이 끝나고 잠시 입술을 깨물던 수원이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원이의 손등 위로 내 손을 올렸다.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수원이 내손을 힘껏 모아 쥐며 더 울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수원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순간 머리에서 리본 모양의 보라색 머리핀이 바닥에 “툭”떨어졌다.
그날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밤, 머리핀을 꼭 쥔 채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었다.
같은 반이 되기를 기대했지만 헛일이었다.
수원이는 2층에 있는 2반 나는 3층에 15반이었다.
4학년 5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이면 계단을 내려가 수원이네 교실을 힐끗거리며 지나다니곤 했다.
까치발을 하고 창문 너머로 교실 안에 있는 수원을 넘겨다보곤 했다.
주머니 속의 보라색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5학년이던 어느 날, 한 번은 교실 안에서 짝꿍 남학생과 깔깔거리며 웃는 수원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획” 돌아서서 5층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보러 가지 않았다.
6학년이 되어서도 수원이네 반은 4층, 우리 반은 5층이라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5층 우리 교실 근처 복도에서 수원이와 마주쳤다.
나는 흠칫 놀랐다.
못 본 척 지나치려는데 수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
“잘 지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나도...”
망설이던 수원이 말했다.
“나, 멀리 간다.”
“어디?...”
“아빠가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나서...”
“언제 오는데?...”
“아직은 잘 몰라.”
나는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리본 모양의 보라색 머리핀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
수원이 내 손위의 머리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핀을 받아 든 수원은 주춤하더니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파란색 실로 내 이름이 새겨진 하얀색 거즈 손수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코스모스 길가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흐릿하게 붉은 얼룩이 배어있었고 살구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자꾸만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씩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4층에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더 이상 수원을 볼 수 없었다.
6학년이 끝나가는 어느 가을, 몸살이 심하게 왔다.
처음이었다.
밥을 먹지 못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몸을 떨었다.
“으응...” 가끔 나도 모르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아버지가 스프라는 걸 사다가 직접 끓여서 쟁반에 받쳐 방으로 들고 들어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불 위에 앉아 뜨거운 수프를 몇 번 떠먹었다.
내 앞에 앉은 아버지가 이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겨우 한 수저를 더 뜨고 가늘게 눈을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수프가 반 이상 남은 그릇을 받아 들고나갔다.
그리고 며칠을 더 앓았다.
제4 장, 삼성동에서
우체국을 나섰다.
은행잎들이 어지럽게 날리는 가을 우체국 앞은 한산했다.
신춘문예는 내게 너무 낯선 일이다.
오래도록 글을 써왔지만 평가받아본 적은 없었다.
글을 쓰고 퇴고를 하는 몇 달간은 편지를 쓰는 것 같았다.
처음 초고를 보여주니 아내와 큰 딸은 꽤 재미있다고 했다.
아내에게 물었다.
“모두 실명인데 혹시 당사자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글쎄요, 아주 오래된 일인데 누가 알겠어요.”
“이름을 다 바꾸려고 했는데 그러면 남의 이야기 같아서... “
새해가 되고 일상은 여전히 분주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그런데 문자가 왔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조선이라고 합니다.”
“아, 조선씨 안녕하세요, 국제일보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신춘문예 단편소설부문에 당선되셨습니다.”
몇 번 신문사를 방문하고 책 출판을 의논했다.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와서 두어 번 출연을 했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이.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연락이 잘 없던 사람들까지 전화로 축하를 하는 통에 무슨 인기인이 된 것 같은 분주한 행복감에 지냈다.
어느 날, 이메일이 하나 왔다.
벌써 여러 날 전에 도착한 이메일이었다.
책표지에 작가 이메일 주소를 넣었는데 독자 누군가가 보낸 듯했다.
이메일을 열고 잠시 숨을 고르며 내용을 읽었다.
“이수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동 코엑스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20분쯤 먼저 도착했다.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조금 있긴 했지만 조용했다.
삼성동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겨울 볕이 카페 중앙까지 미끄러져 들어와 포근했다.
얼마 후, 40대 중후반의 한 여성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본다.
내 쪽을 보더니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서로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이메일을 보낸 수원이 언니 동생이에요.”
“예,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했다.
“언니가 방송과 기사로 우연히 조선씨 글을 봤어요.”
“아 그랬군요. 그럼 이수원 씨는 지금 어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떨어졌다.
“언니는 지금 없어요. 오랫동안 투석을 하며 투병을 하다가 얼마 전에...”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그랬군요. 안타깝네요.”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언니가 항암치료로 힘들어했어요. 그런데 조선씨 글을 보며 어린애처럼 좋아했어요. 몇 번을 읽더라고요.”
“아쉽네요. 조금만 더 일찍 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언니가 마지막 가기 전에 저에게 부탁을 했어요. 이걸 전해드리고 싶다고...”
작고 네모난 흰색 상자를 건넸다.
그녀와 헤어지고 삼성동 거리로 나왔다.
잠시 걷다가 멈추어 서서 상자를 열었다.
리본 모양의 보라색 머리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그때처럼 반짝였다.
“두둑, 투두둑”
갑자기 눈앞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예고에 없던 겨울비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머리를 감싸고 부산하게 뛰는 사람들 속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