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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 에포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

by 이상혁 심리상담가


1. 후설은 누구인가?


자,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 물어보죠. 당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게 사실은 당신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게 뭔 소리야? 싶겠지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정말 객관적인 실재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만들어낸 세상일까요?


오래 전에 이런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라는 철학자입니다. 외모에서부터 지적인 아우라가 느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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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경험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이걸 '현상학(Phenomenology)'이라고 합니다.


후설 이전의 철학이 세계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면, 그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과 의식의 작용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이전의 철학자들이 "우주란 무엇인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 같은 거창한 질문을 던졌다면, 후설은 이렇게 반문했죠.



잠깐만, 그런데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조차 정확히 모르면서 그 본질을 논하는 게 가능해?


그의 철학은 단순한 존재론을 넘어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집중합니다.


자,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고, 의미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뭔 X소리야?라며 헛웃음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신의 의식이 무언가를 해석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후설은 바로 이걸 연구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이후 실존주의, 해석학, 심리학, 정신분석 등 수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에포케(Epoché)"라는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2. 에포케(Epoché)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가장 재밌는 개념들은 대부분 그리스어에서 나옵니다. '에포케(Epoché)'도 마찬가지죠. 이 단어를 처음 들으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판단을 유보하자." 즉, 우리가 무심코 믿고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추고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 선입견, 가정을 잠시 보류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물을 보거나 사건을 경험할 때, 이미 익숙한 개념과 가치 판단을 통해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믿을 수 없다'거나 '저 사람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등의 판단을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후설은 이러한 선입견이 우리의 경험을 왜곡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판단을 내립니다. "이 사람은 믿을 만해, 저 사람은 별로야, 난 원래 이런 성격이야, 돈이 많아야 행복하지, 사랑이란 결국 실망으로 끝나는 걸." 뭐,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데 후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생각, 어디서 나온 거야?
정말 네가 직접 검증한 거야?
아니면 그냥 사회가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 거야?


한 번 생각해 보죠. 어떤 사람이 "나는 항상 실패한다."라고 믿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정말 그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을까요?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람만의 특정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에 에포케를 적용하면, '내가 늘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은 '이 신념이 형성된 과정은 어떠한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신념을 절대적인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하는 과정과 영향을 검토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에포케는 판단과 평가를 일시적으로 보류하고, 보다 깊이 있는 사색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에포케는 바로 이런 의문을 던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들을 일단 보류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거죠.


이건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야!" 하는 자기계발서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의 생각을 철저히 해체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철학적인 과정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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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단순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의미 부여를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 동안 습득한 편견과 신념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후설은 에포케를 통해 기존의 신념과 판단을 의도적으로 중지함으로써,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한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3. 에포케(Epoché)는 심리상담에서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이게 심리치료랑 무슨 상관이야?" 좋은 질문입니다. 심리치료의 핵심은 '내담자가 자신의 사고방식을 더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신념을 절대적인 진실로 여긴다는 거죠. 그리고 그 신념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다양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에포케는 이러한 자동적인 해석 과정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보다 열린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내담자의 자기 인식을 돕는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특정한 신념이나 감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에포케를 적용하면 그러한 신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내담자가 '나는 언제나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치료자는 에포케를 통해 '그 믿음이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이 믿음이 없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신념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경험과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감정 조절과 불안 감소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은 종종 특정한 사고 패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실패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강한 불안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포케를 적용하면, '나는 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이 생각이 사실이라고 반드시 단정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기존의 사고를 유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 치료자와 내담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치료자는 내담자를 돕기 위해 개입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특정한 행동을 이야기할 때, 치료자가 개인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되면 내담자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치료자는 에포케를 실천하며, 내담자의 경험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내담자는 치료자의 판단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게 됩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 신념이 처음 생긴 순간을 기억하나요?"
"그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실일까요?"


마지막으로, 에포케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도 꽤나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포케를 통해 그러한 평가를 잠시 보류하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보다 자비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건 자존감을 높이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죠.





4. 마무리


결국, 후설이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겁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만들어진다." 이건 무서운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념이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든 그것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게 정말 객관적인 진실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어온 걸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렌즈는 이미 수많은 경험과 사회적 영향으로 색이 입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렌즈를 벗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볼 필요도 있죠. 그것이 우리가 더 자유롭게, 그리고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음번에 누군가 당신에게 "이건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래?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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