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부모와 가정환경
내 친구가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얼마나 엉뚱한 아이인지를 설명하며 내게 말했다.
“얘, 우리 현이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갑자기 해. 이번엔 뭐라 하는지 아니? 글쎄 자기 발이 콜라를 먹었다고 막 주물러 달라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빵 터졌다.
“와우! 기가 막힌 표현이네. 발이 저린 모양이었구먼.”
그때 떠오른 생각이 ‘너 닮았다. 너’
그렇다. 내 친구는 어릴 적부터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모두를 황당하게 만드는 특별한 말재주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친구가 남편의 잘못으로 이혼했을 때 “말똑싸다. ○○씨. 요런(사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복덩어리를 몰라본 지 눈을 찔러야지 뭐.”라고 후련하게 내뱉어서 우울한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파안대소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이러한 웃음은 순간 좌중을 무방비상태로 만들어 나이 들면서 생긴 묘한 습관, 즉 교양으로 감정을 위장하지 않게 풀어준다. 짧은 웃음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인생의 고난이 별 거 아닐 수 있다는 위로를 느끼게 해 준다.
공방을 운영하는 내 친구는 특히 아줌마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물론 친구의 솜씨가 특출 난 것도 있지만 나는 불경기에도 꾸준하게 그녀가 공방을 훌륭하게 유지하는 데는 그녀의 특별한 유머 재능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공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위로가 고팠던 사람들이다. 자녀의 발달장애와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끝없는 우울에 빠진 젊은 엄마, 시댁과의 갈등 속에 일방적 피해자가 되어버린 며느리, 병든 노부모를 오롯이 부양해야 해서 결혼은 꿈도 못 꾸는 말단직 사무원 등. 그녀를 찾아오는 고객은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럭셔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친구의 공방에서는 예술이라는 공통분모로 소통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내 친구를 찾아와 지친 마음에 위로를 받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충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친구는 내가 연락이 뜸하면 어김없이 “뭔 일 없는 거지? 방글라데시로 이민 간 거야?”라고 뜬금포를 날린다. 그게 친구의 애정표현 방식이다. 우리는 시골 촌구석에서 나고 자라 서울언저리에 정착해 살기까지 50년 이상을 만난 사이고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도무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아들이 콜라 먹은 발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 친구를 닮았고, 내 친구는 또 자기 친정 엄마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엄마, 아프면 안 돼요. 내가 칠 남매 막내니까 엄마를 제일 쪼끔 보잖아. 사람을 억울하게 하믄 불공평하지.”
“아유, 니 사정도 딱하다만 내 사정두 바쁘고 고민이 많은 사람여. 겨울엔 인부들 땅파기가 얼메나 고되겄어? 그래서 지금은 아퍼도 죽기가 아주 곤란혀. 그게 아주 큰 고민거리라니께.”
창의적 부모의 성격이 창의적 가정환경을 매개로 자녀의 창의성에 미치는 정적 상관관계는 학술지의 논문이 아니어도 나는 이렇게 실체적 사실로 마주한다. 내 친구의 가정환경은 돈 보다도 백만 배 더 특별한 유산임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