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 사회복지사의 길
주 1회 A 복지관으로 향하는 목요일 바람은 시원하고 하얀 솜뭉치가 둥실둥실 하늘은 맑다. 3년째 사회공헌 활동 사업을 참여하고 있다. 오늘은 어르신들 종이접기 수업을 진행한다.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계신 분들이다.
어르신들과 빨강, 노랑, 분홍 색종이를 접어 꽃잎을 만들고 녹색으로 잎을 자르고 엽서에 붙어 개성대로 예쁜 카드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카드를 완성한 후 사랑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작성하여 전달할 예정이다. 어르신들 12명은 벌써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경도인지장애로 기억력이나 인지기능이 뚜렷하게 감퇴한 상태지만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은 보존되어 있어 아직은 치매가 아닌 상태로 노래하기, 종이 접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선생님 예쁘다는 등 같은 말을 반복하고 색종이나 색연필 등 좋아하는 색을 서로 욕심내고 가끔은 아이처럼 다투기도 하는 특징이 있다.
준비된 재료를 나누어주고 봉사자와 어르신들이 짝을 이루어 다양한 색의 꽃잎을 만들고, 초록 잎을 잘라 엽서에 붙이는 작업을 하며 어르신들과 교감을 한다. 작은 손놀림 속에서 삶의 기억과 감정을 피워내는 그분들은 순수한 열정과 기쁨으로 매 순간을 채우셨다.
삶이란 종종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이끈다. 어떤 길은 가시밭길 같고, 어떤 길은 꽃길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배움과 성장의 씨앗은 늘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지인의 권유로 자원봉사센터로 향했던 일이 있다. 처음엔 단순히 시간이 나 채우자는 마음이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들은 내 삶의 또 다른 장을 열어 주었다. 그곳은 누군가를 돕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온정을 나누고 마음의 빈자리를 메우는 안식처였다.
어르신들과 꽃잎을 접으며 나눈 짧은 대화, 고마움을 담은 미소나 손길, 솔직한 삶의 이야기가 때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일상을 풍요롭게 해 준다. 투박한 손길이 전하는 따뜻함, 꽃잎을 접는 바스락 거림, 어르신들의 부드러운 미소가 내 마음속 빈자리를 천천히 메워갔다. 오래된 항아리에 맑은 물이 차오르듯이 작고 소박한 순간들이 쌓이며, 허한 마음을 채운다. 나눔이란, 무엇을 주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도 성장하는 마중물임을 알게 된다.
봉사활동이 가져다준 풍요로움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는 없었다. 1997년 IMF의 경제 위기는 우리 집 가정경제도 태풍처럼 몰아쳤고, 경제활동을 위해 도전해야 했다. 결혼 전 S사 홍보실에서 일했던 20년 전 경력은 세상에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컴퓨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컴맹’으로서 직업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고, 기초부터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 앞에 앉을 때마다 내 손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누군가 내 뒷모습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러나 손끝이 자판을 익혀갈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할 수 있다’라는 희미한 불씨를 발견했다. 낯선 화면 앞에서 무수히 좌절하며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결국은 OA 마스터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컴맹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도 갖게 되었다.
복지관에서 만났던 어르신의 마음에 공감하고, 사회복지사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여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고, 3년 만에 B 복지관에 취업하게 되었다.
55세, 늦깎이 초보 사회복지사 딸 또래의 동료와 함께하는 업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손끝이 떨렸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매 순간 두려웠지만, 차곡차곡 시간 속에서 배우고 성장했다.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눈물과 웃음을 나누며 공감과 사랑의 깊이를 배웠다.
다섯 해 동안, 만난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단조로운 나의 삶을 깊고 풍성하게 했다. 그들의 밝은 웃음은 나를 웃게 했고, 눈물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늦은 나이 사회 초년생이 걸어온 길은 도전의 연속이었고, 우당탕 맨몸으로 부딪히는 일상은 삶이 더욱 다채롭고 빛나게 해주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카드 한 장에 적힌 “사랑한다”라는 서툰 글씨는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봉사자들과 50분 동안 만든 예쁜 카드에 “우리 우정 영원히”라고 쓰고 하트까지 그린다. 선물이라고 옆 친구에게 엽서를 전하는 수줍은 모습은 천진한 소년의 모습이다. 참 잘했어요! 따뜻하게 안아주고 다음 시간을 약속하고 인사로 마무리한다.
꽃잎을 접으며 나눈 대화, 고맙다는 손길, 삐뚤삐뚤 적힌 메시지 속에서 삶의 소중함을 배웠고 오늘도 또 다른 도전을 꿈꾼다. 누구나 꽃잎 하나를 접으며 삶의 새로운 색을 채워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끝과 마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잔잔한 일상보다는 도전하는 삶의 꽃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