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쁜 말로 덮어버린 것들
최근 ‘시절인연’이라는 표현을 알게 되었다.
요즘 유행처럼 쓰이길래 가볍게 여겼는데, 찾아보니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때’가 있다는 뜻.
뜻을 알고 나니, 그 표현이 생각보다 꽤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말이 좋은 이별을 추억하기보다는,
그저 떠나보낸 인연을 예쁘게 포장하는 말 같았다.
요즘은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어. 그냥 시절인연이었던 거야.”
이렇게 위로하는 말들이 흔하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인간관계로 힘들다고 하소연했을 때,
댓글이 수십 개 달렸는데 그중 대부분이 이 말이었다.
“그냥 시절인연이야.”
“그만 놓아줘.”
“이제 보내도 될 때야.”
그 위로들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 위로들 속엔 감정의 결을 잘라내고 ‘정리’하는 힘이 느껴졌다.
인연을 애써 마무리짓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말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도 이 단어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몇몇 지인이 스쳐간다.
잘 지냈던 시절엔 정말 잘 지냈다.
어느 날 우리가 인연을 그만두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줄고, 말이 사라지고, 마음이 식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몇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드러내 묻지도 않고, 고쳐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 마음속에서 그들을 멀리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정말, 말 한마디 없이 멀어진 관계에도 ‘시절인연’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걸까?
그저 내가 불편함을 외면한 결과였을 뿐인데, 그건 단지 때가 지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진짜 시절인연이란 서로의 노력이 끝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걸까?
요즘 사람들은 불편함 자체를 불편해하고, 빠른 결과를 원하며 살아간다.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나를 불편하게 한다면 깊이 고민하거나 애쓰는 대신,
서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조용히 접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인연을 놓아온 적이 있다.
그래서 생각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은 때가 지나 자연스레 흩어진 인연을
덜 아프게 기억하기 위한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 말이, 노력하지 않은 나의 무심함까지 포장해주는 건 아닐까?
외면하고 도망친 내 태도에, 너무 고운 이름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닐까?
애써보지 않고, 감정을 나눠보지도 않고,
그저 마음이 멀어졌다는 이유로 '때가 다 했다'고 말하는 건 과연 정당한 걸까?
그들을 정말 시절인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감정에서 조용히 도망친 건 아닐까.
‘시절’이 아니라, ‘내가 외면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