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글을 보았다. 그 글은 아마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모두가 주목할만한 글일 것이랴.
그 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바로 Vladimir Sofronitsky, 그의 우주를 반영한 글일 것이다. 그는 매우 특별한, 또는 10명 중 9명이 비정상인이라면 1명의 정상인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도 이런 측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무엇인가? 이상한 사람의 삶은 매우 평범하였다! 어쩌면 나의 눈이 틀어져서 사람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다, 다행히 내 눈은 멀쩡하였다: 그는 이상하다면 이상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다음 설명을 보면 지나가던 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랴,
Vladimir Sofronitsky
그의 인생 중 큰 사건이나 가십거리는 일절 없었으며, 비슷한 업종의 남들처럼 평범하게 음악원을 졸업하였다.우리나라의 유명한 음악가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어릴 때 큰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음악 경연 대회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음악 교육 관련된 일 또는 공적인 행사를 거행한 적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까지도 하지 않았다.
이것뿐이랴!그는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또한 세계 순회공연을 한 적도 없다. 이 때문에 경력에서는 상대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그의 관심사는 놀랍게도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지만 문학과 미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음악인들의 등급을 매기는 일에 흥미를 느꼈는데, 예시로 "리스트는 유럽적이고, 루빈스타인은 전 세계적이고, 라흐마니노프는 우주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음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콘서트를 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의 내면은 내성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인지, 대중으로부터 은둔한 생활을 즐겼다.
그의 연주는 마치 마술 같다. 그 누구도 그의 연주를 듣고 '평범하게 연주하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전에 들었던 곡이라도, 또 다른 연주라면 그 연주와 전에 들었던 연주에 괴리감이 발생해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그는 녹음을 매우 증오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주 녹음들은 대부분 비밀스럽게 녹음된 것들이라고 한다.얼마나 증오하는지 '녹음된 것들은 모두 죽은 시체들과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한 바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녹음 품질이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당시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진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현재의 녹음 품질을 들었을 때의 의견이 참으로 궁금하리.
그럼 그의 연주는 어떠한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허물없이 살고 있다." 이러한 태도 때문인지, 그는 연주회에서 사람들을 비탄에 잠기게 하는 최고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곤 하였다. 그것은 풍부한 감정, 시정성,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는 진정 위대한 음악가이랴, 까다롭고 냉소적이었던 그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고,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며 시를 짓는 문학가적인 음악가이었다. 그가 믿었던 유일한 것은 음악으로 영혼을 고상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연주할 때를 최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연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 Vladimir Sofronitsky
자자, 나름대로의 설명을 구구절절해보았다. 그의 놀라운 다음 명언과 함께 분위기를 띄워보자.
"진정한 예술은 일곱 겹의 갑옷을 입은 뜨거운 용암과 같다."
어디선가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임윤찬이 많은 곳에서 인용한 소프로니츠키의 문장이다.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것이다.
여담으로 이 문장에 관련해 재밌는 그의 인터뷰가 있다. 그가 말하길 정작 본인은 내면의 '용암'을 내보이는 데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무대를 앞두고 있으면 마치 피부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그럴 때면 여러 겹의 갑옷도 소용이 없어지니 일곱 겹이 아닌 열네 겹의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음악회도 가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이 무대에 올라가 연주를 선보이는데 내면의 '용암'을 내보이는 것이 간단하겠는가? 용암을 내보이기는커녕 경험이 없는 아이라면 울기만 하다가 그대로 내려올 것이 뻔하다. 그래도 그의 연주 녹음들에서는 용암을 나름대로 좀 내보이는 것 같아 다행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단 한 번도 등장! 하지 않은 단어를 꺼내어 보자, 바로 '현대'이다. 자동차나 사러 가나? 놀랍게도 참이니 사고 오도록 하자.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왜 이렇게 장엄하게 꺼내냐? 이 세상엔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들이 그러지 않은 경우가 잔뜩 쌓여있다. 얼마나 정도가 아니할 수 있는지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인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매우 다채로워지는데, 그건 바로 우리 주위의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모든 것들이 나보다 그다지 똑똑하지도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거죠."
이러한 정도가 예술에도 적용이 되는데, 그 예로 소프로니츠키를 가져온 것이니이제부터 온 뉴런의 작용을 이 글로 집중시켜라!
아까 말했듯이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매우 독특하다. 아마 지금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처럼 독특하게 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연주한다면 관객의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하디 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지금이 그가 태어났던 1901년도로 타임머신을 슈웅! 타고 돌아가보자. 이 시대에 스마트폰이 있는가? 좋은 녹음 기술이 있는가? 좋은 카메라? 카메라는 무슨 그의 연주는 지금 저품질의 녹음들로 남아있을 뿐이지 그의 연주 영상은 단 한 개도 없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바로 악보가 있다. 그렇다, 당시 태어난 음악가들은 그저 악보와 자신을 향한 믿음을 통하는 것만으로 음악을 창조해 나아갔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내가 어떤 곡을 연습한다 하면, 일단 유튜브를 튼다. 검색창을 눌러 곡을 타이핑 한 다음, 좋은 연주자나 연주를 찾아 띡 누르면 좋은 녹음 품질과 고화질 영상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 얼마나 규탄할만한 일인가! 그들과 우리는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
이것이 데려온 악마는 무엇인가? 바로 음악의 정형화이다. 아니, 음악이 정형화가 된다면 AI한테나 연주해 달라고 하지 사람이 왜 하는가? 이것은 마치 브리지트 바르도의 누드사진을 들고 침대에 드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옆집 개가 와서 봐도 이건 지적의 짖음을 멈출 수 없는 아주 막중한 사안이다. 이 얼마나 정통적인 일이 아니할 수 있는가!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났던 때는 오히려 정형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테크닉도 요즘에 비해 뒤떨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음악들이 판을 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나와 상반되는 의견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연주들이 테크닉도 좋고, 그에 따라 더욱 완전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만 머릿속에 마치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떠오르면, 자신이 말한 의견에 자신이 참인지 아닌지 고민을 던지는 기묘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인가? 바로'작곡가들이 활동한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라는 물고기이다. 이 가치 있는 물고기는 기묘한 일을 벌이는데 충분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원한 음악이 정형화로 된다면 그나마 병원을 퇴원하는 환자의상태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살아있지도 않은 작곡가의 의도를 어떻게 완전하게 파악하겠는가? 그것이 정형화가 된다라는 말 자체도 웃긴 말이다, 심판을 하던 미노스도 지상으로 올라와 놀랄 만큼 말이랴.
이것은애초에 예술에 정형화라는 단어가 존재해선 안된다는 소리다. 음악가 Sergiu Celibidache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결코 같은 날 같은 방법으로 ‘헬로’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움직이는 음악의 마술을 즐겨라!"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한 번 힘차게 '헬로'를 외쳐보자. 그리고 또 한 번 외쳐 보아라. 어떤가? 파동이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누구나 지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갓 태어난 아기도 말이다. 오감으로 너무나도 완전하고 운석처럼 다르게 느껴지는데 이걸 어찌 지각 못 할 수 있는가? 이것을 그러하지 못한다면 아까 지상으로 올라온 미노스가 우리나라든 우리나라 반대편 우루과이든 어디 있든 간에 현대의 미끄러운 비판길을 뛰어와서 매우 동공이 확장된 상태로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당신 혹시 아폴론의 존재를 모르는 거요?"
나는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 나의 글을 잘 따라왔다면 한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바로 '요즘 음악가들은 위대하지 않다'는 크나 큰 오산이 생길 수 있기 마련일 것이다. 이와 관련된 것은 놀랍도록 복잡한데, 윗글만을 읽고 내 의견에 고개가 끄떡끄떡 한다 하더라도 요즘 음악가는 위대하지 않다는 생각은 버리길 바란다. 그들도 그들만의 복잡한 생각이 얽혀있기 마련이다.
약간의 경과부를 지나면, 새로운 주제가 나오거나 앞서 나왔던 것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자든 후자든 둘 다 새로워야만 하는 것이 음악이로니, 나도 그에 따르도록 한다, 화두를 던져본다: 그 당시 했던 악보와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과연 어떠했는가?
사실 가장 궁금한 것이 이것과 연관돼 있는 연장선일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사유이다. 어떻게 우리가 완전히 20세기의 사람들을 이해하겠는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명언과 녹음이 있지 않나! 내가 존경하는 소프로니츠키도 녹음을 배척하였지만 과거의 별을 더 볼 수 있다는 것만큼은 그도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아까 그가 말했던 명언: 진정한 예술은 일곱 겹의 갑옷을 입은 뜨거운 용암과 같다는 말만 보아도 할 수 있는 말이 꽤 많다.
먼저 이 표현에 감각적으로 다가가보자. 아까 말했듯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인 예술인이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연습을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음악이 드러나는 등 이 문장의 위력은 엄청나다.
소프로니츠키는 '용암'을 좋아하는 것 같다. 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그에게 이런 대우의 단어 정도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마치 내가 '영혼'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프로니츠키의 문장에서 '용암'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영혼'에 비유될 수 있을 것만 같다-...아! 마치 영혼처럼 비유된다! 그런데 이때 '그냥 용암'이겠나? 절대 아니지, '뜨거운 용암'이다. 얼마나 뜨거운지, 갑옷을 일곱 겹, 활동이 활발하다면 열네 겹까지 입어야 한다고 한다. 갑옷을 어찌 이렇게 많이 입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갑옷은 내면의 갑옷이다, 이 갑옷은 그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나 자신을 보호할 만한 정도의 튼튼함은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 어쩌면 소프로니츠키, 그는 이런 갑옷을 더 입거나 벗으며 자신을 가꿔나간 것일 거다. 그렇다, 그는 내면적으로 매우 튼튼했다. 뜨거운 용암도 버틸 수 있는데 못 버틸 다른 것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그의 대담한 독창성은 이런 내면의 튼튼함에서 우러나온 것들일 것이다.
소프로니츠키만 그러한가? 참이 아니할 지니,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내면의 튼튼함을 갖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갖고 있는 대상이 누구라도 넘어지지 않을 원동력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극단적 성격으로 요즘 음악가들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또 아니다.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오로지 내면의 튼튼함을 곧 세웠던 20세기 음악가들과 다르게 21세기는 기둥을 잡고 진자 운동을 하는 추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추는 역시 내면의 튼튼함, 기둥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이것 중 뭐가 좋다 나쁘다고 얘기할 순 없을 것이다. 그저 의견이 다를 뿐. 그러나 나는 내면의 튼튼함을 곧 세우는 것이 더 예술가스럽다고 생각할 뿐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내면의 튼튼함이 어찌 그런 아름다운 음악들을 창조해 냈는가? 이 내면의 튼튼함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과거의 경우 그 다른 종류들의 튼튼함이 악보와 교감해 그들만의 완전한 음악을 창조해 내는 것이 결론일 것이다.
그럼 요즘 음악가들은 어떠한가? 기둥을 잡고 진자 운동을 하는 추는 기둥이 없다면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 기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악상 기호 따위가 될 수 있다. 또는 다른 연주자에게 들은 좋은 음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면의 튼튼함을 잠깐 곧 세운 갑옷의 기둥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인데, 너는 어떤가? 내 눈에는 너도 보수적인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이 질문 어떠한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내 아래 여러 혼을 끌어당기지 못하였다면, 이 질문은 굉장히 난해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의 보수와 나의 보수는 너무나도 다르다. 어쩌면 두 개 중 하나는 보수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으로 된다.
'보수'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이라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 출력된다. 그렇다, 보수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수의 대상은 바뀔 수 있지 않은가! A에 대한 보수든, B에 대한 보수든 마치 분배법칙처럼 보수의 의미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보수인가? 지금까지 내 글을 잘 보았다면,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튼튼함을 곧 세우는 음악가에 대한 보수로 된다. 이 얼마나 난해하면서도 간단하며 재밌는 질문인가! 이 재밌는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는다.
돌아와서 소프로니츠키, 그는 어떻게 오묘한 색깔을 띠며 살았는가? 이 의문이야 말로 매우 심오한 것임이 틀림없다,
먼저 오묘한 색깔이란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오묘할 것이다, 20세기가 아닌 현재를 생각해 보면 세상은 각박하기 그지없다. 이때나 같은 이 분야에 관해 지식이 얕은 사람이 20세기의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의 세상을 알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신이 드는 것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도 매우 힘든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 '세상 사는 모든 사람이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러시아, 구소련은 그때 어떠하였는가? 역사를 잘 몰라 당당히 말하진 못하겠다만, 아주 얕은 지식만이 있어도 그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표현되겠는가? 나는 미술도 모르는 어리석은 이 이기에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주 얕은 지식만이 있어도 그것이 지나친강렬을 가진 색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리, 그런 그림 중 그의 색은 어떠한가? 딱 튀지도,안 보이지도 않는, 그러나 독창적인 색깔일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하기 힘든 적당히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술인의 성품에서 우러나온 옥구슬일 수도 있다. 아! 그 얼마나 아름다운 오묘함인가! 이런 오묘함이야말로 내면을 탐구하기 적합한 성품일 것이다.
내면을 탐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필연적인 과제이다. 얼마나 필연적인지 한 인간의 평생을 투자해도 부족함이 흘러넘치는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 속에서 다른 부족함을 발견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 일 것이니, 부족함이 흘러넘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어쩌면 밖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병원에 누워 계시는 어른 분들보다 부족함이 없을 수 있다. 어른 분들이 하등 하다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부족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오히려 행복에 더 가까울 수도 있는 것아닌가?
부족함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천지차이다. 놀랍게도 부족함은 발견되면 아메바 마냥 엄청난 번식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부족함이 많이 흘러넘치는 것이 오히려 더 내면에 대한 탐구를 더욱 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따르면 우리는 부족함을 발견하는 것이 내면 탐구의 작은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어떠한가? 아는 인문학을 공부하시는 선생님을 포함한 수많은 인문학자들이 말하길'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이야말로 정말 부족함을 무한정으로 복사할 수 있는, 즉 내면 탐구에 가장 적합한 일이 맞지 않은가?
소프로니츠키를 포함한 정말 많은 자신의 우주를 창조한 예술인들은 모두 자신 특유의 오묘한 색깔을 띨 수 있을 만큼의 많은 부족함을 흘렸다. 이것들은 세상에 적응하는 게 아닌 세상을 적응시킬 아름다운 색깔들이다. 세상을 적응시키려면 내면의 튼튼함, 즉 '뜨거운 용암을 버티며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빼어난 일곱 겹의 갑옷'을 먼저 입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갑옷들을 입을 수 있는 자라면 어떤 일이 닥쳐와도 자신을 굳게 믿고 뛰어난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내면에 대한 탐구요, 우리는 '갑옷들을 입기 위해'라는 어쩌면 작을 수도 있는 목표를 위해 자신과 대화하고 사유하며 답을 찾아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영혼을 고상하게 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세상과 교류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아주려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