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놓여진 이기적 유전자를 다시 펼쳐 읽으며 작년 이맘때 처음 읽었을 때도 느꼈던 그 냉정한 시선이 다시금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인간을 향한 지나친 낭만도 없고 윤리를 향한 추상적인 미화도 없다. 이 책은 인간의 행동을 진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가장 잔혹할 만큼 차갑게 분석한다.
마치 내가 가진 착한 마음이나 선한 의지 같은 것들은 거대한 유전자 흐름 속에서 순식간에 벗겨져 나가는 껍질에 불과한 것처럼 다가온다.
그 적나라한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 불편하면서도 결국 인정하게 되는 이유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벽 그 적나라한 진실이 담겨있는 한문장이 나의 시선을 멈추게 만들었다.
“자식은 속이는 행위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의 진의는 자식에게 사기 행위를 하는 경향을 가진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 인간의 윤리에 대한 교훈을 도출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지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생물학적 본성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 276page
본성.
1.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특징, 변화하기 어려운 기본적 기질
2. 외부 영향이나 후천적 경험에 의해 쉽게 변하지 않는 근원적 성품.
인간의 윤리를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자식에게 심어져 있다고 믿는 이타성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며 그 기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자식에게 사기를 치는 유전자가 유리하다는 논리는 너무 극단적이기에 불편했지만 동시에 너무 논리적이기에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본성이란 결국 나의 뿌리라는 말과 같다. 내가 무엇에 흔들리고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피하려 하는지 모든 행동의 첫 단추가 되는 성질이다.
투병 이후 나는 이 본성이라는 단어를 더욱 예민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프기 전의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문제를 먼저 숨기려 했다.
괜찮다라고 말하고 견딜 수 있다라고 말하고 결국 병원을 한참 뒤에야 찾았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늘 이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것이 습관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는다, 말하지 않는다, 버틴다.’
이 세 가지는 내가 후천적으로 익힌 태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뿌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본성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고 해도 그 본성을 따라 사는 방식은 인간에게 남겨진 숙제 같은 것이며 이는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문제였다.
본성은 바뀌지 않는 근원적 성질이지만 선택의 방향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예전의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버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고통을 감추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병 이후 나는 본성의 힘을 인정하되 그 본성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변화는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사소한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것. 작은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런 선택의 반복이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얻어진 이기적 본성 위에 두 번째 본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타고난 본성은 우리의 첫 번째 성질이지만 새로운 본성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만들어가는 두 번째 기질이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타고나지 않은 성질을 행동과 선택을 통해 쌓아 올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사유도 결국 그 두 번째 본성을 다듬는 과정일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이 본래부터 서로를 속이고 속임을 감지하며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참 잔혹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에서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타고난 본성이 이기적이라면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내가 때론 실망하고 때론 후회한 행동들 역시 유전자적 기질의 연장선이라면 그동안 나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은 단순해진다.
타고난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 위에서 더 나은 선택을
쌓아 올리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
힘든 날이 오면 괴롭다고 말하는 것.
아프면 아프다고 인정하는 것.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
이런 행동들이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지만 이제는 두 번째 본성을 만들어가는 장치로 받아들인다.
오늘 새벽의 차가운 바람은 나에게 말했다. 본성은 차갑지만 인간은 그 차가운 성질과 더불어 따뜻한 선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그 선택의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이렇게 새벽을 기록하고 있다.
나는 ‘본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본성이란 타고난 뿌리 위에 선택으로 쌓아 올리는 두 번째 기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