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7년 1월, 교토의 거리는 여전히 일본 문화와 권력의 중심지로서의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려한 귀족들의 저택과 사원들이 도시를 장식했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명목상 일본 전역을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러나 이 해가 저물기도 전에, 교토는 27만 명의 군사로 가득 찬 전쟁터로 변모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11년 동안 계속되며, 일본의 정치·사회 구조를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오닌의 난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역사가 나이토 코난은 단언했다.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거의 없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건이 이토록 결정적인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닌의 난이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중세 일본의 질서가 무너지고 근세로 향하는 격동의 문을 연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닌의 난의 직접적인 발단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해 보인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후계자가 없자 1464년 승려가 되어 있던 동생 요시미를 환속시켜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유력 다이묘인 호소카와 가츠모토를 후견인으로 붙여주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인 1465년, 요시마사의 정실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았다. 권력욕이 강했던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을 쇼군으로 만들기 위해 호소카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실력자 야마나 소젠에게 접근했다. 쇼군 요시마사는 이 상황에서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였다. 바로 이 우유부단함이 일본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원인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가 이미 20년 전부터 심각한 정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1441년 가신 아카마츠 미츠스케의 손에 암살당한 후, 어린 쇼군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급격히 추락했다. 게다가 1459년부터 1460년 사이 교토를 휩쓴 대기근은 막부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슈고 다이묘들은 점점 더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고, 중앙 정부의 명령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력 다이묘 가문들 내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후계자 분쟁이었다. 하타케야마 가문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아들이 없어 동생을 양자로 들였다가, 나중에 친아들이 태어나자 양자를 폐하고 친아들 요시나리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가문의 유력 가신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양자의 아들 미사부로를 지지했다. 문제는 이러한 가문 내 분쟁을 조정해야 할 쇼군 요시마사가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기울면서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토가시, 오가사와라, 롯카쿠 등 여러 가문에서도 비슷한 상속 분쟁이 발생했고, 막부의 일관성 없는 중재는 쇼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러한 후계자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배경에는 당시 일본 사회의 상속 제도 변화가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는 재산을 여러 자손에게 균분 상속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대가 거듭될수록 가문의 세력이 분산되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 명에게 상속을 집중시켜 가문의 힘을 유지하려는 단독 상속 제도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과도기에 누가 유일한 후계자가 될 것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오닌의 난의 두 주역인 호소카와 가츠모토와 야마나 소젠의 관계도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447년 가츠모토는 소젠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며 두 가문은 협조 관계를 구축했다. 심지어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 분쟁에서도 처음에는 함께 협력했다. 그러나 아카마츠 가문의 재흥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의 입장이 갈렸다.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츠 가문의 옛 영지를 차지하고 있던 야마나 가문은 당연히 아카마츠의 재흥을 반대했다. 반면 호소카와 가츠모토는 야마나 가문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아카마츠 마사노리를 지원했다. 결정적으로, 가츠모토는 처음에 후사가 없어 소젠의 아들 도요히사를 양자로 삼았다가, 1466년 친아들 마사모토가 태어나자 양자를 폐적시키고 출가시켰다. 이는 소젠에게 깊은 모욕이었고, 두 거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1466년 12월, 야마나 소젠의 지원을 받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대군을 이끌고 교토 북쪽의 센본지조인에 진을 쳤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새해 첫날인 1467년 1월 2일, 쇼군 요시마사는 전통적으로 관례로 행해오던 간레이 저택 방문을 중단하고 무로마치정에 요시나리를 초대했다. 그리고 사흘 뒤 야마나 저택의 연회에 참석함으로써 요시나리와 소젠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는 관령 마사나가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궁지에 몰린 마사나가는 1월 18일 새벽 4시경,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교토 교외의 가미고료 신사로 퇴각해 진지를 구축했다. 야마나 소젠은 즉시 천황과 상황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리고 오후 4시경, 요시나리의 군대가 가미고료 신사를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사는 서쪽에 강이, 남쪽에 쇼코쿠지의 해자가 있어 동쪽과 북쪽으로만 공격할 수 있었다. 마사나가와 그의 가신들은 밤새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19일 새벽 4시경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신사에 불을 지르고 호소카와 가츠모토의 저택으로 탈출했다. 이것이 고료 합전이다. 서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는 오닌의 난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쇼군 요시마사는 사태 진정을 시도했다. 그는 호소카와 가츠모토에게 마사나가를 돕지 말 것을, 야마나 소젠에게는 요시나리를 돕지 말 것을 명령했다. 두 거물은 일단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표면적으로는 평온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폭풍 전야에 불과했다. 양측 모두 은밀히 병력을 교토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호소카와 편 또는 야마나 편으로 나뉘어 속속 교토로 상경했다.
1467년 5월 26일, 마침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동군의 다케다 신켄이 서군의 이시키 요시나오 저택을 습격한 것이다. 소규모 분쟁은 순식간에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국의 슈고 다이묘들은 호소카와 가츠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으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동군에는 호소카와 가츠모토,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다케다, 교고쿠 등이 가담했다. 서군에는 야마나 소젠,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오우치 마사히로, 이시키, 토키 등이 합류했다. 양측의 총병력은 27만 명에 달했다. 규슈 일부를 제외한 일본 전역이 이 전쟁에 휘말렸다.
초반 전투는 격렬했다. 9월 1일, 서군의 오우치 마사히로가 후나오카 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군의 다케다 세력을 격퇴했다. 18일에는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에서 히가시이와쿠라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벌어진 쇼코쿠지 전투는 오닌의 난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서군의 하타케야마군, 오우치군, 이시키군, 토키군 연합이 파상 공격으로 동군의 본거지인 쇼코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 날 동군의 대반격으로 쇼코쿠지는 다시 동군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전황에는 변화가 없었다.
흥미롭게도 전쟁이 진행되면서 원래의 쟁점들은 점차 의미를 잃어갔다. 1468년 쇼군 요시마사가 측근 이세 사다치카를 복직시키자, 호소카와 가츠모토와 야마나 소젠은 서로 지지하는 인물을 바꾸었다. 가츠모토는 아들 요시히사를, 소젠은 동생 요시미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미는 교토를 탈출해 이세 국으로 달아나 서군에 합류했다. 전쟁은 이미 본래의 명분을 잃고 순수한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1468년 3월부터 전투는 교토 외곽으로 확산되었다. 3월 17일 기타오지 가라스마루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 고바야카와 히로히라가 전투를 벌였다. 5월 2일에는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했고, 5월 8일에는 가츠모토가 소젠의 진지를 공격했다. 8월 1일에는 쇼코쿠사 터의 요시나리 진지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전투 장소는 점차 교토 도심을 벗어나 야마시나, 도바, 사가 등 주변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렇게 격렬했던 초반 전투 이후, 전황은 곧 교착 상태에 빠졌다. 11년이나 지속된 전쟁의 실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대규모 야전과는 상당히 달랐다. 교토의 중앙 도로를 경계로 동서로 진영이 나뉘었고, 양측은 민가와 상점을 요새화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대규모 공세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27만 명의 군사는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교토와 주변 지역을 수탈하며 군량을 확보했다. 11년 동안 교토는 끊임없는 징발과 약탈에 시달렸다. 각지에 검문소가 세워져 통행세가 징수되었고, 물자 부족으로 인한 약탈이 일상화되었다. 각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교토와 영지를 오가며 지역 전선을 확대했다. 전쟁은 교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역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전쟁은 해가 거듭될수록 지루해졌다. 다이묘들은 전투보다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지역 내 분쟁을 처리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교토에 남아 있는 군대는 약탈로 근근이 생존을 이어갔다. 1469년에는 연호가 '분메이'로 바뀌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모리 도요모토는 처음에 동군에 가담했으나, 자신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서군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편을 바꾸었다. 아사쿠라 가문도 나중에 동군으로 전향했다. 동맹은 끊임없이 재편되었지만,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1473년, 전쟁의 두 주역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3월에 야마나 소젠이, 5월에 호소카와 가츠모토가 병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죽기 전 화해를 모색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된 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시작한 장본인들이 사라진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미 전쟁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각 다이묘들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세력을 키우는 데 몰두했다. 전쟁은 더욱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1474년부터 화평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지쳐 있었다. 전쟁으로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1475년 분메이 7년에는 화목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9월에 쇼군 요시마사가 서군의 핵심인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세상무위(世上無爲)', 즉 전쟁을 멈추자는 문서를 보냈다. 12월에는 요시미가 요시마사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했고, 요시마사도 요시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답했다.
1477년 11월, 오우치 마사히로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이 갑자기 교토에서 철수하며 서군은 하루 만에 해체되었다. 전쟁을 계속할 명분도 실익도 사라진 상황이었다. 9일 후 막부는 '천하태평'을 선포하며 자축연을 열었다. 11년에 걸친 오닌의 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전쟁이 남긴 것은 폐허뿐이었다.
교토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십수 년에 걸친 전란의 중심지가 된 이 도시는 거의 전역이 잿더미로 변했다. 북쪽의 상경은 특히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화려했던 귀족들의 저택과 사원들은 불타 사라졌다. 호소카와 가문의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호소카와 가에는 옛날에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습니다. 아,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닌의 난 때 말입니다." 500년이 지난 후에도 그 피해는 여전히 가문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흥미롭게도 교토의 남쪽에 위치한 상업지구 하경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전쟁 중에도 상인들은 양측에 물자를 공급하며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난 후 오히려 상업이 번성했다. 교토를 떠난 귀족들과 장인들은 지방 도시로 흩어져 각지에 새로운 문화 중심지를 형성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 문화의 지방 확산을 가져왔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쇼군은 이제 실권 없는 명목상의 지위로 전락했다. 교토와 그 주변을 지배하는 호소카와 가문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고, 쇼군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1490년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쇼군이 되었으나, 1493년 호소카와 관령은 그를 쫓아내고 다른 아시카가 일족인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세웠다. 요시타네는 오우치 가문의 지원으로 1508년 쇼군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또 다른 다이묘 가문이 막부를 조종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지방에서는 더욱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슈고 재경제, 즉 슈고 다이묘들이 교토에 상주하며 영지를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던 체제가 붕괴했다. 1486년이 되자 교토에 남은 슈고는 호소카와 가문뿐이었다. 다른 슈고들은 영지로 돌아가거나 전쟁 중에 몰락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지에서는 슈고대나 가신들이 주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영주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바로 '하극상'이다. 아래가 위를 친다는 이 말은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신흥 세력들이 급부상했다.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전통적인 슈고 다이묘들과 구별되는 이들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부른다. 이들은 실력으로 영지를 장악한 새로운 지배자들이었다. 호조 가문은 관동을 장악했고, 모리 가문은 중국 지방을 통일해갔다. 오우치 가문은 오닌의 난을 통해 크게 성장했고, 다케다, 우에스기, 이마가와 등의 가문들도 각자의 영역을 확립했다. 일본은 사실상 여러 개의 독립국으로 분열되었다.
오닌의 난이 끝난 1477년부터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하는 1568년까지, 일본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센고쿠 시대'라 불리는 전란의 시대를 겪었다. 100여 명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패권을 다투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혼란과 파괴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력 위주의 사회로 재편되는 역동적인 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 소식은 바다 건너 조선에도 전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70년과 1473년에 오닌의 난의 개략적인 내용이, 1476년에는 상세한 내용이 조선에 전달되었다. 기록에는 "산명입도"야마나 소젠와 "세천 우경대부"호소카와 가츠모토가 난을 일으켰다고 적혀 있다. 1467년은 조선에서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였다. 세조, 예종, 성종의 치세를 거치며 조선은 내치를 다지고 있었고, 일본은 오닌의 난으로 혼란에 빠져 외부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이는 조선에게는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오닌의 난은 단순히 11년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일본의 종말이자 근세 일본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단층이었다. 혈통과 가문으로 대표되는 귀족적 질서는 무너지고, 실력과 능력이 지배하는 무사의 시대가 열렸다. 안정된 평화는 사라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영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새로운 통치 기법을 개발했고, 전쟁의 필요는 군사 기술과 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나이토 코난이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만으로 일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닌의 난은 구시대의 잔재를 완전히 소각하고, 그 재 위에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출발점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통일과 안정의 시대,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과 신분 질서,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원점에 오닌의 난이 있었다.
11년의 전쟁이 남긴 것은 폐허와 혼란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낡은 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창조적 파괴이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악의 혼란이 때로는 가장 큰 변화의 동력이 된다는 것. 오닌의 난은 그 생생한 증거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8C%EC%9D%98_%EB%82%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