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오와리 지방의 나고야성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작은 다이묘였고, 어머니는 도타 마사히데의 딸이었다. 이 아이가 오다 노부나가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아시카가 막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각지의 다이묘들이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였다. 일본 열도 전체가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하루아침에 주군이 가신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극상'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실력만이 권력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의미했다. 노부나가는 바로 이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던져진 것이다. 그에게 혈통은 출발점일 뿐, 생존의 보장은 아니었다. 오와리라는 작은 무대에서조차 수많은 적들이 그의 가문을 노리고 있었고, 어린 노부나가는 이 잔혹한 현실을 일찍부터 직시해야 했다.
어린 시절 노부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신분이 낮은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격식을 중시하는 무사 사회에서 그의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가신들은 그를 '우츠케모노', 즉 바보라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하지만 이 평가는 피상적이었다. 노부나가가 거리에서 농민들과 어울린 것은 단순한 방탕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는 성 밖의 현실, 백성들의 삶, 그리고 무사 계급이 놓치는 사회의 역동성을 직접 목격했다. 전통적인 무사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방식만을 고수할 때, 노부나가는 이미 그 한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예리함이 있었고, 그의 파격적인 행동 뒤에는 냉철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는 낡은 관습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진정한 힘은 형식이 아니라 실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1551년, 열여덟 살의 노부나가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아버지 노부히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노부나가는 또 한 번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는 아버지의 제단 앞에서 향을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고 전해진다. 무례하고 불손한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노부나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더 복잡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노부나가가 더 이상 보호받는 아들이 아니라 가문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당주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무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후견인이었던 히라테 마사히데는 몇 년 후 주군의 행실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 충직한 스승의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그를 위한 사원 세이슈지를 세워 평생 추모했다. 이는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는 노부나가의 내면에 깊은 감정과 의리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감정이 없는 냉혈한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는 깊은 애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가문을 물려받은 노부나가는 곧바로 생존의 시험대에 올랐다. 외부의 적도 많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내부의 분열이었다. 그의 동생 노부유키가 일부 가신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노렸다. 가신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노부나가를 믿을 수 없는 지도자로 여겼고, 더 '정상적'으로 보이는 동생을 선호했다. 이것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비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보수 세력의 저항이었다. 1556년, 형제간의 충돌이 현실이 되었다. 이노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동생의 군대를 격파했다. 처음에는 동생을 용서했지만, 어머니 도타 고젠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노부유키는 재차 반란을 꾀했다. 노부나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동생을 성으로 불러들여 암살했다. 이 냉혹한 결정은 노부나가의 권력관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에게 혈연은 충성보다 우선할 수 없었고, 배신자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없었다. 이 사건은 가신들에게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노부나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 심지어 혈육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1560년 5월, 노부나가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순간이 찾아왔다. 동쪽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마가와 가문은 스루가, 토토미, 미카와를 장악한 동해 지역의 강자였고, 요시모토는 천하를 호령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당대 최정예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오다 가문의 영토는 이 거대한 군대의 진로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가신들은 절망했다. 노부나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2천여 명에 불과했고, 일부는 항복을 제안하기도 했다. 수적 열세는 압도적이었고,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굴복을 거부했다. 그는 이마가와군이 오케하자마 계곡 근처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요시모토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정오, 노부나가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소수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침투했다. 빗소리에 묻혀 접근한 오다군은 이마가와 본진을 기습했다.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이마가와군은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요시모토는 자신의 천막 안에서 노부나가의 병사 모리 요시카츠와 핫토리 코헤이타에게 목이 베였다. 주군을 잃은 이마가와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스물여섯 살의 청년 다이묘가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오케하자마의 기적은 단순한 요행이 아니었다. 이것은 노부나가의 전략적 천재성, 대담함,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관습적인 전쟁 방식을 거부하고, 적의 심리를 이용했으며, 결정적 순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전투는 노부나가를 일본 전역에 알렸고, 그가 더 이상 오와리의 작은 다이묘가 아니라 천하를 다툴 자격이 있는 인물임을 증명했다.
오케하자마의 승리 이후, 노부나가는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의 속국이었던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후일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이후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동쪽을 안정시킨 노부나가는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미노 지방의 사이토 가문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노는 교토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사이토 도산은 한때 노부나가의 장인이었지만 아들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사이토 요시타츠와 그의 아들 타츠오키가 미노를 지배했다. 노부나가는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했고, 사이토 가문의 가신들을 회유하는 정치적 공작을 병행했다. 1567년, 마침내 이나바야마성이 함락되었다. 노부나가는 이 성의 이름을 기후성으로 바꾸고 자신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기후'라는 이름은 중국 고전 '주역'의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는 노부나가의 야망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기후를 차지한 노부나가는 이제 교토로 눈을 돌렸다. 당시 교토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미요시 가문과 마츠나가 가문이 권력을 다투었고, 쇼군 가문은 유명무실했다. 1565년,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가신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떠돌며 자신을 쇼군으로 옹립해줄 다이묘를 찾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요시아키를 받아들이고 그를 쇼군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순전히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노부나가에게는 교토로 진군할 명분이 필요했고, 쇼군이라는 권위는 그 명분을 제공했다. 동시에 이것은 다른 다이묘들에게 자신이 단순한 권력 찬탈자가 아니라 정통성을 지닌 쇼군을 보호하는 충신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명분일 뿐, 노부나가의 진정한 목적은 교토를 장악하고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앞세우고 교토로 진군했다. 당시 교토를 장악하고 있던 미요시 삼인중과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다군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저항을 포기했다. 노부나가는 거의 무혈로 수도를 점령했고, 요시아키는 15대 아시카가 쇼군이 되었다. 하지만 곧 명백해졌다. 진정한 권력자는 쇼군이 아니라 노부나가였다. 그는 교토와 그 주변을 장악했고, 막부의 중요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 '전하를 위한 규칙'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쇼군을 보좌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쇼군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요시아키는 점차 자신이 노부나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노부나가를 견제하려 했지만, 이미 권력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요시아키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노부나가를 포위하도록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종교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당시 일본 불교는 단순한 종교 조직이 아니었다. 거대한 사원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정토진종의 신도들로 구성된 잇코잇키는 여러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적인 전사들이었다. 노부나가에게 이들은 통일 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종교적 권위는 세속적 권력과 충돌했고, 노부나가는 어떤 권위도 자신의 위에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1570년, 노부나가는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와 전쟁을 시작했다. 혼간지는 정토진종의 본산이었고, 그 주지 켄뇨는 전국의 신도들을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길고 어려웠다. 혼간지는 천연 요새였고, 신도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전쟁은 무려 11년이나 지속되었다.
같은 해, 노부나가는 더욱 충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엔랴쿠지는 8세기부터 이어져 온 일본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천태종의 본산이었다. 수세기 동안 황실과 귀족의 보호를 받으며 막강한 권위를 쌓아온 곳이었다. 하지만 엔랴쿠지는 노부나가의 적들을 지원했고, 그의 권위에 도전했다. 노부나가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1571년 9월, 오다군은 히에이산을 포위했다. 노부나가의 명령은 명확했다. 저항하는 모든 이를 죽이라. 사원들은 불타올랐고, 승려와 신도들, 그리고 그곳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잔혹한 행위는 일본 전역에 충격을 안겼다. 신성한 사원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학살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신성모독이었다. 하지만 노부나가에게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그 누구도, 심지어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한 종교 세력조차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을. 히에이산 소각은 노부나가의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동시에 종교 권력이 정치를 좌우하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모든 종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1569년, 그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났다. 프로이스는 이후 16년간 일본에 머물며 노부나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나중에 '일본사'라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오늘날 노부나가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노부나가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전도의 자유를 허락했고, 교회 건축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영지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보호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노부나가가 기독교 교리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이것이 전략적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을 통해 노부나가는 최신 화약 무기와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조총은 노부나가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기독교를 후원하는 것은 전통 불교 세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노부나가는 항상 실용적이었고, 종교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1570년대 초반, 노부나가는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다. 쇼군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노부나가 연합을 구축하고 있었다. 북쪽의 아사쿠라 가문, 북근강의 아사이 가문, 서쪽의 혼간지, 그리고 강력한 타케다 신겐까지 노부나가를 포위하려 했다. 이른바 '노부나가 포위망'이었다. 1570년 6월, 아사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노부나가는 카네가사키에서 위기를 맞았다. 아사이 가문은 노부나가의 동맹이었고,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한 처남이었다. 하지만 아사이 가문은 전통적으로 아사쿠라 가문과 동맹 관계였고, 나가마사는 결국 혈연보다 의리를 택했다. 노부나가는 간신히 탈출했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헌신적인 후위 활동이 그를 구했다. 같은 해, 아네가와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전략적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1573년, 노부나가는 마침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했다. 요시아키는 각지의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노부나가를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노부나가는 교토를 장악하고 요시아키를 추방함으로써 아시카가 막부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1336년부터 이어져 온 아시카가 막부는 비록 오랫동안 유명무실했지만, 여전히 형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 마지막 껍데기마저 벗겨냈다. 그는 이제 어떤 전통적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실력의 지배자가 되었다. 같은 해, 노부나가의 가장 강력한 적 중 하나인 타케다 신겐이 병으로 죽었다. 신겐은 전술의 천재로 평가받았고, 그의 군대는 전국 최강 중 하나였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완패시켰고, 교토로 진군하려 했다. 만약 신겐이 살아있었다면 노부나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노부나가의 편이었다.
1575년 6월, 나가시노 평원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타케다 카츠요리, 신겐의 아들이 이끄는 군대가 나가시노성을 포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타케다 가문의 기병대는 전국에서 가장 두려운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후린카잔'(풍림화산)(바람처럼 빠르고, 숲처럼 고요하며, 불처럼 공격하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다)을 군기로 삼은 이들의 돌격은 전설이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들을 막을 새로운 전술을 준비했다. 그는 3천 정의 조총을 동원하여 목책 뒤에 배치했다. 당시 조총은 재장전 시간이 길어 실전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혁신적인 삼단 사격 방식을 고안했다. 첫 번째 열이 발사하고 뒤로 물러나 재장전하는 동안,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이 계속 발사했다. 이렇게 하면 끊임없이 총탄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타케다의 기병이 돌격하자, 노부나가의 조총대는 계획대로 사격을 개시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탄 앞에서 타케다의 기병들은 말에서 떨어졌다. 용맹한 무사들이 한 명씩 쓰러져갔고, 그들의 갑옷과 칼은 총탄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이날 타케다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많은 유력 장수들이 전사했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전쟁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화약무기가 전통적인 기마전을 완전히 압도한 순간이었고, 노부나가의 혁신적인 전술이 승리를 가져온 명백한 증거였다.
군사적 천재성과 함께 노부나가는 경제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가 점령한 각 지역에서 실시한 '라쿠이치 라쿠자' 정책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라쿠이치'는 자유 시장, '라쿠자'는 길드 폐지를 의미했다. 중세 일본의 상업은 '자'라고 불리는 독점적 상인 조합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들은 특정 상품의 판매권을 독점하고 높은 가격을 유지했다. 신규 상인들은 이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었고, 가입 조건은 엄격했다. 노부나가는 이 시스템을 해체했다. 그는 누구나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길드의 특권을 박탈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바꾸는 혁명이었다. 자유 경쟁이 도입되면서 가격은 하락했고, 상품의 다양성은 증가했으며, 경제 전체가 활성화되었다. 노부나가의 영지는 번영했고, 세수가 증가했으며, 이는 다시 군사력 강화로 이어졌다. 노부나가는 또한 도로를 정비하고 관소를 폐지했다. 중세 일본에서는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 경계에 관소를 설치하고 통행세를 징수했다. 이것은 물자의 이동을 방해하고 상업을 위축시켰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장벽을 제거하여 물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경제가 군사력의 기반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경제적 번영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능력주의는 그의 인재 등용에서도 드러났다. 전국시대는 혈통과 가문이 여전히 중요한 사회였지만, 노부나가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능력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원칙의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히데요시는 하급 무사, 어쩌면 농민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넣어 따뜻하게 해둔 일화로 유명하지만, 진정으로 그를 출세시킨 것은 탁월한 능력이었다. 히데요시는 전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외교적 수완과 행정 능력을 겸비했다. 노부나가는 그를 계속 승진시켜 결국 주요 군단을 지휘하는 지위까지 올려놓았다. 아케치 미츠히데 역시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교양과 능력으로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었다. 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 노부나가의 주요 장수들은 모두 실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능력주의는 노부나가의 조직을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노부나가 밑에서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반면 전통적인 다이묘들은 여전히 혈통에 얽매여 있었고, 이것은 그들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1576년, 노부나가는 비와호 동쪽 기슭에 새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아즈치성이었다. 이 성은 노부나가의 비전을 구현한 건축물이었다. 단순한 군사 요새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설계되었다. 7층 높이의 천수각은 금박과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외벽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내부는 당대 최고의 화가 카노 에이토쿠가 그린 벽화로 장식되었다. 용과 호랑이, 매와 소나무 등의 그림은 노부나가의 권력과 야망을 상징했다. 천수각에서는 비와호와 주변 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전망이 아니라 전략적 가치를 가진 위치였다. 성 아래에는 계획적으로 도시가 조성되었다. 노부나가는 여기에도 라쿠이치 라쿠자 정책을 적용했고, 상인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주어 정착을 장려했다. 곧 아즈치는 번화한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물자가 집결했으며, 문화가 꽃피었다. 아즈치는 노부나가가 꿈꾸는 새로운 일본의 축소판이었다.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이 아니라, 실력과 경제력이 지배하는 사회. 신분의 장벽이 낮아지고 누구나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 노부나가는 아즈치를 통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미래를 구체화했다.
1580년, 오랜 숙적 이시야마 혼간지가 마침내 항복했다. 11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것이다. 혼간지의 주지 켄뇨는 황실의 중재를 받아들여 퇴거했고, 혼간지는 노부나가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노부나가에게 중요한 승리였다. 정토진종의 저항이 종식되었고, 종교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제 노부나가 앞에 남은 주요 적은 서쪽의 모리 가문과 시코쿠의 초소카베 가문 정도였다. 천하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1582년 초, 노부나가는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쪽으로 파견되어 모리 가문을 공략하고 있었고, 시바타 카츠이에는 북쪽에서 우에스기 가문을 견제하고 있었다. 니와 나가히데와 호리 히데마사는 시코쿠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전략은 명확했다.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해 남은 적들을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었다.
5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주요 거점인 타카마츠성을 포위했다. 성은 늪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략이 어려웠다. 히데요시는 수공을 시도했다. 그는 강물을 막아 성 주변을 침수시켰다. 이 대담한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타카마츠성은 고립되었다. 하지만 모리 가문의 본대가 구원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고, 상황은 긴박해졌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직접 서쪽으로 출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선발대로 서쪽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 전에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에게는 교토에서 처리해야 할 정무가 있었고, 황실과의 의례적인 만남도 예정되어 있었다. 6월 21일, 노부나가는 교토 시내의 혼노지라는 사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소수의 수행원과 아들 노부타다뿐이었다. 경비는 느슨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믿었고, 교토 한복판에서 공격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른 새벽, 혼노지를 군대가 포위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자는 아케치 미츠히데였다. 노부나가의 유력한 가신 중 한 명이자, 그가 가장 신뢰하던 장수 중 하나였다.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여전히 역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일부 사료는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고 전한다. 어느 연회에서 노부나가가 미츠히데의 머리를 때렸다거나, 그의 어머니가 인질로 죽었을 때 그를 비난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해석은 미츠히데가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거나, 노부나가의 가혹한 통치 방식에 대한 도덕적 반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설은 쇼군 요시아키나 조정 귀족들과의 음모가 있었다고 본다. 어떤 이유였든, 미츠히데는 자신의 군대를 돌려 주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적은 혼노지에 있다"고 선언했다.
노부나가는 소란 소리에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단순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의 소행인지 물었을 때,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대라는 대답을 들었다. 노부나가는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반란이었다. 그리고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는 활을 들고 저항했다. 노부나가는 뛰어난 궁수였고, 여러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활시위가 끊어지자 창을 들었다. 팔에 부상을 입자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적은 너무 많았고, 저항은 무의미했다. 노부나가는 사원 안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부하에게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되면 그것은 전리품이 되고, 적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노부나가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하려 했다.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사십팔 세의 노부나가는 할복했다. 그의 시신은 화염 속에서 재가 되었고,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천하를 눈앞에 두고, 노부나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의 배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혼노지에서 멀지 않은 니조성에 있던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도 공격을 받았다. 그는 미츠히데의 군대와 격렬하게 싸웠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아버지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노부타다의 죽음은 오다 가문의 권력 구조에 큰 공백을 만들었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 가문과 강화를 맺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모리 가문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여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군대를 돌렸다. 히데요시가 보여준 행군 속도는 놀라웠다. '주고쿠 대회군'라고 불리는 이 이동은 군사사에서 유명한 사례가 되었다.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불과 며칠 만에 주파한 것이다. 6월 13일,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군대는 미츠히데를 격파했다. 미츠히데의 반란은 단 13일 만에 끝났다. 그는 도망치던 중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복수를 완수했고, 이를 발판으로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그의 가신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츠이에를 격파했다.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의 중신이었지만, 히데요시의 권력 장악을 막을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점차 노부나가가 정복한 영토를 통합했고, 나아가 노부나가가 미처 정복하지 못한 지역까지 평정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귀족 출신만이 가질 수 있던 직위였지만, 히데요시는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통해 이 지위를 얻었다. 1590년, 히데요시는 마지막 저항 세력인 호조 가문을 격파하고 일본 전역을 통일했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사업이 완성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방법을 계승했다. 그는 전국 규모의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신분제를 강화했으며,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 모든 것은 노부나가가 시작한 혁명의 연장선이었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이 되었고,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 막부는 1868년까지 260년 넘게 지속되었다. 에도 시대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적 번영은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라는 세 사람의 업적이 축적된 결과였다. 일본인들은 이 세 사람을 두고 유명한 비유를 남겼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답했고, 히데요시는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고 했으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세 사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노부나가의 무자비한 단호함, 히데요시의 창의적 지략, 이에야스의 인내심. 이 세 가지 자질이 결합하여 일본의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냈다.
노부나가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영토나 권력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의 경제 정책은 상업의 발전을 가져왔고, 중세 봉건제의 경직성을 완화시켰다. 자유 시장 원칙은 에도 시대에도 계승되었고, 일본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 사회에 균열을 만들었다. 비록 에도 시대에 신분제가 다시 강화되기는 했지만, 노부나가가 보여준 원칙은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의 군사 혁신, 특히 화약무기의 전략적 활용은 일본 전쟁술을 변화시켰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조총은 일본 군대의 필수적인 무기가 되었고, 전쟁의 양상 자체가 바뀌었다. 그의 종교 정책, 특히 종교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한 것은 일본에서 정교분리의 첫 걸음이었다. 에도 시대에도 종교는 정치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고, 이것은 안정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였다.
오다 노부나가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의 양면성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분명 잔혹한 독재자였다. 히에이산 학살, 이세 나가시마에서의 대량 학살, 그리고 수많은 전투에서 보여준 무자비함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그의 가혹함은 부하들에게도 향했다. 작은 실수나 불복종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의 노여움을 산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미츠히데의 반란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원한은 노부나가의 가혹한 대우에서 생겨났다. 노부나가가 부하들을 더 인간적으로 대했다면, 혼노지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노부나가는 시대를 바꾼 혁명가였다. 그는 낡은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 했다. 신분제의 경직성을 깨뜨리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했으며, 종교 권력이 정치를 좌우하는 구조를 해체하려 했다. 그의 실용주의와 능력주의는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그는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효과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새로운 전술을 실험했으며, 경제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했다. 그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재설계하려 했던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의 비전이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시작한 변화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전국시대라는 극한의 혼란 속에서, 노부나가는 생존과 권력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 시대는 자비나 관용이 약점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적에게 보여준 자비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되었고, 전통적 도덕은 현실 앞에서 무력했다. 노부나가는 이 현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했고, 그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는 관습과 전통, 도덕과 종교마저 자신의 목표 앞에서는 장애물로 여겼다. 이러한 냉혹함이 그를 시대의 승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비극적 최후를 초래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은 아이러니했다. 그토록 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들을 거두었던 노부나가가, 결국 가장 가까운 부하의 칼에 쓰러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는 혼돈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 일본의 토대를 놓았다. 그는 낡은 중세를 뒤로하고 근세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 그의 생애는 한 개인의 의지와 능력이 역사를 얼마나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렬한 증거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고, 그의 방법은 잔혹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일본의 통일은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고, 에도 시대의 평화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도덕적 판단을 거부한다. 노부나가는 선인도 악인도 아닌,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인물이었다. 혼노지의 화염 속에서 사라진 그 남자는,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거인으로 남았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영감과 경고를 동시에 전한다. 위대한 업적은 큰 희생을 요구하고, 권력의 정점은 동시에 가장 위태로운 곳이라는 것을.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8B%A4_%EB%85%B8%EB%B6%80%EB%82%98%EA%B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