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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전투-난세의 끝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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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 6월 3일 이른 새벽, 오사카성 천수각에는 서른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불과 반년 전 겨울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이곳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낭인들과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무장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 의자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23세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그 공허한 자리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는 여전히 승리를 이야기했지만, 전장의 현실을 아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장수들의 눈빛에는 이미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1614년 겨울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는 단순한 성 공방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100년 이상 지속된 전국시대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평민에서 천하인으로 올라선 하극상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1600년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실질적인 천하인이 되었다. 1603년 그는 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고, 2년 뒤에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면서 권력 승계의 정당성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흠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오사카성에 거주하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존재였다. 히데요리는 형식적으로 도쿠가와의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전 천하인 히데요시의 적자였고,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금은과 오사카성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보유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는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숫자에 속아서는 안 된다. 히데요시는 천하인 시절 쌓아둔 금은이 상상을 초월했다. 오사카성의 금고에는 일본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금과 광산에서 캐낸 금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특히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준비를 위해 비축한 군량과 무기는 수십 년간 대군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언제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전쟁 잠재력이었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도요토미의 상징적 권위였다. 매년 정월이면 히데요시의 옛 가신이었던 다이묘들과 교토의 공가들이 오사카성을 방문했고, 이는 도쿠가와 정권의 정당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였다.


이에야스는 이미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정치적 본능은 여전히 예리했다. 그는 겉으로는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도요토미 가문을 서서히 궁지로 몰아넣었다. 손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낸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다. 혈연관계로 묶어놓되,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센히메를 통해 내부 정보를 얻고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긴키 지역의 신사와 사찰들을 신설하고 수리할 것을 권했다. 천하인 아들의 위상을 세우고 부친의 업적을 기리는 명분으로 포장된 이 제안을 히데요리가 받아들이자, 도요토미의 재정은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다. 사찰 중건과 대불 조성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히데요시가 남긴 보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리고 1614년, 이에야스가 기다리던 결정적인 명분이 찾아왔다. 교토의 호코지 대불전 범종에 새겨진 문구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이 문제가 되었다. 도쿠가와 측은 이것이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어 저주하고, "도요토미(豊臣)"의 이름을 집어넣어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주술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자들이 보기에는 억지 해석이었다. 실제로 이 문구는 "나라가 평안하고 강건하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번영을 누린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축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을 결심한 이에야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히데요리가 에도로 와서 신하의 예를 갖추거나,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거나, 아니면 오사카를 떠나 시코쿠나 규슈의 변방으로 영지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모두 도요토미 가문의 자존심을 짓밟고 실질적인 권력을 무력화하는 조건들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히데요시의 아들을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조건은 도요토미 가문의 실질적 지도자인 요도도노를 볼모로 잡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조건은 경제적 기반과 상징적 거점인 오사카성을 포기하라는 것으로, 사실상 도요토미 가문을 변방의 소다이묘로 전락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도요토미 측이 이를 거부하자, 1614년 10월 이에야스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역적 토벌령"을 내렸다.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금은을 풀어 전국의 낭인들을 모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주군을 잃고 떠돌던 무사들에게 이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 새로운 주군을 섬길 기회, 그리고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 기회. 도요토미 측에 모인 낭인은 약 10만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사나다 노부시게, 조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모토쓰구,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 등 다섯 명은 "오인중"이라 불리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 전투를 통해 전설이 되었다.


사나다 가문은 본래 다케다 신겐을 섬겼던 명문이었다. 노부시게의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는 뛰어난 전략가로,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우에다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만 8천 대군을 불과 2천의 병력으로 묶어두어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 본전에 늦게 도착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는 전투 후 마사유키를 고야산으로 유배 보냈고, 그곳에서 마사유키는 1611년 사망했다. 노부시게는 그 아버지에게서 다케다 류 군학을 직접 전수받았고, 40대에 접어들어 병법과 군략이 완숙기에 달한 시점이었다. 그는 가독을 이어받은 형 노부유키와 달리 낭인 신세였지만, 그의 재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노부시게가 오사카성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잠에서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냐, 아들이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마사유키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했다는 일화는 이에야스가 사나다 가문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노부시게 개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가독도 물려받지 못한 낭인에 불과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가장 큰 판단 착오였다.


한편 도쿠가와 측은 20만 대군을 동원했다. 전국의 거의 모든 다이묘가 참전했고, 병량과 무기는 넘쳐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측에게 격문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다이묘도 오사카성에 합류하지 않았다. 오직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비밀리에 병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막부에 발각될까 두려워 소량만 보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힘을 확인한 다이묘들은 감히 이에야스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는 것은 역적이 되는 것이었고, 영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도요토미 측 내부에서는 전략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먼저 기나이 지역을 제압하고 오우미국의 세타강에 군을 진격시켜 관동에서 올라오는 막부군을 막아낸 뒤, 도요토미 편에 서는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결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핵심은 도쿠가와군이 집결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이었다. 만약 기나이를 장악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면, 다이묘들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도요토미 편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이묘들이 응하지 않는다면 그때 농성전으로 전환하면 된다는 2단계 전략이었다. 고토 모토쓰구와 모리 가쓰나가도 이가와 오쓰 북서쪽에 병력을 보내 적의 움직임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가문의 장로인 오노 하루나가를 중심으로 한 수뇌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이중 해자로 둘러싸인 오사카성의 방어력을 믿고 농성전을 선택했다. 히데요시가 쌓아올린 오사카성은 당대 최고의 축성 기술이 집약된 요새였다. 내부는 9층, 외부는 5층의 천수각이 우뚝 솟아 있었고, 성벽에는 검은 옻칠을 하고 기와와 문양에는 화려한 금박을 입혔다. 성 주변에는 이중 해자가 둘러쳐져 있었고, 설치한 외성들과 함께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오사카를 방문했던 규슈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은 삼국무쌍"이라며 찬탄했을 정도였다. 수뇌부는 이 요새에서 버티다 보면 장기전으로 가면서 도쿠가와군의 보급이 고갈되고, 결국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노부시게를 비롯한 낭인 장수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은 도요토미 가문의 첫 번째 전략적 실수였다.


1614년 11월, 도쿠가와군이 오사카성을 포위했다. 초반 전투에서 도요토미군은 주변 외성들을 하나씩 잃어갔다. 특히 키쓰가와구치 전투와 바쿠로부치 전투에서 연패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2월 4일, 전세를 뒤바꾸는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사나다마루 전투였다.


노부시게는 오사카성의 약점인 남쪽 입구를 보완하기 위해 산노마루 남쪽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사나다마루"라 불리는 별성을 건설했다. 이 성채는 둘레 1.2킬로미터에 달하는 본격적인 요새로,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적극적인 요격과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 거점이었다. 반월형으로 설계된 사나다마루는 공격해오는 적에게 삼면에서 사격을 퍼부을 수 있는 구조였다. 노부시게는 성채 안에 철포 부대를 집중 배치하고, 적이 가까이 오면 일제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사격 위치를 정밀하게 계산했다. 12월 4일, 마에다 도시츠네와 마츠다이라 다다나오가 이끄는 도쿠가와군이 사나다마루를 공격했다.


노부시게는 먼저 평원에서 적군을 도발하여 사나다마루로 유인했다. 소수의 병력을 성 밖으로 내보내 도쿠가와군을 자극하고, 그들이 추격해오면 성 안으로 후퇴하는 전법이었다. 도쿠가와군은 노부시게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사나다마루로 돌격했다. 도쿠가와군이 성채에 접근하자 철포 부대가 일제히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에치젠 마츠다이라 부대, 가가 마에다 부대,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철포 부대가 차례로 격퇴당했다. 이에야스의 손자 마츠다이라 다다나오도 사나다마루의 맹렬한 반격에 궁지에 몰렸다. 그의 부대는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마츠다이라군이 퇴각 명령을 듣지 못하자, 미우라 요에몬 휘하의 닌자 부대가 아군을 향해 화살을 쏘아 강제로 퇴각시켰을 정도였다. 단 하루 만에 도쿠가와군의 사상자는 1만 명을 넘었고, 도요토미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사나다마루의 승리로 도쿠가와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이에야스는 70대 중반의 노구였지만, 전술을 바꾸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정면 공격을 중단하고 심리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성에 포격을 가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서양 대포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영국 상인 윌리엄 애덤스와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컬버린과 세이커 등 서양식 대포를 수십 문 구입해두었다. 1614년 7월부터 애덤스가 대포와 화약을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고, 12월에는 추가로 컬버린 4문과 세이커 1문을 구입했다. 이 대포들은 당시 일본의 재래식 대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쿠가와군은 1615년 1월 8일부터 제한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포격은 1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서양식 대포의 포탄이 오사카성의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탄이 건물을 부수고 폭발하는 광경을 처음 목격한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교토의 귀족은 일기에 오사카성의 포격 소리가 교토까지 들렸다고 기록했다. 안전한 성 안에 있던 수비군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밤마다 계속되는 포격과 함성은 수비군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이에야스는 총을 쏘고 함성을 울려 마치 야습을 하는 것처럼 수비군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고, 피로가 누적되면서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월 17일,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이날은 히데요시의 기일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성 안의 사당을 찾을 것으로 예상한 도쿠가와군은 예식 시간에 맞춰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날아간 포탄 한 발이 정확하게 천수각 본채의 요도도노 거실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일설에 따르면 이 포탄이 요도도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며 주변에 있던 시녀 7, 8명이 즉사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최소한 2명 이상의 시녀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요도도노는 극심한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오사카성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마다 계속되는 포격 소리와 시녀들의 죽음은 그녀를 정신적 노이로제 상태로 몰아넣었다.


양측 모두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측은 성 안에 비축한 식량이 많았지만, 10만 명의 병력을 장기간 먹여 살리기에는 부족했다. 더욱이 농민들이 수확한 쌀을 도요토미 측에서 매점매석하는 바람에 주변 지역의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도쿠가와 측도 20만 대군을 먹여 살리는 것이 큰 부담이었고, 혹독한 겨울을 진지에서 보낸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에 화친을 제의했다. 화친 조건은 오사카성의 외성과 해자를 메우는 것이었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낭인 장수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해자와 외성이 없는 오사카성은 발가벗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방어 시설을 잃으면 농성전의 이점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음 전투에서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지금 나가서 싸우거나, 더 유리한 조건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도도노는 포격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화친을 받아들였고, 히데요리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것이 도요토미 가문의 두 번째이자 치명적인 실수였다.


화친 협정이 체결되자 도쿠가와군은 즉시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측이 스스로 이행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나선 것이다.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흙과 돌을 퍼날랐고, 불과 며칠 만에 외측 해자가 완전히 메워졌다. 심지어 합의에 없던 내측 해자와 성곽의 일부까지 파괴했다. 도요토미 측이 항의했지만 도쿠가와 측은 "합의 내용이 애매했다", "오해가 있었다"며 일축했다. 사나다마루도 철거되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는 순식간에 방어력을 상실했다. 노부시게는 자신이 피땀 흘려 쌓은 사나다마루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오는 여름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의 예감은 정확했다.


1615년 3월, 이에야스는 다시 움직였다. 도요토미 측이 해체하기로 했던 낭인들을 계속 유지하고 해자를 다시 파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실제로 도요토미 측은 발가벗겨진 성을 보고 분노하여 방어 시설을 복구하려 했고, 낭인들을 계속 고용하면서 무기까지 구입했다. 이것은 도쿠가와에게 완벽한 구실이 되었다. 오노 하루나가가 해명하기 위해 슨푸의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요구는 더욱 가혹했다.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을 떠나 지정한 영지로 이전하거나,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오사카성을 떠나는 것은 도요토미 가문의 상징적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병사를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1615년 5월, 전투가 재개되었다. 이것이 오사카 여름 전투였다.


이번에 도쿠가와군은 15만 5천 명을 동원했다. 반면 도요토미군은 5만 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성벽과 해자를 잃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주민과 병사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병력비는 3:1로 더욱 불리해졌고, 방어 시설마저 없었다. 5월 6일, 야오·와카에 전투가 벌어졌다. 기무라 시게나리가 이끄는 6천 명과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이끄는 5천 3백 명이 교토에서 오사카성으로 향하던 도쿠가와군 본대 12만 명과 맞붙었다.


키무라 시게나리는 오사카 겨울 전투 때 화친 맹세서에 이에야스가 피를 너무 연하게 묻혔다며 다시 묻히게 했던 인물로, 그 대담함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야오에서 도쿠가와군의 선봉 이이 나오타카 부대와 충돌했다. 키무라군은 맹렬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와카에에서 싸운 조소카베 모리치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대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포위당했다. 키무라 시게나리는 전투 중에 총상을 입고 낙마했으며, 근처 민가로 옮겨졌으나 그곳에서 자결했다.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교토로 도망쳤으나 붙잡혀 참수당했다. 두 장수의 죽음으로 도요토미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야오와 와카에 방어선이 무너졌다.


같은 날, 사나다 노부시게도 도쿠가와군과 격전을 벌였다. 해자가 사라진 이상 정면 승부밖에 없었다. 노부시게는 1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철포 부대와 맞섰다. 다테 마사무네는 도호쿠의 강호로 "독안룡"이라 불리던 명장이었다. 그의 기마철포 부대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총을 쏘는 기동력과 화력을 겸비한 정예 부대였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긴창 부대를 매복시켜 기마대를 격파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말이 접근하면 긴 창으로 말의 다리를 찌르고 기수를 떨어뜨리는 전술이었다. 그는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선봉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다테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뿐이었다. 도쿠가와군의 증원 부대가 계속 밀려왔고, 사나다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5월 7일, 최후의 전투가 텐노지에서 벌어졌다. 전날 밤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열린 작전 회의는 절망적이었다. 이제 5만 4천 명만이 남았고, 대부분의 외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도요토미군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이에야스의 본진을 직접 노리는 것이었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모리 가쓰나가가 15만 명의 도쿠가와군을 붙잡아두는 동안, 아카시 모리시게가 해안을 따라 우회하여 이에야스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조소카베의 잔여 병력이 협공하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수비로는 이길 수 없었고, 도망칠 곳도 없었다.


새벽 4시, 도요토미군이 먼저 움직였다. 오노 하루후사가 이끄는 부대가 도쿠가와군의 전방을 공격하여 주의를 끌었다. 이어서 모리 가쓰나가, 고토 모토쓰구, 마에다 게이지 등이 차례로 돌격했다. 그러나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도쿠가와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조직력 앞에서 도요토미군은 서서히 무너졌다. 고토 모토쓰구는 마츠다이라 다다나오의 에치젠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적진을 향해 걸어가며 싸우다가 철포에 맞아 쓰러졌다. 모리 가쓰나가도 혼다 다다토모의 부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했다.


이때 노부시게는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직속 부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진을 향해 필사의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사나다 부대는 도쿠가와군의 중심을 향해 돌진했다. 첫 번째 돌격에서 그들은 마츠다이라 다다나오의 부대를 뚫었다. 두 번째 돌격에서는 혼다 다다토모의 부대를 격파했다. 세 번째 돌격에서 마침내 이에야스의 본진에 도달했다. 도쿠가와군의 본진이 뚫렸고, 총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마인이 짓밟혔다. 호위병들이 패닉에 빠졌고, 이에야스는 말에서 내려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의 곁에 있던 신하들은 이에야스에게 자결을 권했다. 이것은 젊은 시절 다케다 신겐에게 참패했던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후 두 번째로 이에야스가 죽음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숫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주변의 도쿠가와군 부대들이 사나다 부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적이 밀려들었고, 사나다군은 점차 고립되었다. 노부시게의 부하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노부시게 자신도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텐노지 근처의 안요지라는 작은 사찰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상처를 가다듬고 있을 때, 마츠다이라 다다나오의 부하 니시오 니자에몬이 추격해왔다. 이미 기력이 다한 노부시게는 "나는 사나다 노부시게다. 내 목을 가져가라"고 말하고 목을 내밀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의 아들 사나다 다이스케도 같은 날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나다 가문의 두 영웅이 함께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오후 3시경, 도요토미군은 완전히 괴멸했다. 도쿠가와군이 물밀듯이 오사카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츠다이라 다다나오의 에치젠군이 첫 진입의 공을 세웠다. 성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자살하는 자, 목이 잘리는 자, 도망치는 자로 가득했다. 낭인들은 최후까지 저항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성의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천수각도 불에 타기 시작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모자는 성 안 창고로 피신했다.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히데요리의 아내인 센히메는 할아버지에게 남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탄원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에야스가 처음에는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태도를 바꿨다. 히데요리가 살아있는 한 도요토미 가문을 따르는 세력이 다시 모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자결했다. 히데요리의 나이 23세, 요도도노는 46세였다.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은 단 2대 만에 멸망했다. 히데요리의 8세 된 아들 도요토미 구니마츠는 교토에서 붙잡혀 6월 19일 교토의 로쿠조카와라에서 처형되었다. 도요토미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오사카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숙적을 제거했다. 그는 전투 직후 도요토미 가문의 잔존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다. 도요토미 편에 섰던 낭인들은 사면 없이 숙청되었다. 오사카성에서 탈출한 자들도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져 하나씩 붙잡혔다. 오사카성은 불타올랐고,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재건되어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건설했던 화려한 금빛 천수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검소하고 실용적인 성곽이 들어섰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를 통해 단순히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는 곧바로 다이묘들의 반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먼저 "일국일성제"를 실시하여 각 영지에 성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하도록 강제했다. 이것은 다이묘들이 군사력을 키울 수 없게 만드는 조치였다. 전국 각지에 있던 수백 개의 성이 파괴되었고, 다이묘들은 단 하나의 거점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가제법도"를 제정하여 사무라이 계급의 권한과 의무를 법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다이묘들은 막부의 허가 없이 성을 수리하거나 혼인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막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하며,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해야 했다. 이 법은 사무라이를 전사에서 관료로 변모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통제 수단으로 "참근교대제"를 도입했다. 다이묘들은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근무해야 했고, 영지에 있을 때는 가족이 에도에 인질로 머물러야 했다. 260여 명의 다이묘가 2년마다 수백에서 수천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에도를 오가면서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여행 경비, 에도 저택 유지비, 수행원 급여 등을 합치면 다이묘 재정의 상당 부분이 소진되었다. 이것은 다이묘들의 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도로와 도시를 발전시켜 유통 경제를 활성화하는 이중 효과를 낳았다. 에도와 각 영지를 잇는 고카이도(五街道)가 정비되었고, 길을 따라 숙박 시설과 상점이 들어섰다. 참근교대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고, 이것은 막부의 권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다이묘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의례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또한 "겐나 엔부"를 선포했다. 이것은 "평화의 시대"를 의미하는 말로, 이후 에도 막부는 260년 동안 대규모 전쟁 없이 안정된 통치를 이어갔다. 전국시대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던 전쟁은 완전히 멈췄다. 이 긴 평화는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무사 계급은 전쟁터의 전사에서 행정가로 변모했다. 칼은 장식이 되었고, 검술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었다. 상업과 문화가 꽃피었다. 에도는 인구 100만을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고, 조닌(町人) 계급이 경제력을 장악했다. 우키요에, 가부키, 하이쿠 같은 대중문화가 발전했고, 데라코야(寺子屋)라는 서당이 전국에 퍼지면서 식자율이 급상승했다. 18세기 에도의 식자율은 70%를 넘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오사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하극상과 실력주의의 시대가 끝나고 신분제와 질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상징했던 "실력만 있으면 천하를 잡을 수 있다"는 전국시대의 이념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히데요시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천하인이 되었다. 그는 능력과 야심으로 신분의 벽을 넘었고, 전국시대는 그런 것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권력은 혈통과 제도에 의해 승계되었고, 개인의 무용이나 책략은 더 이상 시대를 바꿀 수 없었다. 에도 막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를 확립했다. 무사는 무사로, 농민은 농민으로 태어나고 죽었다. 신분 이동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사나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도요토미 편 낭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구시대의 마지막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명예를 위해 승산 없는 전투에 뛰어들었고, 화려하게 산화했다. 특히 노부시게는 이에야스를 거의 죽일 뻔한 맹렬한 돌격으로 전설이 되었다. 에도 시대 내내 그에 관한 이야기는 강담과 소설로 각색되어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18세기에 출판된 "사나다 삼대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가부키 무대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반복해서 공연되었다. 흥미롭게도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강담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미 전국시대는 끝났고,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막부는 노부시게 같은 영웅담을 통해 무사의 충성심과 명예를 강조하는 교육적 효과를 얻었다.


1615년 6월 4일, 오사카성에서 마지막 불길이 꺼졌을 때, 일본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100년 이상 계속된 전란의 시대는 끝났고, 260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께 전국시대의 꿈도 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 1년 뒤인 1616년 4월 17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평생을 인내하며 기다렸고, 마침내 천하를 완전히 장악했지만, 그가 누린 완전한 평화는 단 1년에 불과했다. 그가 평생 두려워했던 사나다 노부시게의 마지막 돌격이 그의 건강에 치명타를 입혔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고, 위장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부 기록은 그가 사나다 부대의 돌격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지병을 악화시켰다고 전한다.


이에야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는 도쇼구 신사를 닛코에 세우게 했고, "도쇼다이곤겐"이라는 신의 지위를 받았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도쿠가와 정권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천황조차도 "신의 후손"이 세운 막부에 함부로 도전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닛코 도쇼구는 화려한 건축과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도쿠가와의 권위를 과시했다.


오사카 전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사 계급의 정체성 변화였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전장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행정 관료가 되었고, 유교적 교양을 쌓으며 검술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전국시대의 야만적이고 실용적인 전투 기술은 점차 형식화되고 의례화되었다. "부시도"라는 무사도덕도 실제로는 에도 시대에 정립된 이념이었다. 야마가 소코, 야마모토 쓰네토모 같은 유학자들이 전쟁이 없는 시대에 무사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철학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배신도 불사했고, 주군을 바꾸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부시도는 절대적 충성과 명예를 강조했다. 이것은 평화로운 시대에 무사 계급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오사카성은 이후 재건되어 도쿠가와 막부의 서쪽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건설했던 원래의 오사카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새로 지어진 성은 이전보다 작고 소박했다. 천하의 요새는 이제 필요 없었다. 전쟁의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성곽 건축 기술은 점차 쇠퇴했고, 일본의 성들은 실전용 요새에서 다이묘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변모했다.


오사카 전투에서 싸웠던 낭인들의 후예 중 일부는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다. 특히 사나다 가문은 노부시게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가 우에다성을 회복하고 마츠시로로 영지를 옮겨 메이지 유신까지 가문을 유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부시게와 달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섰던 형의 선택이 가문을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기억 속에서 영웅은 노부유키가 아니라 노부시게였다. 사람들은 승리한 현실주의자보다 패배한 이상주의자를 더 사랑했다.


에도 시대 민중 사이에서는 "오사카 전투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붉은 갑옷, 요도도노의 완고함, 히데요리의 비운, 이에야스의 교활함은 강담과 가부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특히 노부시게는 "일본 제일의 병(日本一の兵)"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전설적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이 칭호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노부시게를 평가하며 한 말로 전해진다. 에도 막부는 이런 이야기들을 묵인했다. 이미 도쿠가와의 지배는 확고했고, 과거의 영웅담은 민중의 오락거리일 뿐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50년 후, 메이지 유신이 도래했을 때, 오사카 전투의 기억은 다시 정치적 의미를 얻었다. 막부 타도 세력은 자신들을 "도쿠가와의 독재에 맞서는 의로운 싸움"으로 포장하며 사나다 노부시게 같은 전국시대 영웅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역설적이게도 이에야스가 완벽하게 종식시켰다고 믿었던 전국시대의 정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변형된 형태로 근대 일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오사카성은 일본 굴지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히데요시와 히데요리의 이야기를 듣는다. 성 남쪽에는 사나다마루가 있던 자리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텐노지 공원에는 사나다 노부시게의 동상이 서 있다. 2016년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는 전국 시청률 16.6%를 기록하며 노부시게 열풍을 다시 일으켰다. 드라마는 노부시게를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가이자 인간적인 고뇌를 가진 인물로 그려냈다.


오사카 전투는 단순한 성 공방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혼란과 기회의 시대가 끝나고 질서와 안정의 시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이었다. 능력 있는 자가 출세할 수 있었던 역동적인 시대는 막을 내렸고, 신분이 고정되고 평화가 지속되는 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진보였는지 퇴보였는지는 간단히 판단할 수 없다. 260년의 평화는 문화와 경제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회적 유동성을 봉쇄하고 계급을 고착화했다.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지만, 히데요시의 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평민에서 천하인으로 올라선 이야기는 에도 시대 내내 민중의 희망이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입신출세"라는 근대적 가치로 재해석되었다.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자로서 일본을 260년간 지배했지만,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교활한 권모술수가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는 승자가 쓰지만, 이야기는 때로 패자의 편에 선다.


1615년 6월 3일 새벽, 사나다 노부시게가 붉은 갑옷을 입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을 때, 그는 이미 패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무사의 명예였고, 전국시대의 정신이었다. 그의 돌격이 실패로 끝났을 때, 100년 전국시대의 막도 함께 내렸다. 오사카성의 화염 속에서 한 시대가 완전히 소멸했고, 새로운 시대가 그 재 위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오사카 전투가 일본 역사에 남긴 흔적은 단순히 정치적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이 전투는 일본인의 집단 기억 속에서 여러 겹의 의미를 축적해왔다. 승자인 도쿠가와에게는 천하 통일의 완성이자 평화의 시작이었고, 패자인 도요토미에게는 비극적 몰락이자 하극상 시대의 종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전투는 단순한 승패를 넘어선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흔적은 체계적으로 지워졌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후시미성은 파괴되었고, 그가 세운 다이코묘진 신사도 철거되었다. 심지어 그의 신격화마저도 취소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승자의 보복이 아니라, 도요토미 시대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노력은 오히려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권력을 잃은 패자는 신화가 되었고, 특히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은 히데요리는 후대 문학과 예술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오사카 전투는 점차 낭만화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독본(読本)과 가부키는 전투의 비극적 측면을 강조하며 민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특히 사나다 노부시게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충신"의 전형으로 각색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막부가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노부시게의 충성은 무사가 본받아야 할 덕목으로 장려되었다. 패배했지만 끝까지 주군을 배신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에도 막부의 지배 이념인 "충성"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오사카 전투의 해석은 다시 변화했다. 근대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역사 서사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정벌하려 했던 영웅"으로 재평가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황의 권위를 가린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오사카 전투는 "정당한 정권을 찬탈한 반역"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런 역사관은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또 다시 해석이 바뀌었다. 전후 일본은 평화를 강조하며 전국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에도 시대를 평화와 문화의 시대로 재평가했다. 오사카 전투는 "전쟁의 종식"이자 "평화의 시작"으로 긍정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다시 "평화를 가져온 현실주의자"로, 히데요리는 "시대에 뒤처진 비극적 인물"로 그려졌다.


현대 일본에서 오사카 전투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를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점으로 분석한다. 대중문화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 같은 영웅을 통해 잃어버린 무사의 정신을 그려낸다. 관광 산업은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상품화한다. 각각의 시선이 다르지만, 모두 오사카 전투를 일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인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사카 전투가 남긴 또 다른 유산은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가치에 대한 성찰이다. 260년의 평화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사카 전투의 참혹한 경험과 이에야스의 치밀한 제도 설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일국일성제, 참근교대제, 무가제법도 같은 제도들은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에 대한 충성을 강제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제도들은 전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다이묘들이 에도를 오가면서 도로가 정비되었고, 역참이 발달했다. 이것은 상업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고, 결과적으로 일본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평화는 또한 문화적 황금기를 가져왔다. 전쟁이 없는 시대에 무사들은 문치주의로 전환했고, 유학을 공부하며 행정 능력을 키웠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조닌 계급이 성장했고, 그들은 새로운 문화의 주역이 되었다. 우키요에는 서민들의 일상과 미의식을 표현했고, 가부키와 분라쿠는 대중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는 일본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았다. 이런 문화적 성취는 전쟁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긴 평화는 동시에 정체를 낳았다.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펼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신분제는 점점 더 경직되었고, 사회적 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무사들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군사력은 쇠퇴했다.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도래했을 때, 일본은 그들에게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60년의 평화가 만들어낸 안정된 사회는 동시에 변화에 취약한 사회이기도 했다.


오사카 전투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대부분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딸은 시나노의 사찰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내 센히메는 전투 후 구출되어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중에 혼다 타다토키와 재혼했고, 70세까지 장수했다. 그러나 오사카 전투의 기억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고 전해진다. 남편과 어머니가 자결하는 광경을 목격한 트라우마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낭인들 중 일부는 시마바라의 난(1637-1638)에 가담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지배에 대한 마지막 무장 저항이었다. 그러나 막부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었고, 3만 7천 명의 반란군이 전멸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까지 대규모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사카 전투가 전국시대를 완전히 종식시켰다면, 시마바라의 난은 전국시대적 저항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한 장을 넘겼다. 오사카성의 화염이 꺼진 곳에서 새로운 일본이 탄생했다. 그것은 전쟁 없는 일본, 안정된 일본, 그러나 동시에 변화가 억제된 일본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꿈꾸었던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는 사라졌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날 우리가 오사카 전투를 돌아볼 때, 단순히 승자와 패자의 이야기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돌격은 실패했지만, 그의 용기는 400년이 넘도록 기억되고 있다.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지만, 히데요시의 업적은 여전히 일본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리했지만, 그가 만든 체제도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무너졌다.


역사에는 완벽한 승자도, 완벽한 패자도 없다. 오직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한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오사카 전투는 그런 의미에서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고, 패배한 자들의 명예와 승리한 자들의 책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권력과 충성, 전쟁과 평화, 변화와 안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8%A4%EC%82%AC%EC%B9%B4%20%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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