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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260년 평화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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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10월 21일 새벽, 세키가하라의 들판을 짙은 안개가 뒤덮었다. 동서로 나뉜 10만 대군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군을 이끄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였고, 동군의 중심에는 노련한 전략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었다. 전투는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끝났다. 결정적 순간은 서군의 핵심 병력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며 동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이 배신으로 서군은 무너졌고, 도망치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사흘 후 붙잡혀 교토에서 참수당했다. 세키가하라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 년 이상 계속된 전국시대의 종언이자, 일본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승리 후 이에야스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는 곧바로 쇼군 직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먼저 적대적이었던 다이묘들의 영지를 재배치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자신을 지지한 후다이 다이묘들을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하고, 적이었던 도자마 다이묘들은 멀리 서쪽이나 북쪽으로 밀어냈다. 오사카성에는 여전히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살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아들이자 명목상의 일본 지배자였다. 이에야스는 그를 당장 제거하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정당성을 쌓아갔다. 1603년, 천황은 마침내 이에야스를 세이이타이쇼군, 즉 정이대장군에 임명했다. 이것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임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불과 2년 후인 1605년, 쇼군 직위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은 교묘한 계산이었다. 쇼군 직위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임을 명확히 하면서도, 자신은 오고쇼, 즉 은퇴한 쇼군으로서 실권을 계속 쥐었다.


1614년, 이에야스는 마침내 도요토미 가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구실은 교토의 호코지 사원에 세운 종의 명문이었다. "国家安康 君臣豊楽"이라는 문구가 이에야스의 이름을 쪼개놓고 도요토미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억지스러운 명분이었지만, 이에야스에게는 핑계만 있으면 충분했다. 오사카 겨울의 진과 이듬해 여름의 진, 두 차례 공성전 끝에 오사카성은 함락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는 자결했다. 이제 도쿠가와 가문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1616년 4월, 이에야스는 73세의 나이로 스루가의 순부성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을 도쇼다이곤겐, 즉 동쪽을 비추는 대권현으로 신격화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닛코에 세워진 그의 영묘는 화려함의 극치였고, 후계자들은 매년 그곳을 참배하며 도쿠가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이에야스의 손자 이에미쓰가 1623년 쇼군에 오르면서 막부 체제는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에미쓰는 할아버지보다 더 단호하고 체계적이었다. 1635년, 그는 무가제법도를 개정하며 산킨코타이 제도를 공식화했다. 이제 모든 다이묘는 1년마다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오가며 쇼군을 알현해야 했다. 규모가 큰 번일수록 더 많은 수행원을 동반해야 했다. 가가 번의 마에다 도시쓰네는 4천 명의 행렬을 이끌고 가나자와에서 에도까지 10일간 행군했다. 행렬에는 창과 총으로 무장한 무사들, 짐을 나르는 하인들, 요리사, 의사, 심지어 정원사까지 포함되었다. 도카이도를 따라 53개의 숙박 마을이 발달했고,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훗날 이 풍경을 목판화로 남겼다. 경제적 효과는 막대했다.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은 연간 수입의 3분의 1을 산킨코타이에 썼다. 다이묘들은 군대를 키우는 대신 행렬을 꾸미는 데 돈을 써야 했다. 반란을 위한 자금은 도로 위에서 소진되었다.


에도에 머무는 동안 다이묘들은 막부가 배정한 저택에서 살았다. 이 저택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다이묘가 영지로 돌아갈 때는 부인과 자녀들이 인질로 남았다. 공식적으로는 "인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모두가 실상을 알았다. 하코네와 우스이 같은 주요 관문에는 세키쇼, 즉 검문소가 세워졌다. "나가는 총, 들어오는 여자"를 단속한다는 명목이었다. 다이묘들이 무기를 에도 밖으로 빼돌리는 것, 그리고 인질로 잡힌 여성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형식적으로 충성의 의례였던 산킨코타이는 실제로는 정교하게 설계된 통제 메커니즘이었다. 다이묘들은 쇼군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가족을 잃을 것이고, 반란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막부의 통제는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단순한 직업 구분이 아니라 철저한 계급 체계였다. 맨 위에는 사무라이가 있었다. 전체 인구의 7퍼센트에 불과했지만, 그들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고, 두 자루의 칼을 찰 권리가 있었으며, 기리스테고멘, 즉 무례한 평민을 베어 죽일 권리까지 가졌다. 농민은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들은 쌀을 생산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조와 보리로 연명했다. 막부와 다이묘는 농민이 "죽지도 살지도 못할 만큼" 세금을 거두라고 지시했다. 너무 여유로우면 반란을 일으키고, 너무 궁핍하면 생산이 떨어진다는 계산이었다. 공인, 즉 장인들은 기술자로서 어느 정도 존중받았다. 도검 제작자, 도자기 장인, 칠기 명인들은 다이묘의 보호를 받았다. 가장 아래에는 상인이 있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이익만 취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천시받는 계층이 에도 시대의 실질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


1637년, 막부의 통제 시스템은 첫 번째 중대한 시험을 맞았다. 규슈 남서부의 시마바라 반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농민 봉기였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반란이었다. 이 지역은 16세기 후반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었고, 많은 주민이 기독교도였다. 가혹한 세금과 종교 탄압이 결합되면서 폭발한 것이었다. 반란군을 이끈 것은 아마쿠사 시로라는 16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고, 추종자들은 그를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로 믿었다. 반란군 3만 7천 명은 하라성 폐허에 농성했다. 막부는 12만 대군을 보냈다. 포위는 네 달간 계속되었다. 식량이 떨어진 성 안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1638년 4월, 막부군이 최종 공격을 개시했을 때, 성 안의 모든 사람이 학살당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종교가 얼마나 위험한 동원 도구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난이 진압된 직후, 막부는 쇄국 정책을 완성했다.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듬해 포르투갈은 사절단을 보내 관계 회복을 시도했지만, 사절 61명 중 57명이 참수당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일본은 외부 세계와 단절한다. 일본인의 해외 도항은 사형으로 다스려졌고, 이미 해외에 나가 있던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되었다. 동남아시아 각지의 일본인 마을에 살던 수천 명은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외국 무역은 나가사키 항의 데지마라는 작은 인공섬으로 제한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만이 교역을 허가받았다. 네덜란드인들은 기독교 선교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막부는 그들을 통해 최소한의 서양 정보를 얻었다. 중국 상인들도 나가사키에서 무역할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데지마에 격리되었다. 일본은 거대한 섬나라 전체를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쇄국이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장에게 매년 "오란다후세쓰가키"라는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것은 세계 정세, 과학 기술, 의학 발전에 관한 정보였다. 쇼군과 로주, 즉 막부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이 보고서를 주의 깊게 읽었다. 난학, 즉 네덜란드 학문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이 등장했다.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을 번역하여 1774년 "해체신서"를 출간했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서 번역본이었다. 막부는 서양 지식의 유입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외부 세계를 알아야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 속에서, 놀랍게도 일본 문화는 꽃을 피웠다. 17세기 후반 교토와 오사카에서는 겐로쿠 문화가 만개했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상인들의 삶을 다룬 소설 "호색일대남"을 썼다. 주인공 요노스케는 7세부터 여성을 탐하기 시작해 일생 동안 3,742명의 여성과 725명의 소년을 상대한다는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는 당대 상인 계층의 욕망과 가치관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마쓰오 바쇼는 하이쿠를 단순한 말장난에서 심오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는 일본 전역을 여행하며 자연과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17음절에 담아냈다. "여름 풀이여 / 무사들의 꿈 / 그 자취"라는 시는 영광과 좌절, 역사의 무상함을 단 세 행으로 표현했다. 지카마쓰 몬자에몬은 닌조와 기리, 즉 인간적 감정과 사회적 의무 사이의 갈등을 다룬 조루리 극본을 썼다. "소네자키 신주"는 신분 차이 때문에 결합할 수 없는 연인들이 동반 자살하는 이야기였는데, 공연 후 실제로 모방 자살이 속출하여 막부가 공연을 금지할 정도였다.


18세기 에도에서는 서민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720년대 에도의 인구는 백만을 넘어섰다. 런던이 60만, 파리가 50만이었던 시대에 에도는 세계 최대 도시였다. 인구의 절반이 남성이었다. 산킨코타이로 전국에서 무사들이 몰려왔고, 건설 노동자, 상인, 장인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 남성들을 위한 환락가가 발달했다. 요시와라는 에도 북쪽에 있는 공인된 유곽이었다. 3천 명 이상의 유녀들이 일했고, 그 중 최고위 오이란들은 단순한 창녀가 아니라 교양 있는 예술가였다. 그들은 다도, 서예, 음악에 통달했고, 고객들과 문학과 철학을 논했다. 요시와라는 "떠다니는 세계", 즉 우키요였다. 일상의 질서와 도덕이 정지된 환상의 공간이었다. 우키요에, 즉 이 세계를 묘사한 목판화가 대중 예술로 자리 잡았다. 기타가와 우타마로는 미인도로 유명했고, 그의 판화 속 여성들은 우아하고 관능적이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후가쿠 36경"으로 후지산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가나가와 해변의 큰 파도"는 서양에 전해져 모네와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었다.


에도의 서민들은 가부키에 열광했다. 나카무라자, 이치무라자, 모리타자라는 세 극장이 공인되었고, 공연은 아침 일찍 시작해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관객들은 도시락과 술을 가져와 하루 종일 극장에 머물렀다. 스타 배우들은 우상이었다. 이치카와 단주로 가문은 대대로 아라고토, 즉 과장되고 역동적인 연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막부는 가부키를 위험시했다. 배우들이 너무 인기가 많았고, 극장은 신분의 경계가 흐려지는 공간이었다. 막부는 반복적으로 규제를 가했다. 배우들은 천민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극장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인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규제는 가부키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무대에 서는 것이 금지되자 온나가타, 즉 여형이 발달했다. 남자 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기술은 극도로 세밀해졌고, 일부 온나가타는 무대 밖에서도 여성으로 생활했다.


서민들의 일상에는 센토, 즉 대중 목욕탕이 중심이었다. 에도에는 수백 개의 센토가 있었고, 사람들은 날마다 목욕했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기준으로는 이례적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도 욕실이 없던 시대였다. 센토는 단순히 씻는 곳이 아니라 사교의 공간이었다.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혼욕이 일반적이었고, 사람들은 목욕탕에서 소문을 나누고, 사업 거래를 논의하고, 결혼 중매를 했다. 막부는 여러 차례 혼욕을 금지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습관을 법으로 바꾸기는 어려웠다. 서민들은 또한 음식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스시는 원래 보존 식품이었지만, 에도 시대에 패스트푸드로 변신했다. 하야시조시가 1820년대 도쿄만에서 잡은 생선으로 니기리즈시를 팔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포장마차에서 서서 먹었다. 소바 역시 빠르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국수였다. 에도의 거리에는 소바 행상인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번영의 이면에는 모순이 쌓이고 있었다. 막부가 설계한 농업 기반 사회는 상업 경제로 변모하고 있었다.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며 일본 경제의 중심이었다. 전국의 쌀이 오사카로 모였고, 도지마 쌀 시장에서는 세계 최초의 선물 거래가 이루어졌다. 거래는 실물 쌀이 아니라 쌀 창고 증권으로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미쓰이 가문은 에도와 교토에 에치고야라는 포목점을 열었고, 정찰제와 현금 거래라는 혁신적 판매 방식으로 성공했다. 코노이케 가문은 금융업으로 부를 쌓았다. 그들은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막부에도 융자를 제공했다. 신분상으로는 최하층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을 좌우했다.


다이묘들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산킨코타이 비용, 에도 저택의 유지비, 막부가 명령하는 토목 공사 부담금이 쌓였다.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 재건에 동원된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다이묘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렸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부 번은 상환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채무를 탕감했다. 이것은 실질적인 디폴트였다. 사무라이들의 처지는 더욱 곤란했다. 평화가 계속되면서 무사들은 전사에서 관료로 변했다. 그들은 번의 행정, 회계, 사법을 담당했다. 그러나 녹봉은 고정되어 있는 반면 물가는 상승했다. 많은 하급 무사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부업으로 우산을 만들거나, 제등을 만들거나, 개인 교습을 했다. 사무라이의 딸이 상인의 집에 유모로 들어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신분과 경제력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졌다.


18세기 후반, 자연재해가 이 불안정한 구조를 흔들었다. 1782년부터 1788년까지 계속된 천명 대기근은 재앙이었다. 아사마 산의 분화로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었고, 이상 저온으로 흉작이 계속되었다. 도호쿠 지방은 특히 심각했다. 사람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식인까지 보고되었다. 추정 사망자는 92만 명이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없었다. 막부와 번들은 세수 감소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유민들이 급증했다. 에도와 오사카 외곽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면서 잇키, 즉 농민 봉기가 폭발했다. 막부는 전통적 해법으로 대응했다. 더 엄격한 통제, 더 세밀한 규제였다.


1787년,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간세이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유학자였고, 사회의 타락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개혁의 핵심은 검약과 복고였다. 사치 금지령이 공포되었고, 고급 요리, 화려한 옷, 값비싼 장신구가 금지되었다. 출판 검열이 강화되어 야한 소설과 춘화가 단속되었다. 유녀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제한되었다. 사다노부는 또한 농민들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개혁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규제를 피하는 방법을 찾았다. 금지된 호화로운 비단 대신, 안감에 비싼 천을 사용했다. 겉은 소박해 보이지만 안은 화려한 이중성이 에도 서민들의 미의식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간세이 개혁은 구조적 문제를 도덕적 훈계로 해결하려는 시도였고, 작동할 수 없었다. 사다노부는 1793년 실각했고, 그의 개혁은 대부분 폐지되었다.


19세기 초, 외부 세계가 일본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792년, 러시아의 아담 락스만이 홋카이도 네무로에 나타났다. 그는 표류한 일본인들을 송환하며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거절했지만, 러시아의 존재는 위협이었다. 1804년, 러시아 사절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 왔지만 6개월간 대기한 끝에 빈손으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보복으로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일본 거점을 공격했다. 1808년, 영국 군함 페이턴호가 나가사키 항에 무단 진입하여 네덜란드 선원 두 명을 납치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 네덜란드가 프랑스 편에 섰기 때문에, 영국은 네덜란드 선박을 적으로 간주했다. 막부는 무력했다. 나가사키 부교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1824년, 영국 포경선이 이바라키 해안에 상륙하여 물과 식량을 요구했다. 막부는 1825년 이양선 격퇴령을 공포했다. 접근하는 모든 외국 선박을 경고 없이 포격하라는 명령이었다.


1837년, 미국 상선 모리슨호가 일본에 접근했다. 배에는 표류했던 일본인 어부 7명이 타고 있었다. 선장은 이들을 송환하고 통상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막부는 에도만 입구에서 모리슨호를 포격했다. 배는 가고시마로 향했지만, 거기서도 포격을 받고 물러났다. 이 사건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와타나베 가잔과 다카노 조에이 같은 난학자들은 막부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들은 세계 정세를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막부는 이를 반역으로 규정했다. 1839년 만사의 옥으로 알려진 탄압이 시작되었다. 와타나베 가잔은 가택 연금되었고, 다카노 조에이는 투옥되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막부는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제 자체가 사라진다고 믿는 듯했다.


1840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일본에 경종을 울렸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대국이 서양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소식은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다. 일부 지식인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가 번의 나베시마 나오마사 같은 개혁적 다이묘들은 서양 군사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반사로라는 용광로를 건설하여 대포를 주조했고,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했다. 그러나 막부 중앙은 여전히 안이했다. 일본은 중국이 아니라고, 쇄국 정책이 일본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은 막부의 편이 아니었다.


1853년 7월 8일, 운명의 날이 왔다. 아침 일찍 우라가 앞바다를 지키던 어부들이 수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곧 네 척의 거대한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증기선이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배를 본 적이 없었다. 바람 없이 움직이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 배는 마치 살아있는 괴물 같았다. "구로후네", 검은 배라고 불렀다. 사람들 사이에는 "지옥에서 온 배"라는 소문이 퍼졌다.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였다. 페리는 군인답게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는 일본에 오기 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했고, 1846년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비들 제독의 실패를 연구했다. 그는 위압적으로 행동하되, 무력 사용은 최소화하기로 결정했다.


페리의 함대는 우라가에 정박하지 않고 에도만 깊숙이 진입했다. 이것은 의도적인 위협이었다. 쇼군의 거처가 있는 에도에서 불과 30킬로미터 거리였다. 막부는 당황했다. 관리들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돌아가라고 요구했지만, 페리는 하급 관리와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를 쇼군에게 직접 전달하겠다고 했다. 일주일간의 실랑이 끝에 막부는 굴복했다. 7월 14일, 구리하마 해변에서 전달식이 거행되었다. 페리는 300명의 무장 수병과 함께 상륙했다.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했고, 미국 국기가 일본 땅에 처음으로 펄럭였다. 막부 관리들은 국서를 받았다. 페리는 1년 후에 답변을 받으러 돌아오겠다고 통보하고 떠났다. 그가 떠난 지 한 달 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사망했다. 그는 12대 쇼군으로 재위 중이었고, 그의 죽음은 막부의 위기를 상징하는 듯했다.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허약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실권은 로주 아베 마사히로에게 있었다. 아베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전국의 다이묘들과 막부 관리들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다. 250년 동안 막부는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왔다. 이제 조언을 구한다는 것은 막부가 더 이상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고백이었다. 응답은 분열되어 있었다. 일부는 전쟁을 주장했다. 미토 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오랑캐를 물리치고 천황을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들은 일본의 군사력으로는 미국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쓰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강화한 후 다시 판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막부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시간만 흘렀다.


1854년 2월 13일, 페리가 돌아왔다. 약속보다 3개월 빨랐다. 이번에는 함대가 더 컸다. 9척의 군함과 2,000명의 수병을 이끌고 왔다. 시위를 위해 증기 기관차 모형과 전신기를 가져왔다. 요코하마에 설치된 전시장에서 일본 관리들은 처음으로 기차를 목격했다. 작은 기관차가 원형 레일 위를 달렸다. 일부 관리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일부는 흥분했다. 전신기는 순식간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 과시가 아니었다. 문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협상은 한 달간 계속되었다. 막부의 협상가 하야시 아키라는 최선을 다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3월 31일, 가나가와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고, 표류민을 보호하며, 미국 선박에 석탄과 물을 공급하기로 했다. 치외법권과 관세 규정은 없었다. 페리는 만족하며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856년, 미국 총영사 타운젠트 해리스가 시모다에 부임했다. 그는 완전한 통상 조약을 원했다. 2년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1858년 6월 1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관세 자주권을 잃었다. 세율은 5-35퍼센트로 협정되었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변경할 수 없었다.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 법정에서 재판받지 않는 치외법권이 인정되었다. 요코하마,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고베) 네 항구가 추가로 개항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막부가 이 조약을 천황의 재가 없이 체결했다는 점이었다. 로주 호타 마사요시는 교토로 가서 천황의 승인을 구했지만, 고메이 천황은 거부했다. 천황은 양이, 즉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막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천황의 명령을 따르면 전쟁을 해야 하는데 승산이 없었고, 현실을 따르면 천황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막부는 천황의 반대를 무시하고 조약을 비준했다.


이것은 정치적 지진이었다. 250년 동안 천황은 교토의 고쇼, 즉 궁궐에서 의례나 집행하는 존재였다. 실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천황은 반막부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존왕양이 운동이 폭발했다.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구호였다. 하급 무사들, 특히 서남 지역 번들의 젊은 무사들이 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을 시시라고 불렀다. 지사, 즉 뜻을 품은 무사라는 의미였다. 이들은 급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1860년 3월 3일, 에도성 사쿠라다몬 밖에서 대사건이 벌어졌다. 미토 번과 사쓰마 번 낭인 18명이 대로주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한 것이었다. 이이는 조약 체결을 주도했고,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인물이었다. 안세이 대옥으로 알려진 숙청에서 100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이제 그가 눈 내리는 아침에 칼에 맞아 죽었다. 막부의 최고 실력자가 수도 한복판에서 암살당한 것은 충격이었다. 막부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었다.


외국인에 대한 공격도 이어졌다. 1859년 요코하마가 개항되자 외국 상인들과 외교관들이 정착했다. 시시들은 이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1859년 러시아 군함 아스콜드호의 선원 2명이 살해되었다. 1860년 미국 영사관 통역 휴스켄이 암살되었다. 1861년 프로이센 사절단이 습격당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62년 9월 14일의 나마무기 사건이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이 도카이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영국인 4명이 말을 타고 행렬을 가로질렀다. 이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외국인들은 일본의 관습을 몰랐다. 사쓰마 무사들이 칼을 뽑아 영국인 리처드슨을 베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영국은 격노했고, 배상금을 요구했다. 막부는 10만 파운드를 지불했지만, 사쓰마는 거부했다. 1863년 8월, 영국 함대 7척이 가고시마를 포격했다. 사쓰마도 응전했다. 이틀간의 포격전 끝에 가고시마 시가지의 1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쓰마는 교훈을 얻었다. 서양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서양 무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 후 사쓰마는 오히려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조슈 번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조슈는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배했다. 1863년 5월, 조슈는 해협을 지나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선박을 포격했다. 양이를 실천한다는 명분이었다. 서양 열강은 보복했다. 1864년 9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함대 17척이 시모노세키를 공격했다. 조슈의 포대는 단 하루 만에 점령되었다. 막부는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조슈의 젊은 무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이들은 깨달았다. 양이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 일본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교토에서는 정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1862년, 조슈와 사쓰마가 교토를 장악하고 천황을 설득하여 양이 명령을 내리게 했다. 막부는 압박을 받았다. 186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230년 만에 처음으로 교토를 방문했다. 그는 천황 앞에서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막부는 시간을 끌었다. 조슈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1864년 7월 19일, 조슈 과격파는 교토 궁궐을 습격하려 했다. 하마구리고몬의 변이었다. 사쓰마와 아이즈 번의 군대가 이들을 격퇴했다. 교토는 불바다가 되었고, 시가지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조슈는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막부는 조슈를 응징하기로 했다. 1864년 제1차 조슈 정벌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막부의 위신은 이미 실추되어 있었다. 다이묘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조슈는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온건파가 집권하며 항복했다. 과격파 지도자들은 할복했다. 막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조슈 내부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기병대를 조직했다.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전통적으로 군대는 무사 계급으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기병대는 농민, 상인, 심지어 천민까지 포함했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선발되었고, 서양식 소총과 전술로 훈련받았다. 1865년 1월, 다카스기는 쿠데타를 일으켜 온건파 정권을 무너뜨렸다. 조슈는 다시 반막부 노선으로 돌아섰다.


1866년 1월,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교토의 한 저택에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가 마주 앉았다. 두 번은 숙적이었다. 하마구리고몬의 변에서 사쓰마는 조슈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제 공동의 적 막부가 있었다. 중재는 토사 번 출신 낭인 사카모토 료마가 맡았다. 료마는 두 번 사이를 오가며 협상했다. 결국 사쓰마-조슈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막부의 종언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가장 강력한 두 번이 연합하면 막부는 대항할 수 없었다.


막부는 조슈를 다시 공격하기로 했다. 1866년 6월, 제2차 조슈 정벌이 시작되었다. 15만 대군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재앙이었다. 조슈군은 소수였지만 훈련되어 있었고, 사기가 높았다. 반면 막부군은 각 번의 연합군이었는데, 다이묘들은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다. 일부는 아예 참전을 거부했다. 전투마다 조슈가 승리했다. 막부군은 여러 전선에서 패퇴했다. 7월, 쇼군 이에모치가 오사카성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21세였다. 막부는 철수를 명령했다.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막부는 더 이상 군사적으로 다이묘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새로운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개혁이 필요했다. 프랑스 군사 고문단을 초청하여 육군을 재편했다. 요코스카에 조선소를 건설하여 해군을 현대화했다. 행정을 개혁하고, 서양식 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시간과 정당성이 막부에 없었다. 1867년 1월, 고메이 천황이 사망했다. 후계자는 15세의 무쓰히토, 훗날 메이지 천황이었다. 젊은 천황은 조정을 장악한 사쓰마-조슈 세력의 영향 아래 있었다.


1867년 10월, 토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요시노부에게 건의했다.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대정봉환이라고 불렀다. 요도의 의도는 내전을 막는 것이었다. 평화적 권력 이양으로 혼란을 피하고, 요시노부가 새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요시노부는 11월 9일 교토의 니조성에서 대정봉환을 선언했다. 260년간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완전한 제거를 원했다.


12월 9일, 궁정 쿠데타가 일어났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었다. 막부와 섭정, 관백 같은 구체제 직위가 모두 폐지되었다. 새로운 정부가 천황 아래 조직되었다. 중요한 것은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몰수와 관직 박탈이었다. 요시노부는 격노했다. 그는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겼는데, 이제 모든 것을 잃으라는 것이었다. 에도로 돌아간 요시노부는 군대를 모았다.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1868년 1월 27일, 교토 남쪽의 토바와 후시미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구막부군은 1만 5천 명, 신정부군은 5천 명이었다. 수적으로는 구막부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장비와 사기가 달랐다. 신정부군은 최신 소총으로 무장했고, 서양식 전술로 훈련되어 있었다. 구막부군은 여전히 구식 화승총과 창을 들고 있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정당성이었다. 전투 중 신정부군이 금색 국화 문양의 닛시키노미하타, 즉 비단 깃발을 올렸다. 이것은 천황의 깃발이었다. 이제 전쟁은 반란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천황에 대한 반역이 되었다. 구막부군의 사기가 무너졌다. 일부 번은 전투 중에 신정부군으로 돌아섰다. 3일간의 전투 끝에 구막부군은 패퇴했다.


요시노부는 에도로 도망쳤다. 그는 싸울 의지를 잃었다. 가이코쿠 봉행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협상했다. 3월 13-14일, 두 사람은 만나 에도성의 평화적 인도에 합의했다. 4월 11일, 에도성이 신정부군에 넘겨졌다. 250년간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였던 성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함락되었다. 요시노부는 관용을 베풀어 달라며 미토에 은거했다. 그는 77세까지 살았고, 메이지 시대 내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일부 막부 잔당은 저항을 계속했다. 도쿄가와의 과거 영지였던 동북 지역의 여러 번들이 연합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했다. 신정부군은 북상하며 이들을 진압했다. 아이즈 번의 저항은 특히 완강했다. 아이즈와카마쓰 성은 한 달간 포위되었다. 성 안에서는 10대 소녀들로 구성된 뱌코타이가 자결했다. 그들은 성이 함락된 줄 알고 할복했지만, 실제로는 오해였다. 9월, 아이즈가 항복하면서 본토의 저항은 끝났다.


마지막 저항은 홋카이도에서 일어났다. 막부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함대를 이끌고 하코다테로 갔다. 그는 에조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 역사상 유일한 공화국이었다. 신센구미의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를 비롯한 막부 충신들이 합류했다. 1869년 봄, 신정부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해전과 육전이 계속되었다. 5월 11일, 고료카쿠 요새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히지카타는 전사했고, 에노모토는 항복했다. 보신 전쟁은 끝났다. 약 1년 반 동안 계속된 내전에서 약 8,200명이 사망했다. 일본 역사의 기준으로는 큰 전쟁이었지만, 같은 시기 미국 남북전쟁의 60만 사망자와 비교하면 제한적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속하게 근대화를 추진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다이묘들이 영지를 천황에게 반납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현 제도로 대체되었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사농공상의 구분이 사라졌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해졌다. 사무라이는 녹봉을 잃었고, 칼을 찰 권리도 박탈되었다. 1873년 징병제가 도입되어 모든 20세 남성이 군 복무 의무를 지게 되었다. 1872년 학제가 공포되어 전국에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서양식 법전과 헌법이 제정되었다. 철도가 건설되고, 공장이 세워졌다.


이 급속한 변화는 에도 막부가 남긴 유산 위에서 가능했다. 250년의 평화는 일본 사회에 깊은 기반을 쌓았다. 높은 문해율이 그 하나였다. 에도 시대 말기 일본의 문해율은 남성 50퍼센트, 여성 20퍼센트로 추정된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보다 높았다. 데라코야라는 서당이 전국에 1만 5천 개 이상 있었고, 농민과 상인의 자녀들도 읽고 쓰기를 배웠다. 이 교육받은 인구가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전국적 교통망도 중요한 유산이었다. 고카이도, 즉 다섯 개의 주요 도로가 에도를 중심으로 뻗어 있었다. 도카이도, 나카센도, 오슈 가도, 닛코 가도, 고슈 가도였다. 산킨코타이를 위해 건설된 이 도로들은 메이지 시대에 철도와 전신선의 경로가 되었다. 상업 네트워크도 발달해 있었다. 오사카의 도지마 쌀 시장, 에도의 니혼바시 상인들, 전국을 연결하는 해운 네트워크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에도 시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재였다. 막부를 무너뜨린 하급 무사들,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 토사의 사카모토 료마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들은 모두 에도 막부 체제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 그들이 받은 유교 교육, 검술 훈련, 번의 행정 경험은 메이지 정부의 기반이 되었다. 막부가 양성한 관료들, 난학을 공부한 지식인들, 서양 군사 기술을 배운 무사들이 새 정부의 핵심이 되었다. 심지어 막부를 끝까지 지켰던 인물들도 메이지 시대에 중용되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항복 후 감옥에서 풀려나 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역임했다. 가쓰 가이슈는 해군경이 되어 일본 해군의 기초를 닦았다. 메이지 정부는 현명하게도 인재를 적과 아군으로 나누지 않았다. 능력 있는 사람은 과거를 묻지 않고 등용했다.


그렇다면 에도 막부는 무엇이었는가? 실패한 체제였는가, 아니면 성공한 실험이었는가? 단순한 답은 없다. 막부는 백 년 이상 계속된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켰다. 260년간의 평화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대규모 전쟁이 없었고,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농업 생산이 증가했고, 인구는 1600년 1,200만에서 1720년 3,100만으로 늘어났다. 도시가 성장했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문화가 꽃피었다. 이 모든 것이 평화의 열매였다.


그러나 이 평화는 대가가 있었다. 막부는 변화를 두려워했고, 통제를 통해 안정을 추구했다. 쇄국 정책은 일본을 세계로부터 격리시켰다. 250년 동안 일본은 산업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 같은 세계사적 변화에서 소외되었다. 신분제는 사회를 경직시켰다. 재능 있는 사람도 태어난 신분 때문에 기회를 박탈당했다. 경제와 사회의 실제 변화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모순이 쌓였다. 상인은 부를 가졌지만 천대받았고, 사무라이는 명예를 가졌지만 가난했다. 이 괴리는 지속 불가능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막부의 정당성 기반이었다. 막부는 무력으로 권력을 잡았고, 무력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200년 이상 전쟁이 없자, 무사들은 전사가 아니라 관료가 되었다. 칼을 쓸 일이 없는 무사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검술 도장에서 형식적인 가타만 연습하는 것으로는 실전 능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정적 순간에 막부군은 무력했다. 페리 함대를 보고도 손을 쓸 수 없었고, 존왕양이파의 테러를 막지 못했으며, 조슈 정벌에서 패배했다. 무력으로 시작한 정권이 무력을 상실하면 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평화 그 자체가 막부를 약화시켰다. 평화는 경제 발전을 가져왔고, 경제 발전은 새로운 사회 계층을 낳았다. 부유한 상인들, 교육받은 하급 무사들, 난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기존 질서에 도전할 능력과 의지를 가졌다. 평화는 또한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생존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을 때, 사람들은 정의와 정당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쇼군이 일본을 지배하는가? 천황이 있는데 왜 쇼군이 필요한가? 왜 신분이 세습되는가? 이런 질문들이 막부의 기반을 흔들었다.


천황의 존재는 막부의 근본적 취약점이었다. 쇼군의 권위는 천황의 임명에서 나왔다. 그러나 천황이 쇼군을 임명한다면, 천황이 쇼군을 폐위할 수도 있지 않은가? 250년 동안 이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황은 교토에서 의례나 집행하며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그러나 막부가 약해지자, 천황은 대안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존왕양이 운동은 교묘했다. 막부를 직접 공격하면 반역이지만, 천황을 받든다고 주장하면 충성이 되었다. 막부는 천황을 억압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천황의 명령을 따를 수도 없었다. 천황이 양이를 명령했지만 막부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 딜레마가 막부를 마비시켰다.


페리의 도래는 촉매제였다. 외부 위협은 내부 모순을 폭발시켰다. 만약 막부가 단호하게 대응했다면, 예를 들어 페리를 격퇴하거나 아니면 신속하게 개항을 결정하고 전국을 설득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막부는 우유부단했다.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구한 것은 약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천황의 재가 없이 조약을 체결한 것은 정당성을 훼손했다. 조약에 반대하는 이들을 탄압한 것은 반감을 샀다. 막부는 모든 선택에서 최악의 결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막부는 달리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막부가 직면한 것은 구조적 문제였다. 250년간 평화를 유지한 시스템은 전쟁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산킨코타이는 다이묘들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막부 자체도 약화시켰다. 엄청난 행정 비용이 들었고, 다이묘들의 불만을 샀다. 신분제는 능력주의를 억압했다. 재능 있는 하급 무사들이 승진할 길이 막혀 있었고, 그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었다. 쇄국은 일본을 세계로부터 고립시켰고, 군사 기술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하나를 바꾸려면 전체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전체를 바꾸는 것은 막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는 달랐다. 대중 봉기가 아니라 엘리트 쿠데타였다. 막부를 무너뜨린 것은 농민도 상인도 아니라 하급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존 체제의 수혜자였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를 타도했지만, 무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천황이라는 새로운 정당성의 원천 아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했다. 어떤 의미에서 메이지 정부는 막부보다 더 권위주의적이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국가의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변화를 받아들였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능력주의를 지향했으며, 세계와의 교류를 추구했다. 이것이 에도 막부와의 결정적 차이였다.


불과 30년 만에 일본은 변모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서양 열강을 처음으로 격퇴한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1868년 서양인들이 바라본 일본은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나라였다. 1905년 세계가 본 일본은 근대 국가였다. 이 놀라운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 지도자들의 현명함, 일본인들의 적응력, 시대적 행운도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쌓아놓은 기반을 빼놓을 수 없다. 평화, 교육, 행정 경험, 문화적 성숙함, 이 모든 것이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도 막부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평화는 소중하지만,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안정은 중요하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안정은 정체이고 쇠퇴라는 것이다. 통제는 때로 필요하지만, 과도한 통제는 사회의 활력을 죽인다는 것이다. 어떤 체제도 영원할 수 없으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는, 성공이 종종 실패의 씨앗을 품는다는 것이다.


1868년 4월 11일 아침, 에도성의 문이 열렸다. 신정부군이 조용히 입성했다. 250년간 도쿠가와 가문이 살았던 성은 이제 비어 있었다. 요시노부는 이미 떠났고, 막부의 관리들은 흩어졌다. 성벽 위에서 휘날리던 도쿠가와 가문의 아욱 문양 깃발이 내려졌다. 그 자리에 국화 문양의 천황 깃발이 올랐다. 구경하던 에도 시민들은 조용했다. 일부는 눈물을 흘렸고, 일부는 무표정했으며, 일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자신들의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에도는 곧 도쿄가 될 것이고, 사무라이는 사라질 것이며, 일본은 다시 한번 자신을 재창조할 것이었다.


한 시대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함성도 없었고, 극적인 장면도 없었다. 그저 봄날 아침의 고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 260년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었다. 전쟁과 평화, 통제와 번영, 쇄국과 개항, 안정과 변화의 역사가. 에도 막부는 갔지만, 그것이 남긴 유산은 계속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뼈대에, 일본인들의 정신에,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일본의 모습에. 막부는 끝났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7%90%EB%8F%84%20%EB%A7%89%EB%B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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