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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무사 정권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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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가 끝나갈 무렵, 교토의 귀족들은 여전히 화려한 궁정 문화 속에서 와카를 짓고 향을 피우며 우아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밑에서는 이미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장원 제도의 확대는 중앙 정부의 재정 기반을 서서히 잠식했다. 귀족과 사원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불수불입의 특권을 가진 장원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조정이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공령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율령 체제가 상정했던 중앙집권적 토지 소유는 이미 허구가 되어 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방 통제력의 상실이었다. 율령제 하에서 지방을 다스리던 국사들은 원래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였지만,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사실상 세습적 지방 호족으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했고, 조정은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경호원에 불과했던 무사들이 점차 조직화되고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활과 칼을 다루는 전문적인 전투 기술을 익혔고, 주종 관계를 바탕으로 한 집단을 형성했다.


10세기와 11세기를 거치면서 동국, 특히 간토 지방에서는 독특한 무사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중앙의 통제가 약했고 무사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타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는 모두 천황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무가였다. 천황의 자손이 너무 많아지자 신적 강하를 통해 신하로 만드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렇게 신하가 된 황족들 중 일부가 무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갔다. 타이라 씨는 주로 서국에, 미나모토 씨는 주로 동국에 기반을 두었다. 이들은 황족 출신이라는 혈통의 권위와 무력이라는 실질적 힘을 모두 갖춘 무사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11세기 중반, 전구헤이 9년의 난과 후3년의 난이라는 동북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나모토 씨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뛰어난 무장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그의 무용담은 동국 무사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이 전쟁들을 통해 동국 무사들은 미나모토 씨를 자신들의 동류이자 지도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주종 관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조정은 이 전쟁들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무사들은 자신들이 흘린 피와 땀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토의 권력 구조도 변화하고 있었다. 후지와라 씨의 섭관정치가 쇠퇴하고, 천황이 퇴위한 후에도 권력을 행사하는 인세이, 즉 원정이 시작되었다. 시라카와 상황과 토바 상황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새로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 투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황과 천황, 섭관가, 그리고 다양한 황족과 귀족 세력들이 얽히고설킨 권력 다툼 속에서, 그들은 점점 더 무사들의 무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1156년의 호겐의 난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폭발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천황가와 후지와라 씨 내부의 권력 투쟁이 무력 충돌로 비화했고, 양측 모두 타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의 무사들을 끌어들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후시라카와 천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였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무사들이었다. 이 난을 통해 교토에서도 정치적 분쟁이 결국 무력으로 해결된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3년 후인 1159년의 헤이지의 난에서 다시 한번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미나모토 씨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처형되었고, 요시토모의 어린 아들들만이 목숨을 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즈로 유배된 요리토모였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무사로서는 전례 없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다이조다이진에 올랐고, 자신의 딸을 천황의 중궁으로 삼아 외척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전국의 주요 슈고와 지토 직책을 타이라 일족이 장악했고, 세토 내해의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키요모리의 정권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사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타이라 일족은 교토에 정착하여 귀족화되었고, 전통적인 궁정 정치의 방식을 답습했다. 이것은 동국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들이 보기에 타이라 씨는 무사로서의 본분을 잊고 교토의 귀족이 되어 버린 배신자였다.


타이라 정권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타이라 일족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키요모리는 자신의 혈족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지만, 타이라 씨가 아닌 다른 무사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것은 넓은 무사 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타이라 씨의 오만함과 전횡은 점점 더 심해졌다. 키요모리가 중병에 걸렸을 때 조정이 사면령을 내리지 않자, 그는 분노하여 후지와라 섭관가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을 유배 보냈다. 이러한 독단적 행동은 귀족들의 반감을 샀고, 동시에 다른 무사들에게도 타이라 정권이 결국은 자신들의 정권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1180년, 상황은 급변했다. 모치히토 왕이 타이라 씨 타도의 영을 전국에 내렸다. 비록 이 거병은 즉각 진압되었지만, 이것은 전국의 반타이라 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했다.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했고, 목조 지방에서는 그의 사촌 요시나카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요리토모의 첫 전투는 이시바시야마에서의 참패였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고 안방의 무사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재건했다. 여기서 요리토모의 정치적 천재성이 드러났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조직의 설계자였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를 근거지로 정하면서부터 자신만의 비전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가마쿠라는 간토 평야의 끝자락,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만 바다를 향한 천연의 요새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교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요리토모는 교토로 올라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교토와는 별도의 독립적인 정치 중심지를 만들려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을 고케닌으로 조직화했다. 이것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제도화된 계약 관계였다. 고케닌이 되면 자신의 영지 소유권을 막부가 보장해 주었고, 분쟁이 생기면 막부가 중재해 주었다. 대신 고케닌은 전시에 군사적 봉사를 해야 했고, 가마쿠라에서 교대로 경비를 서는 번역의 의무가 있었다.


요리토모는 또한 사무라이도코로, 만도코로, 몬주조라는 세 개의 행정 기관을 설치했다. 사무라이도코로는 군사와 경찰을 담당했고, 만도코로는 재정과 일반 행정을, 몬주조는 문서와 기록을 관장했다. 이것들은 조정의 관제와는 완전히 별개의 독자적인 행정 조직이었다. 1185년 단노우라에서 타이라 씨를 멸망시킨 후, 요리토모는 전국에 슈고와 지토를 임명할 권한을 조정으로부터 얻어냈다. 슈고는 각 구니, 즉 국에 한 명씩 배치되어 군사·경찰권을 행사했고, 지토는 각 장원과 공령에 배치되어 토지 관리와 세금 징수를 담당했다. 이를 통해 막부는 조정의 율령 체제와는 별도로 전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행정망을 구축했다.


1192년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된 것은 이러한 과정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요리토모는 천황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천황은 여전히 일본의 정통성의 원천이었고, 쇼군은 천황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신하였다. 그러나 실제 정치와 군사의 모든 권한은 막부가 행사했다. 이러한 이원적 권력 구조는 일본 정치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서양에서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천황의 권위는 유지하면서 실권을 다른 곳에서 행사하는 방식이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요리토모 정권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위기를 겪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들과 측근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겐페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동생 요시츠네는 요리토모의 의심을 받아 도망치다가 결국 자살했다. 이것은 요리토모의 냉혹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얼마나 권력에 집착했는지를 드러냈다. 1199년 요리토모가 낙마 사고로 급사했을 때, 그가 만든 체제가 과연 그의 사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그의 장남 요리이에가 열여덟 살의 나이로 쇼군이 되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카리스마도, 정치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 권력 공백을 메운 것은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 씨였다. 호조 토키마사는 요리이에의 외할아버지로서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203년, 토키마사는 요리이에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세웠다. 요리이에는 이듬해 이즈에서 암살되었다. 토키마사는 싯켄, 즉 집권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쇼군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실권을 행사했다. 1205년에는 토키마사 자신도 아들 요시토키에게 밀려나 은퇴했다. 호조 씨의 권력 장악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막부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쇼군은 상징적 지도자가 되었고, 싯켄이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구조가 확립되었다.


1219년, 쇼군 사네토모가 조카에 의해 암살되면서 미나모토 씨의 쇼군 혈통은 끊어졌다. 이후 쇼군은 교토의 황족이나 섭관가에서 어린 아이를 데려와 앉히는 형식이 되었다. 이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였다. 천황이 명목상의 최고 권력자이고, 쇼군이 천황의 대리인이며, 싯켄이 쇼군의 대리인인 삼중 대리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마지막 단계인 싯켄이 행사했다. 이러한 복잡한 권력 구조는 일본 정치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권위와 권력의 분리, 형식과 실질의 괴리가 제도화된 것이다.


1221년, 이 체제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고토바 상황이 막부 타도를 결심하고 거병한 것이다. 고토바는 재능 있는 군주였고, 무예에도 능했으며,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 자신이 있었다. 그는 전국의 무사들에게 막부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분상으로는 천황의 명령이 쇼군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호조 요시토키는 주저하지 않고 대군을 일으켜 교토로 진격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무사들이 천황이 아니라 막부의 편에 섰다는 점이었다. 무사들에게 막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실질적인 주군이었고, 천황은 먼 곳의 명목상 권위에 불과했다.


전쟁은 막부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고토바 상황은 오키 섬으로, 준토쿠 상황은 사도 섬으로, 츠치미카도 천황은 아와지 섬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천황의 폐립을 막부가 주도한다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교토에는 로쿠하라 단다이라는 기관이 설치되어 조정을 감시했다. 조큐의 난 이후 서국에서 몰수된 3천 개가 넘는 장원이 동국 무사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제 막부의 지배는 전국적인 것이 되었다. 동국 무사들이 서국에도 진출함으로써 막부의 통제망은 일본 전역을 덮었다. 조큐의 난은 천황과 막부의 권력 관계를 명확히 했다. 명분은 천황에게 있지만, 실권은 막부에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호조 정권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제5대 싯켄 호조 토키요리와 제8대 싯켄 토키무네 시대는 가마쿠라 막부의 전성기였다. 토키요리는 1249년에 고세이바이시키모쿠를 제정했다. 이것은 51개 조문으로 이루어진 일본 최초의 무가법이었다. 율령이 중국의 법 체계를 모방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법이었다면, 고세이바이시키모쿠는 무사 사회의 실제 관습과 관례를 성문화한 실용적인 법이었다. 이 법전은 고케닌의 권리와 의무, 영지 상속, 분쟁 해결 절차 등을 명확히 규정했다. 특히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는 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면이었다.


호조 정권은 또한 공정한 재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히키츠케슈라는 소송 담당 기관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올라오는 토지 분쟁을 처리했다. 막부의 재판은 비교적 공정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이것이 막부에 대한 무사들의 신뢰를 높였다. 토키요리는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그는 사치를 멀리하고 실용을 중시하는 무사적 가치관을 몸소 실천했다. 이러한 태도는 교토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대비되어 무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가마쿠라 막부는 전례 없는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다. 1260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그는 곧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다. 호조 토키무네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1274년, 마침내 몽골군이 9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침공해 왔다. 이것이 분에이의 역, 즉 제1차 몽골 침략이었다. 몽골군은 고려군과 함께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대마도와 이키섬을 점령한 후 규슈의 하카타만에 상륙했다.


가마쿠라 무사들은 몽골군의 전술에 당혹스러워했다. 일본 무사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가계를 밝히고 일대일 결투를 추구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집단으로 움직이며 기마궁수들의 일제 사격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또한 화약무기인 철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처음 보는 무기였다.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했다. 그러나 규슈의 무사들은 빠르게 적응하여 소규모 집단전과 야간 기습으로 대응했다. 결정적으로, 그날 밤 태풍이 불어 몽골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몽골군은 철수했다.


쿠빌라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토키무네는 사신들의 목을 베어 거절 의사를 명확히 했다. 막부는 전국의 고케닌들을 동원하여 규슈에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하카타만 해안을 따라 약 20킬로미터에 이르는 석벽, 이른바 겐코보루이를 쌓았다. 이 방어벽은 상륙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1281년, 두 번째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훨씬 컸다. 동로군 4만과 강남군 10만, 합쳐 약 14만 명의 대군이었다. 고려에서 출발한 동로군이 먼저 도착했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방어벽 때문에 상륙에 실패했다. 일본 무사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밤에 몽골 함대를 기습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강남군이 합류하여 함대는 더욱 커졌지만, 오히려 이것이 약점이 되었다. 좁은 만에 너무 많은 배가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7월 말, 거대한 태풍이 몰아쳤다. 태풍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몽골 함대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수만 명이 익사했고, 살아남은 군사들도 대부분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라고 불렀다. 이것은 일본이 신이 지키는 신국이라는 관념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역설적으로 막부의 쇠퇴를 가져왔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외국과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분배할 토지가 없었던 것이다. 고케닌들은 몇 년간 규슈에 동원되어 막대한 비용을 들였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많은 무사들이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막부는 고케닌들을 구제하기 위해 1297년 토쿠세이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고케닌들의 빚을 탕감하고 매각된 영지를 되찾게 해주는 법령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경제를 혼란시켰다.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들은 고케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를 꺼리게 되었고, 신용 경제가 붕괴되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막부가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13세기 중반부터 일본 경제는 급속히 화폐화되고 상업화되고 있었다. 송나라에서 수입된 동전이 유통되면서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어 이모작이 확산되었고, 여유 농산물이 시장에 나왔다. 정기시장이 전국적으로 열렸고,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성장했다.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번성했다.


그러나 막부와 고케닌 체제는 여전히 토지 중심의 봉건 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공업에서 발생하는 부는 대부분 교토의 귀족과 사원, 그리고 신흥 상인 계층에게 돌아갔다. 막부는 이러한 새로운 부의 원천을 효과적으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고케닌들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더욱이 분할 상속 제도가 문제를 악화시켰다. 무사의 영지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자식들에게 분할되어 점점 작아졌다. 처음에는 넓은 영지를 가졌던 고케닌 가문도 몇 대를 거치면 영지가 너무 작아져서 무사로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14세기 초, 막부의 기반인 고케닌 체제는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많은 고케닌들이 빚에 시달리다가 영지를 잃었고, 일부는 몰락하여 농민이 되거나 방랑자가 되었다. 막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이들은 원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배신감을 느꼈다. 동시에 막부의 통제력도 약화되고 있었다. 호조 씨는 싯켄과 주요 관직을 독점했고, 다른 유력 무사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호조 일족 내에서도 권력 투쟁이 있었고, 막부의 정치는 점점 경직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토의 조정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1318년,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했다. 그는 역대 천황들과는 달리 강렬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다이고는 천황 중심의 율령 체제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그가 보기에 막부는 천황의 권위를 찬탈한 불법적인 존재였다. 그는 조큐의 난 때 고토바 상황이 실패한 것을 교훈 삼아 더욱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고다이고는 전국의 불만 세력들과 접촉했다. 몰락한 고케닌들, 권력에서 소외된 무장들, 그리고 조정에 충성하는 귀족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1324년, 첫 번째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포기하지 않았다. 1331년, 그는 다시 거병했다. 이번에도 초기에는 막부군이 우세했다. 고다이고는 카사기 산으로, 그의 아들 모리나가 친왕은 요시노 산으로 도망쳤다. 고다이고는 결국 붙잡혀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다. 막부는 또다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배지에서 탈출한 고다이고는 1333년 다시 거병을 선언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쿠스노키 마사시게라는 뛰어난 게릴라전 전문가가 나타나 교토 근처에서 막부군을 괴롭혔다. 그는 소수의 병력으로 산성에 의지하여 막부의 대군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력 무장들이 막부를 배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호조 씨의 방계로서 막부의 중요한 무장이었다. 그는 교토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타카우지는 돌연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 1333년 5월, 그는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닛타 요시사다가 관동에서 거병하여 가마쿠라로 진군했다. 닛타 씨는 미나모토 씨의 일족으로 명문이었지만, 호조 정권 하에서는 소외되어 있었다. 요시사다는 불만을 품은 무사들을 규합하여 빠르게 세력을 확대했다.


1333년 5월 22일, 닛타 요시사다의 군대가 가마쿠라를 포위했다. 가마쿠라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지만, 이제 그것은 덫이 되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요시사다의 군대는 가마쿠라로 진입했다. 마지막 싯켄 호조 타카토키는 도손 사원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그와 호조 일족 870여 명이 집단으로 할복 자살했다. 불은 가마쿠라 전체를 태웠다. 요리토모가 1180년에 세운 이래 150여 년간 일본을 지배했던 가마쿠라 막부는 이렇게 멸망했다.


그러나 막부의 멸망이 천황 중심 체제의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이라는 이름으로 천황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율령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고, 무사들을 경시했다.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공평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후한 상을 받았지만, 실제로 싸운 무사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비롯한 무장들의 불만이 커졌다. 더욱이 고다이고의 정치는 현실성이 없었다. 그는 이미 150년 전에 사라진 율령 체제를 되살리려 했지만, 일본 사회는 이미 근본적으로 변화해 있었다. 무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무가정권을 원했다.


1335년, 호조 씨의 잔당이 난을 일으켰고, 타카우지가 이를 진압하러 갔다. 그러나 타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물면서 독자적으로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고다이고는 타카우지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닛타 요시사다에게 그를 치라고 명령했다. 일본은 다시 내전에 빠졌다. 1336년, 타카우지는 교토를 점령하고 고묘 천황을 옹립했다. 고다이고는 요시노 산으로 도망쳐 남조를 세웠다. 일본은 남조와 북조로 분열되어 약 60년간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게 되었다. 타카우지는 1338년 쇼군에 임명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으로 일본은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막부가 만든 기본적인 정치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쇼군을 중심으로 한 무가정권, 고케닌을 기반으로 한 봉건 체제, 슈고와 지토를 통한 지방 지배는 무로마치 막부에 계승되었다. 고세이바이시키모쿠는 계속 무가법의 기본으로 남았다. 가마쿠라 막부가 확립한 무사 중심의 정치 체제는 이후 일본 역사의 기본 틀이 되었다.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막부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기본적으로 무사가 지배하는 봉건 사회로 남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번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약 700년간, 일본은 무가정권의 시대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정치 제도에 그치지 않았다. 무사 계급의 가치관과 문화가 일본 문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 문화가 우아함, 섬세함, 정서적 감수성을 중시했다면,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문화는 소박함, 실용성, 충성심, 용맹함을 강조했다. 선종이 무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에이사이가 중국에서 임제종을 들여왔고, 도겐이 조동종을 전했다. 선종은 복잡한 교리나 의식보다는 좌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했고, 이것이 실천을 중시하는 무사들의 기질과 잘 맞았다. 호조 씨를 비롯한 많은 무장들이 선종에 귀의했고, 가마쿠라에는 많은 선종 사원이 세워졌다.


선종과 함께 정토종도 서민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되었다. 호넨이 창시한 정토종과 그의 제자 신란이 세운 정토진종은 복잡한 수행 대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니치렌은 법화경을 유일한 진리로 내세우며 국가주의적 불교를 전파했다. 그는 몽골 침략을 예언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이 불국토임을 역설했다. 이렇게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 불교사에서 신불교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고, 이후 일본 불교의 주요 종파들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문학에서는 군기물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나타났다. 헤이케모노가타리는 타이라 씨의 번영과 몰락을 그린 장대한 서사시로, 일본 문학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오고리도 히사시카라즈", 즉 "교만한 자 오래가지 못하리"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무상관을 바탕으로 인간의 영고성쇠를 노래했다. 비파 법사들이 비파를 타며 이 이야기를 전국에 퍼뜨렸고, 이것은 무사들의 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수필 문학에서도 카모노 조메이의 호조키와 요시다 켄코의 츠레즈레구사 같은 걸작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무상관과 은둔의 미학을 노래했다.


미술에서는 게이파 조각이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운케이, 카이케이, 탄케이로 대표되는 게이파 불사들은 이전의 귀족적이고 이상화된 불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조각을 만들어냈다. 도다이 사의 금강역사상은 근육의 긴장과 분노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걸작이다. 이러한 사실주의와 역동성은 무사 시대의 미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건축에서도 다이부츠요와 젠슈요라는 새로운 양식이 중국에서 들어왔고, 이것이 일본의 전통 양식과 결합하여 독특한 절충 양식인 셋추요가 만들어졌다.


가마쿠라 시대는 또한 무사도 정신의 형성기였다. 물론 무사도라는 용어 자체는 에도 시대에 체계화된 것이지만, 그 핵심 가치관은 가마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각오, 겸손과 자기 절제, 검약과 실용 중시, 이러한 가치관들이 이 시기에 무사 계급의 윤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주종 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고케닌과 쇼군의 관계는 단순한 지배-복종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무를 바탕으로 한 인격적 유대였다. 주군은 가신의 영지를 보장하고 보호하며, 가신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주종 관계였다.


이러한 무사 문화는 후대 일본 문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도, 화도, 검도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들은 모두 선종과 무사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와비사비라는 일본 미학의 핵심 개념, 즉 소박함과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태도도 이 시기에 싹텄다. 가마쿠라 막부가 만든 것은 단순히 정치 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이었다.


경제적으로도 가마쿠라 시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고, 우경이 확산되었으며, 관개 시설이 개선되었다.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쌀 생산량이 증가했다. 상업도 발달하여 정기시장이 전국적으로 열렸다. 처음에는 월 3회 정도였던 시장이 점차 늘어나 가마쿠라 말기에는 거의 매일 어디선가 시장이 열렸다. 교통도 발달하여 해상 교통로가 확대되었고, 육상에서도 주요 도로가 정비되었다.


화폐 경제의 발달도 두드러졌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중국의 동전을 수입하여 사용했다. 송전, 명전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유통되었다. 화폐 경제의 발달은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지만으로는 부를 측정할 수 없게 되었고,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들이 새로운 부유층으로 성장했다. 막부와 고케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이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경제 발전에 의해 약화되었다.


대외 관계에서도 가마쿠라 시대는 중요한 시기였다. 공식적인 국교는 없었지만, 무역은 활발했다. 송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동전, 서적, 도자기, 비단 등이 수입되었고, 일본에서는 금, 은, 황, 칼 등이 수출되었다. 선종 승려들의 왕래도 빈번하여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몽골 침략은 일본의 대외 인식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외국의 대규모 침략을 경험했고, 이것은 일본이 신이 지키는 특별한 나라라는 신국 사상을 강화했다. 동시에 외부 세계에 대한 경계심도 커졌다. 이러한 경험은 후대 일본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가마쿠라 막부의 유산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무사도 정신은 근대 일본의 정신적 기반으로 재해석되었고, 천황과 실권자의 이원적 구조는 형태를 바꾸어 근대 천황제에도 반영되었다. 봉건적 충성심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전환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형성된 집단주의, 위계질서 존중, 의무 중시의 문화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사회의 강점이자 때로는 약점이 되었다.


단노우라의 바다에 타이라 씨의 붉은 깃발이 가라앉은 지 850년이 지났다. 가마쿠라의 해안에는 더 이상 무사들의 함성이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체제의 그림자는 여전히 일본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요리토모가 꿈꾸었던 무사들의 세상은 150년 만에 무너졌지만, 그가 연 무가정권의 시대는 700년간 지속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단순히 하나의 정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방향을 바꾼 혁명이었고, 중세 일본을 규정한 시대정신이었으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의 깊은 곳에 각인된 정체성이었다.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무사의 시대가 시작된 그 순간,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A%B0%80%EB%A7%88%EC%BF%A0%EB%9D%BC%20%EB%A7%89%EB%B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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