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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분열, 통합 그리고 번영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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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 일본은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가마쿠라 막부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1274년과 1281년, 쿠빌라이 칸이 보낸 대군은 규슈 해안을 유린했지만, 태풍—일본인들이 "신풍(가미카제)"이라 부른—과 무사들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혹독했다. 막부는 몽골과의 전쟁에 참여한 무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었다. 외적을 물리쳤지만 새로운 영지를 얻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무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자의 토지를 받았지만, 방어전에서는 분배할 땅이 없었다. 이 모순은 막부에 대한 무사들의 불만을 키웠고, 특히 규슈의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 가신)들은 생계의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전쟁 준비로 막부의 재정은 파탄 났고, 호조 씨의 섭정 정치는 점점 더 독단적이고 부패해졌다.


14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를 지탱하던 사회경제적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분할 상속 제도로 인해 무사들의 영지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잘게 쪼개졌고, 많은 무사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진 무사들이 늘어났고, 막부는 1297년 도쿠세이레이(徳政令)라는 채무 탕감령을 내렸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한편 교토의 천황가와 귀족들은 여전히 문화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막부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1318년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했다. 그는 천황 친정이라는 고대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고다이고는 단순한 상징적 군주가 아니라 실질적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막부 타도를 결심했다.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의 거사는 발각되어 실패했고, 그는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모리요시 친왕은 도망쳐 반막부 세력을 규합했다. 전국 각지에서 막부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봉기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가와치 국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아카사카 성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막부군을 괴롭혔다. 1333년, 막부는 유력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니타 요시사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막부를 배신했다. 다카우지는 교토를 점령했고, 요시사다는 가마쿠라를 공격했다.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 일족은 도호쿠지의 토소 안에서 집단 할복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150년간 지속된 호조 씨의 집권은 끝났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보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와 건무 신정(建武新政)을 시작했다. 그는 율령 체제의 부활을 꿈꾸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 정치, 이것이 그가 그리는 이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막부 타도에 공을 세운 무사들은 구체적인 보상을 요구했지만, 천황의 조정은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잡무로 가득한 교토의 관료 체제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소송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토지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공적에 대한 보상은 불공정했다. 특히 무사들은 귀족들이 요직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천황은 자신의 측근들을 중용했고, 막부 타도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소외되었다. 더욱이 천황은 화려한 궁정 의식과 건축 사업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재정은 악화되었고, 무사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건무 신정은 천황과 귀족들의 복고적 이상과 무사 사회의 현실적 요구 사이의 괴리를 메우지 못했다.


1335년, 호조 씨의 잔당이 가마쿠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다카우지는 진압을 자청했고, 반란을 평정한 후 가마쿠라에 머물며 관동 무사들을 규합했다. 천황은 그를 소환했지만 다카우지는 거부했다. 1336년, 다카우지는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진격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니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천황군은 미나토가와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마사시게는 전사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요시노 산중으로 도망쳤다.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것이 무로마치 막부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서 남조를 세우며 자신이 정통 천황임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삼종신기야말로 천황 정통성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이렇게 남북조로 분열되었고, 이 분열은 56년간 지속되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은 단순한 왕조 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이었다. 남조는 천황 중심의 고대 율령 체제를 대표했다. 귀족 문화의 전통, 문치주의, 중앙집권을 지향했다. 반면 북조와 무로마치 막부는 무사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상징했다. 실력주의, 무력에 의한 통치, 지방 분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갈등은 이념의 충돌이었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전국의 슈고 다이묘들과 국인(國人, 지방 유력 무사)들은 남조와 북조 사이를 오가며 자신들의 영지를 확대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충성심보다는 이해관계가 행동을 결정했다. 어제의 동맹자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전사는 남조에게 큰 타격이었지만, 그의 아들 구스노키 마사츠라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싸웠다. 규슈에서는 가네요시 친왕이 강력한 남조 세력을 구축했다. 간토 지방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와 아들 다다후유 사이의 내분이 일어났고,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숙청해야 했다. 간토에서는 아시카가 가문의 방계인 간토쿠보(關東公方)가 사실상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막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간토 간레이를 두었지만, 간토쿠보와 간토 간레이 사이의 갈등은 후에 더 큰 혼란을 낳았다. 이처럼 남북조 시대는 중앙의 권위가 약화되고 지방 무사들의 독립성이 강화되는 과정이었다. 슈고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군사권과 사법권을 행사했고, 점차 세습화되어 갔다. 막부는 그들의 협력 없이는 존립할 수 없었다.


135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요시아키라가 제2대 쇼군이 되었다. 요시아키라는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고, 1368년 그의 아들 요시미츠가 겨우 11세의 나이로 제3대 쇼군에 올랐다. 처음 10년간은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후견인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 이 시기 막부는 규슈의 이마가와 료슌과 간토의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파견하여 지방의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진정한 전환은 요시미츠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면서 일어났다. 요시미츠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세련된 정치가였다. 그는 유력 다이묘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교묘하게 조작했다. 한 가문이 너무 강해지면 다른 가문을 지원하여 견제했고, 반대로 약해진 가문에게는 영지를 돌려주어 균형을 회복시켰다. 1390년 도요쿠니의 난에서는 이즈미 국의 슈고 야마나 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야마나 씨는 11개국의 슈고를 겸임하며 "11분의 1 전하"라 불릴 정도로 강력했다. 요시미츠는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1391년 메이토쿠의 난에서는 오우치 요시히로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 이러한 승리를 통해 요시미츠는 유력 다이묘들을 굴복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확립했다.


1392년, 요시미츠는 마침내 남북조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는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 교묘한 제안을 했다. 삼종신기를 북조에 넘기면 향후 천황위를 남북조가 교대로 계승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남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교토로 돌아와 신기를 북조의 고코마츠 천황에게 전했다. 이로써 56년간의 남북조 분열은 종식되었다. 물론 교대 계승의 약속은 처음부터 지켜질 의도가 없었다. 이는 외교적 기만이었지만, 효과적인 정치적 해결책이었다. 통일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고, 이는 경제 회복과 문화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요시미츠는 이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의 권력은 천황을 능가했고, 그는 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요시미츠의 권력은 화려한 문화적 과시로 표현되었다. 1397년, 그는 기타야마 산장을 완성했다. 이곳의 중심인 금각사는 3층 누각으로, 연못 위에 우뚝 솟아 찬란한 금빛을 발했다. 1층은 귀족의 신덴즈쿠리 양식으로 연회장이었고, 2층은 무사의 부케즈쿠리 양식으로 관음보살을 모셨으며, 3층은 선종의 불전 양식으로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건축물은 요시미츠가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귀족 문화와 무사 문화, 그리고 선종 문화의 융합. 이것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새로운 종합이었다. 기타야마 문화로 불리는 이 시대의 문화는 화려함과 세련됨을 특징으로 했다. 요시미츠는 또한 노를 적극 후원했다. 간아미와 그의 아들 제아미는 요시미츠의 총애를 받으며 노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제아미가 체계화한 노는 가무와 이야기, 의상과 음악이 결합된 종합 예술이었다. "유겐"이라는 미학 개념, 즉 표면 아래 숨은 깊은 아름다움과 여운을 중시했다. 노는 귀족과 무사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일본 공연 예술의 정수가 되었다.


요시미츠의 외교 정책도 야심적이었다. 1401년, 그는 명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 무역을 시작했다. 명의 영락제는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쇼군이 외국 황제로부터 왕으로 책봉받다니, 이는 천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일본에서는 오직 천황만이 최고 통치자였고, 쇼군은 천황이 임명하는 무관에 불과했다. 그런데 요시미츠는 명 황제에게 스스로를 일본의 왕으로 제시했다. 이는 국내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실리적으로는 큰 이익을 가져왔다. 명과의 감합 무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했다. 일본은 구리, 유황, 칼, 부채, 병풍 등을 수출하고, 명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서적, 약재, 동전을 수입했다. 특히 명의 동전은 일본 경제의 유통 화폐가 되었다. 이 무역은 막부의 재정을 크게 개선했을 뿐 아니라, 문화 교류의 통로가 되었다. 선종의 수묵화 기법, 차 문화, 정원 예술 등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일본에 전래되었다.


요시미츠 시대 선종 문화는 제도적으로도 확립되었다. 고잔(五山) 제도가 완성되어, 교토의 텐류지, 쇼코쿠지, 켄닌지, 토후쿠지, 만주지가 오대 선종 사원으로 지정되었다. 가마쿠라에도 별도의 오대 사원이 있었다. 이들 사원은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고잔 문학이라 불리는 한문학이 발전했고, 선승들은 한학에 정통하여 막부의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고잔 승려들은 중국 문화의 수용과 일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묵화도 이 시기에 크게 발전했다. 조세쓰는 선의 정신을 수묵화로 표현하는 선구자였고, 그의 제자 슈분은 이를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슈분의 수묵 산수화는 간결한 먹선으로 자연의 본질을 포착했다. 이들이 확립한 수묵화 전통은 후에 셋슈에 의해 일본적 독자성을 획득하게 된다.


1408년, 요시미츠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의 아들 요시모치가 제4대 쇼군이 되었지만, 그는 아버지와는 매우 달랐다. 요시모치는 아버지의 친명 정책을 혐오했다.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명과의 조공 무역을 중단했다. 이것은 천황 중심의 전통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손실이었다. 요시모치는 1428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요시카즈가 제5대 쇼군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카즈는 1425년에 태어나 1432년에 사망한, 극히 짧은 생애를 살았다. 제6대 쇼군 요시노리는 요시미츠의 아들로, 원래 천태종의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쇼군이 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요시노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그는 간토쿠보와 간토 간레이 사이의 영원의 난을 진압하려 했고, 슈고 다이묘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때로 폭압적이었고, 이는 반발을 샀다. 1441년, 슈고 다이묘 아카마쓰 미츠스케가 연회에 초대된 요시노리를 살해했다. 가키쓰의 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쇼군이 자신의 신하에게 살해되다니,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아카마쓰 가문은 토벌되었지만, 이 사건은 막부 권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제7대 쇼군 요시카쓰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18세에 요절했다. 1449년, 그의 동생 요시마사가 제8대 쇼군이 되었다. 요시마사의 시대는 문화적으로는 찬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암울했다. 요시마사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예술과 향락에만 몰두했다. 막부의 재정은 파탄 났지만, 그는 히가시야마 산장을 건설하고 화려한 문화 생활을 즐겼다. 1482년 완성된 은각사는 조부 요시미츠의 금각사에 대응하는 건축물이었지만, 전혀 다른 미학을 보여주었다. 은각사는 실제로 은박을 입히지 않았다. 이름과 달리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2층 누각의 관음전과 1층의 서원은 검은 옻칠로 마감되어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히가시야마 문화로 불리는 이 시기의 예술은 와비사비 미학을 확립했다. 와비(侘)는 간소함과 고독 속의 아름다움을, 사비(寂)는 낡음과 덧없음의 미를 의미했다. 무라타 슈코가 체계화한 다도는 이러한 미학의 실천이었다. 작고 소박한 다실에서, 간소한 도구로 차를 마시며 정신적 평온을 추구했다. 이는 화려한 기타야마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내면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요시마사의 정치적 무능은 재앙을 초래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기에, 1464년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했다. 요시미는 승려였지만 쇼군이 되기 위해 환속했다. 그런데 1465년,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토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았다. 토미코는 야심이 큰 여성으로, 자신의 아들을 쇼군으로 만들려 했다. 후계 문제는 막부의 최고 실력자들을 양분했다.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요시미를 지지했고, 그의 라이벌 야마나 소젠은 요시히사를 지지했다.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은 각각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슈고 다이묘 가문이었다. 호소카와 씨는 8개국의 슈고를 겸임했고, 야마나 씨는 한때 11개국을 지배하여 "6분의 1 전하"라 불렸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 후계 문제는 단순한 가정사가 아니라 전국의 다이묘들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는 정치적 갈등이 되었다. 각 다이묘들도 자신들의 내부 갈등을 이 대립에 투영했다. 1467년 1월,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 호소카와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가 이끄는 서군이 교토 시내에서 격돌했다. 오닌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오닌의 난은 11년간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교토는 전쟁터가 되어 황폐화되었다. 양군 합쳐 16만 명 이상의 병사가 교토에 집결했다. 처음에는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였지만, 점차 의미를 잃고 끝없는 소모전이 되었다.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은 불타고, 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원들이 약탈당했으며,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전쟁은 교토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방에서 슈고 다이묘들과 국인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웠다. 1473년,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모두 사망했다. 두 거물이 죽었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왜 싸우는지도 모른 채 관성적으로 전쟁을 이어갔다. 1477년, 양측은 지쳐서 결국 휴전했다. 그러나 승자는 없었다. 요시미는 결국 출가했고, 요시히사는 제9대 쇼군이 되었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었다. 막부는 더 이상 전국을 통제할 수 없었다. 교토는 폐허가 되었고, 귀족들과 문화인들은 지방으로 흩어졌다.


오닌의 난은 일본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전쟁 이후 일본은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슈고 다이묘 체제는 붕괴하고 센고쿠 다이묘 체제가 등장했다. 슈고 다이묘들은 막부에 의해 임명된 지방 총독이었지만, 센고쿠 다이묘들은 실력으로 영지를 장악한 독립 군주들이었다. 하극상(下克上)의 풍조가 만연했다. 하급 무사가 주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호조 소운은 원래 이세 신쿠로라는 무명의 낭인이었지만, 오다와라 성을 장악하고 간토 지방의 강자가 되었다. 사이토 도산은 유채꽃 기름 장수에서 시작하여 미노 국의 다이묘가 되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하급 무사에서 야마토 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의 성공은 혈통이나 명분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의 능력과 야심에 의한 것이었다. 실력만이 유일한 기준이었고, 전통적 권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를 독립 국가처럼 운영했다. 그들은 분코쿠호(分國法)라는 독자적인 법률을 제정했다. 다케다 신겐의 "고슈 법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마가와 가나메쓰기", 호조 씨의 "고호조 씨 목록"은 영지의 행정, 사법, 군사를 상세하게 규정했다. 이들은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여 재정을 확보했다. 이와미 은광, 이쿠노 은광, 사도 금광에서 생산된 귀금속은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뒷받침했다. 난공불락의 산성을 축조하여 영지를 방어했다. 이전의 평지 저택과는 달리, 산 정상에 석축을 쌓고 해자를 파서 요새화했다. 조카마치(城下町)라는 성 아래 도시가 발전했다. 다이묘들은 상인과 장인을 불러 모아 성 주변에 정착시키고 특권을 부여했다. 라쿠이치 라쿠자(樂市樂座) 정책으로 상업 독점을 폐지하고 자유 경쟁을 장려했다.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분열과 전쟁은 경제적 활력을 가져왔다. 각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경쟁했고, 이는 농업 기술의 발전, 상업의 번영, 도시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는 명목상 존속했지만 실권은 거의 없었다. 제9대 쇼군 요시히사는 1489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10대 요시타네는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갈등을 빚다가 1493년 쫓겨났다. 이것은 메이오 정변으로 불리는데, 쇼군이 자신의 신하에게 폐위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요시즈미를 제11대 쇼군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마사모토가 1507년 암살되자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요시타네는 오우치 요시오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1508년 교토로 돌아와 다시 쇼군이 되었다. 요시즈미는 쫓겨났다. 쇼군의 지위가 이렇게 오락가락한 것은 막부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제12대 요시하루, 제13대 요시테루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쇼군은 유력 다이묘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1565년, 요시테루는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쇼군이 또다시 시해당한 것이다.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가 제15대 쇼군이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다. 요시아키는 여러 다이묘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결국 오다 노부나가가 응답했다. 1568년, 노부나가는 교토에 입성하여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했다. 처음 몇 년간 두 사람은 협력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점점 더 독단적으로 행동하자 요시아키는 불만을 품었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다이묘들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이 나가마사, 다케다 신겐, 혼간지 겐뇨 등이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이를 하나씩 격파했다. 1573년,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요시아키를 추방했다. 요시아키는 명목상 1588년까지 쇼군 칭호를 유지했지만, 1573년이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 종말로 간주된다. 237년간 지속된 무로마치 막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무로마치 막부의 종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 즉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전통적 권위를 무시하고 실력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혁신적인 군사 전술, 경제 정책, 그리고 냉혹한 정치력은 일본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급서한 후, 그의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뒤를 이었다. 히데요시는 1590년 일본 전역을 통일했다. 농민의 아들에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의 성공은 무로마치 시대의 사회적 유동성이 극한까지 발전한 결과였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하여 1603년 에도 막부를 열었다. 에도 막부는 무로마치 막부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다이묘들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로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약화시켰다. 에도 막부는 260년 이상 지속되며 일본에 전례 없는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의 유산은 단순히 정치적 실패의 교훈에 그치지 않는다. 이 시대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금각사와 은각사로 대표되는 건축, 노와 교겐이라는 공연 예술, 수묵화와 정원 예술, 다도와 이케바나, 그리고 와비사비라는 미학적 원칙은 모두 무로마치 시대에 확립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에도 시대에 더욱 세련되고 대중화되었다. 센노 리큐는 무라타 슈코의 다도를 완성하여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라는 정신을 확립했다. 하세가와 도하쿠와 가노 에이토쿠는 수묵화와 채색화를 융합하여 장엄한 장벽화를 창조했다. 고보리 엔슈는 정원 예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 모든 발전은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무로마치 시대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졌고, 관개 시설의 개선으로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수차와 비료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이는 인구 증가로 이어졌고,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이 시장에 나오면서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 명의 동전이 널리 유통되었고, 금과 은도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환전상과 고리대금업자, 창고업자가 등장하여 금융업의 기초를 닦았다. 도소(土倉)라 불린 주조업자들은 술을 빚는 동시에 담보 대출업을 겸했다. 교토의 사카이, 오사카의 전신인 이시야마, 그리고 하카타는 상업 도시로 번영했다. 특히 사카이는 36인의 회합중이 운영하는 자치 도시로서 공화제적 성격을 띠었다. 이곳은 명과의 무역, 류큐를 통한 동남아시아와의 교역, 그리고 후에 포르투갈과의 남만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상업적 발전은 에도 시대 일본 경제의 번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무로마치 시대는 심오한 변화를 경험했다. 선종은 무사 계급을 넘어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임제종과 조동종이 발전했는데, 이들은 엄격한 좌선 수행을 강조하면서도 일상생활 속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처럼, 일상의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일본인의 생활 태도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는 에도 시대의 "이키(粹)"라는 미학과 장인 정신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정토진종을 중심으로 한 민중 불교도 크게 성장했다. 렌뇨가 이끈 잇코잇키(一向一揆)는 종교 운동인 동시에 사회 운동이었다. 가가 국에서는 잇코슈 신자들이 슈고 다이묘를 몰아내고 거의 100년간 자치를 실현했다. 이러한 민중 조직의 경험은 에도 시대의 무라(村) 자치와 상인 길드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국제 관계에서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이 동아시아 해양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시기였다. 명과의 감합 무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문화 교류의 통로가 되었다. 류큐 왕국은 명,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의 중심이었고, 일본 상인들과 왜구들도 이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했다. 왜구는 초기에는 규슈의 무사들이 주축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중국인과 조선인도 합류하여 국제적 해적 집단이 되었다. 1543년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조총을 전래했고, 이는 전국시대 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다케다 기마군단을 격파한 것은 이 새로운 무기의 위력을 보여준다.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도착으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고, 규슈의 여러 다이묘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러한 국제적 개방성은 에도 시대 초기까지 지속되다가 쇄국 정책으로 전환되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국제 교류 경험은 19세기 일본이 다시 세계로 나아갈 때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도 무로마치 시대의 중요한 유산이다. 칼 제작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했다. 마사무네, 무라마사, 요사미츠 같은 전설적인 도공들이 만든 일본도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무사의 영혼이자 예술품으로 여겨졌다. 도검의 날문(刃文), 지철(地鐵)의 결, 그리고 전체적인 균형은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일본도는 실전 무기보다는 신분의 상징이자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시되었다. 도자기 제작도 발전하여 세토, 시가라키, 비젠, 단바, 이가, 에치젠의 육고요가 형성되었다. 특히 다도의 발전과 함께 다완 제작이 중요해졌고, 조선에서 건너온 도공들의 기술이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강제로 끌려온 도공들은 사쓰마, 아리타, 하기 등지에 정착하여 일본 도자기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건축에서는 쇼인즈쿠리 양식이 확립되었다. 도코노마(床の間)라는 장식 공간, 치가이다나라는 선반, 쇼지로 구분된 방들이 특징인 이 양식은 에도 시대 무사와 상류층 주택의 표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일본 전통 건축의 기본 형식으로 남아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학도 주목할 만하다. 렌가(連歌), 즉 연작 와카가 크게 유행했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5-7-5와 7-7의 구를 이어가는 이 형식은 협동 창작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소기(宗祇)와 신케이(心敬) 같은 렌가 대가들이 나왔고, 렌가 모임은 계층을 초월한 사교의 장이 되었다. 이는 에도 시대 하이카이 렌가로 발전했고, 마쓰오 바쇼에 의해 하이쿠라는 독립된 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오토기조시(御伽草子)라는 짧은 이야기들도 등장했는데, 이는 그림과 함께 제공되어 일반 대중도 쉽게 즐길 수 있었다. 교훈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 이야기들은 에도 시대 대중 문학의 선구가 되었다. 교겐(狂言)도 발전했는데, 이는 노와 노 사이에 공연되는 희극으로, 서민의 삶을 다루며 풍자와 해학이 넘쳤다. 교겐은 일본 코미디 전통의 뿌리가 되었고, 에도 시대의 가부키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로마치 막부를 역사 속에 위치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 사회가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가마쿠라 막부가 귀족 사회에 대한 무사 정권의 승리를 의미했다면, 무로마치 막부는 무사 사회 내부의 권력 분산과 재편을 경험한 시대였다. 중앙집권적 슈고 다이묘 체제에서 분권적 센고쿠 다이묘 체제로의 전환, 농업 중심 경제에서 상업이 중요해지는 경제 구조의 변화, 귀족 문화와 무사 문화의 융합, 그리고 선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신 세계의 확립. 이 모든 변화가 무로마치 시대에 일어났다. 에도 막부는 이러한 변화를 토대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깊은 교훈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역사는 직선적으로 진보하지 않으며, 쇠퇴와 발전, 혼란과 창조는 동시에 일어난다. 정치적 약화가 반드시 문명의 쇠퇴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권력의 공백은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을 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센고쿠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경쟁하며 발전을 추구한 것은, 강력한 중앙 정부 아래서는 불가능했을 지역별 다양성과 혁신을 낳았다. 하급 무사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린 것은 사회적 활력과 능력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람들은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다도와 선정의 고요함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역설적 공존이야말로 무로마치 시대의 본질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토를 방문하여 금각사의 찬란함과 은각사의 고요함을 경험할 때, 료안지의 석정 앞에서 명상에 잠길 때, 노 공연장에서 500년 전의 예술을 목격할 때, 다실에서 차 한 잔을 음미할 때, 우리는 무로마치 시대와 직접 만나고 있다. 그 시대의 혼란과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시대가 창조한 아름다움과 지혜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무로마치 막부는 237년 만에 사라졌지만, 그 시대의 문화는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고 있다. 권력은 덧없지만 문화는 영원하다는 진리를, 정치적 실패가 문화적 성공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무로마치 시대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명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로마치 막부를 공부하는 이유이며, 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가 일본 역사에서, 그리고 인류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AC%B4%EB%A1%9C%EB%A7%88%EC%B9%98%20%EC%8B%9C%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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