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후반, 일본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나라 시대의 수도 헤이조쿄에서는 강력해진 불교 사원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며 천황권을 위협했다. 특히 쇼토쿠 천황 시대의 승려 도쿄는 천황의 총애를 얻어 태정대신에까지 오르며 황위를 노리려 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740년에는 후지와라노 히로쓰구가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쇼무 천황은 이를 피해 야마시로, 나니와, 시가라키를 전전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잦은 천도와 대불 건립 같은 거대 공사는 재정을 압박했고, 역병과 천재지변은 끊이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격화되었고, 율령제는 이미 현실과 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자 780년 즉위한 간무 천황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는 우선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를 단행했지만, 공사 책임자였던 후지와라노 다네츠구가 암살되고 이를 사주했다는 혐의로 친동생 사와라 친왕이 유배 도중 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원령에 대한 두려움과 더욱 완벽한 새 출발의 필요성을 느낀 간무 천황은, 794년 다시 한번 천도를 결행했다. 새로운 수도의 이름은 헤이안쿼, 즉 '평안의 도읍'이었다.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 만든 헤이안쿄는 동서로 4.5킬로미터, 남북으로 5.2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계획도시였다. 북쪽 중앙의 황궁으로부터 남쪽으로 곧게 뻗은 주작대로는 이 도시의 질서와 위엄을 상징했다. 천황은 헤이안쿄에 사찰 건립을 제한함으로써 승려들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고자 했다. 간무 천황의 이러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약 390년에 걸친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대를 우리는 헤이안 시대라 부르며, 이는 1185년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이어진 일본 역사상 가장 우아하고도 모순적인 시기였다.
헤이안 초기, 천황은 나라 시대부터 이어진 율령제를 기반으로 중앙집권적 통치를 이어가고자 했다. 간무 천황은 정치권력을 강화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천황 중심의 정치를 회복시키는 듯 보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이어서 에미시 정벌을 추진하며 동북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838년을 마지막으로 견당사 파견이 중단되면서, 일본은 외부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이르면 율령제는 현실과의 괴리가 극심해졌다. 왕토사상과 토지공령제라는 율령제의 핵심은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다. 개인들의 능력 차이, 귀족 지방관의 탐욕, 개척지 귀속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권력자들은 개척지를 약탈했고, 국가의 과도한 수탈에 시달린 토지 경작자들은 대귀족이나 대사원에 자신의 토지를 바치며 예속되는 길을 택했다. 반전수수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유력 귀족층과 대사원들이 소유한 장원은 나날이 증대되어 갔다.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별 지배체제에서 토지 중심 과세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방침 변경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민간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현지에 부임하는 수령이 이를 총괄하는 새로운 왕조국가체제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전면에 등장한 세력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를 시조로 하는 이 가문은 645년 다이카 개신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후지와라라는 가바네를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다이호 율령 제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후지와라 북가는 황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신하로서 최초로 섭정에 오르면서 섭관정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섭정은 천황이 미성년일 때, 관백은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도 정사를 보좌하는 직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천황을 대신해 정치 실권을 장악하는 위치였다. 요시후사의 동생 후지와라노 모토쓰네는 880년 최초의 관백이 되어 이 체제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들은 딸들을 천황의 비로 들여보내 외조부가 됨으로써 권력을 세습했다. 가문에 따른 관위 임명이 고착화되었고, 중앙 권력은 후지와라 가문과 황족 가문이 장악했다.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은 11세기 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천황의 중궁으로 들여보내며 황실의 외조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016년에는 섭정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그가 달을 보며 읊었다는 와카는 그의 권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세상은 내 세상인 듯, 보름달에 이지러진 곳 하나 없도다." 이 노래는 섭관정치 전성기의 오만함을 상징했다. 1025년 어느 대신은 천하의 땅이 송두리째 섭관 소유가 되어 국가의 땅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 중심의 평화로운 시대는 그 이면에 깊은 모순을 품고 있었다. 중앙권력이 후지와라 섭관가에게 집중되어 장원을 기진받아 일본 최대의 장원 소유 귀족으로 성장했기에,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일부 천황들이 개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939년, 이러한 모순은 마침내 폭발했다. 간토 지역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켜 히타치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신황이라 칭했다. 같은 시기 서해에서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해적들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쇼헤이·덴교의 난이었다.
비록 이 반란들은 940년과 941년에 각각 진압되었지만, 이는 중앙 정부가 지방의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정치에 불만을 품은 하급 귀족들의 반란과 도적들이 설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커진 정치세력이 바로 무사 계급이었다. 무사 계급의 성장은 헤이안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었다. 11세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변모했지만, 지방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만큼 막강하지는 못했다.
지방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호족과 부농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지키기 위해 무장했다. 처음에는 지방 호족을 위해 움직이던 이들은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황실에서 탈락해 지방으로 내려온 방계 후손, 특히 겐지와 헤이케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반란이 일어나면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했고, 이 과정에서 토지를 소유한 지방 무사들과 지방 권력을 쥔 유력 무사 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했다. 중앙의 후지와라 섭관정치는 이런 변화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의 세제 개편은 봉건화를 더욱 촉진했다.
11세기 후반, 섭관정치에 맞서 새로운 정치 형태가 등장했다. 1086년 시라카와 천황이 퇴위 후에도 상황으로서 정치를 주도하는 원정을 시작한 것이다. 원정은 천황이 퇴위 후 상황이 되어 자신의 직계 자손을 천황에 앉히고 실권을 행사하는 체제였다. 이는 후지와라 가문의 외척 정치에 대항하여 천황가가 독자적인 경제 기반과 무력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시라카와, 도바, 고시라카와 상황 등이 원정을 펼쳤고, 이 시기에 장원의 일원적 집적과 고쿠가료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는 새로운 체제가 확립되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헤이안 시대는 문화적으로는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했다. 특히 9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와의 공식 교류가 중단되면서 일본 독자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838년 견당사 파견이 중단된 이후, 일본은 외부 영향에서 벗어나 이른바 '국풍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나 문자의 발달이었다. 한자에서 파생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일본어의 표기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일본 고유의 문학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헤이안 시대는 문학사적으로 여성문학의 전성기로 일컬어진다. 섭관정치 체제 속에서 궁중 문화가 발달하면서 일기문학, 수필문학, 모노가타리 문학 등 가나 여성 산문문학이 활짝 꽃을 피웠다. 974년경 미치쓰나의 어머니가 쓴 『가게로 일기』, 996년경 세이쇼나곤이 남긴 『마쿠라노소시』, 그리고 무엇보다 1008년경 무라사키 시키부가 창작한 『겐지모노가타리』가 그 정점에 있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하급 귀족 출신으로, 20대 후반에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평판이 높아지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인 중궁 쇼시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었다. 궁중에 들어간 그녀는 미치나가의 지원 아래 이야기를 계속 썼고, 마침내 전편 54권으로 구성된 『겐지모노가타리』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히카루 겐지라는 귀족 남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통해 연애, 영광과 몰락, 정치적 욕망, 권력투쟁 등 헤이안 시대 귀족사회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내면 동기를 충실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겐지모노가타리』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 소설로 평가받는다. 등장인물 간의 심리와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작가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었고, 이는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다. 작품이 담아낸 세계는 단순한 귀족들의 연애담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헤이안 시대 귀족사회의 모든 것이 녹아 있었다. 화려한 쥬니히토에를 겹쳐 입은 여인들, 땅에 끌릴 정도로 기른 긴 머리, 향을 피우고 와카를 주고받는 우아한 구애 방식, 그리고 권력을 둘러싼 미묘한 정치적 긴장감.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모노노아와레'라는 독특한 미의식을 체현했다. 이는 사물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순간에 느끼는 깊은 감동을 뜻하는 말로, 헤이안 문학의 정수를 이루는 정서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헤이안 귀족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옷의 색상 조합, 달빛 아래 피어나는 대화, 꽃을 보며 느끼는 감상 등 모든 것이 섬세한 감수성으로 포착되었다.
헤이안 시대의 종교적 풍경 역시 복합적이었다. 황실과 후지와라 가문의 후원 아래 엔랴쿠지, 도지, 도다이지, 고후쿠지 같은 주요 사찰들은 막대한 영지를 소유한 권문세력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현교와 신흥 밀교가 공존하며 왕실과 귀족세력의 후원을 받아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헤이안 시대 불교를 '현밀체제'라 부르기도 한다. 사이초가 창시한 천태종과 구카이가 전한 진언종 같은 밀교는 복잡한 의례와 주술적 요소로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시에 정토신앙이 사회 전 계층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특히 1052년이 말법의 첫해가 된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귀족들은 자연재해와 사회적 혼란을 말법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56억 7600만 년 후 미륵보살이 다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는 예언을 믿으며, 사경한 경전을 경총에 매납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안녕을 기원했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1053년에 건립한 뵤도인 호오도는 이러한 정토신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연못 위에 마치 극락정토가 지상에 내려온 듯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불교와 함께 일본 고유의 신토 신앙도 여전히 강력했다. 헤이안 귀족들은 일상의 모든 일에서 음양사에게 길흉을 점쳤고, 자신이 있는 곳이 음양도상 불길한 방위라면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질병이나 흉사는 모노노케의 짓이라 여겨 승려를 초빙해 경을 읽고 귀신을 퇴치하게 했다. 신불습합이라는 독특한 종교 현상, 즉 신토의 신과 불교의 부처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관념도 이 시대에 구체화되었다. 산악신앙도 발달하여 수행승들이 산에 올라 산령을 모시는 관습이 생겨났고, 이는 후대 수험도라는 독자적 민속종교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찬란한 문화의 이면에서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지면서 무사들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했다. 1156년 호겐의 난과 1159년 헤이지의 난을 거치면서 무사들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한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헤이케를 이끌고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키요모리는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하여 자신의 딸을 천황의 중궁으로 들여보냈고, 외손자를 천황으로 옹립했다. 송나라와의 무역을 주선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수도 교토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확립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이었던 안토쿠 천황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했다. 최초의 무가정권인 다이라 정권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을 혼자 떠안았기에 곧 전국으로 확대된 내란 속에 붕괴하고 말았다.
1180년, 동국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며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키요모리 사후 헤이케는 급속히 쇠락했고,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뛰어난 전략과 무용으로 겐지는 승승장구했다. 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교토에 입성했고, 1184년 요시츠네가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헤이케를 격파했다. 1185년 단노우라 해전에서 헤이케는 최종적으로 패배했고, 어린 안토쿠 천황은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이 전쟁의 비극은 후에 『헤이케모노가타리』로 기록되어 일본 문학의 또 다른 걸작이 되었다.
1185년,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전국에 슈고와 지토를 설치할 권한을 조정으로부터 얻어냈다. 슈고는 각 지역의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는 직책이었고, 지토는 장원과 공령지의 관리를 맡았다. 이는 무사들이 공식적으로 전국적 지배권을 인정받은 것을 의미했다. 1192년 요리토모는 정이대장군, 즉 쇼군에 임명되면서 가마쿠라 막부를 정식으로 개창했다. 비록 정치적 권력은 막부로 넘어갔지만, 헤이안쿄는 여전히 황궁과 천황이 있는 공식 수도로 남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그 상징적 지위를 유지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일본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요리토모는 조정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무사 정권을 세웠고, 주종관계로 맺어진 고케닌들에게 본령안도와 신은급여를 통해 충성을 확보했다. 1221년 조큐의 난에서 고토바 상황이 막부 타도를 시도했으나 막부군에 패배하면서, 조정에 대한 막부의 정치적 우위가 확립되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직계는 단절되고 호조 가문이 싯켄으로서 실권을 장악했지만, 무사 정권이라는 체제는 확고히 자리 잡았다.
헤이안 시대의 문화적 유산은 가마쿠라 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일본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귀족문화는 새로운 무사 계급에게 교양의 모델이 되었고, 『겐지모노가타리』는 계속 읽히며 후대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가나 문자는 일본어 표기의 기초로 확립되었으며, 신불습합의 종교관과 모노노아와레의 미의식은 일본 문화의 핵심 정서로 계승되었다. 정토신앙은 가마쿠라 시대에 호넨과 신란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대중불교로 자리 잡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후 1333년까지 약 150년간 지속되었다. 13세기 두 차례의 원나라 침략을 막아내면서 일본인의 국가의식이 형성되었고, 막부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외국과의 전쟁에서는 은상을 충분히 줄 수 없었기에 무사들의 불만이 쌓였고, 호조 가문의 독재에 대한 반발도 커졌다. 결국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반막부 운동에 호응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를 거쳐 전국시대, 에도 시대까지 무사 정권은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약 700년간 계속되었다.
390년에 걸친 헤이안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우아한 귀족문화가 꽃피고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이 탄생한 문화의 황금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율령제의 붕괴, 귀족의 부패, 지방의 혼란, 무사 계급의 성장이라는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진행된 과도기였다. 찬란한 귀족문화 뒤편에는 장원제의 확대와 농민들의 고통이 있었고, 『겐지모노가타리』의 우아한 문장 이면에는 권력을 둘러싼 냉혹한 투쟁이 있었다. 말법사상과 정토신앙의 확산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낀 불안과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헤이안 시대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일본 문명의 근간이 되었고, 그 영향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번역되고 재해석되며,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겐지모노가타리』를 현대어로 번역하며 이 작품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히라가나로 대표되는 가나 문자는 일본어 표기의 기초가 되었고, 쥬니히토에와 같은 복식은 천황가의 전통 의례에서 여전히 사용된다.
신불습합의 종교관은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내렸다. 한 사람이 신사에서 신토 의례를 치르고 사찰에서 불교 의식을 행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일본의 종교적 관용성은 헤이안 시대에 확립된 것이다. '모노노아와레'로 표현되는 미의식은 일본 문화의 핵심 정서로 계승되었다. 벚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감상, 쓸쓸한 가을 달빛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덧없음 속에서 빛나는 순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는 오늘날 일본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헤이안 시대에 발전한 와카는 이후 일본 문학의 주류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마쿠라 시대의 『신고킨와카슈』, 에도 시대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가 문학의 전통은 헤이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사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교양 있는 무사라면 와카를 읊을 줄 알아야 했고, 귀족문화의 세련됨은 무사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졌다.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비록 무사들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그 문체와 정서에는 헤이안 문학의 영향이 깊이 배어 있다.
헤이안 시대의 건축과 예술 역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침전조 양식이라 불리는 귀족 저택의 건축 양식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일본 건축의 전형을 만들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정원을 통해 자연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후 일본 정원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뵤도인 호오도에 안치된 아미타여래상을 조각한 조초의 작품은 일본 불상 조각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기법은 후대 불상 제작에 표준이 되었다.
야마토에라 불리는 헤이안 시대의 회화 양식은 중국 회화와 구별되는 일본 고유의 미술 전통을 확립했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 같은 두루마리 그림은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먼 선조라고도 할 수 있다. 헤이안 시대에 발전한 서예 역시 일본 서도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특히 오노노 도후, 후지와라노 사리, 후지와라노 유키나리를 삼적이라 부르며 서예의 모범으로 삼았다.
헤이안 시대의 정치 체제 역시 장기적으로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섭관정치와 원정은 천황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다른 권력자가 실권을 행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는 가마쿠라 시대 이후 막부와 천황이 공존하는 이중 권력 구조의 선례가 되었다. 천황은 권위의 상징으로, 실제 정치는 쇼군이나 섭관이 담당하는 구조는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 정치의 기본 틀이었다. 명목상의 권위와 실질적 권력의 분리라는 독특한 정치 문화는 헤이안 시대에 그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장원제가 낳은 봉건적 관계는 이후 일본 사회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 상하 관계의 엄격함, 충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무사 사회로 이어졌고, 에도 시대의 신분제와 번제로 발전했다. 심지어 현대 일본 기업 문화에서도 상하관계의 엄격함과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형태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헤이안 시대의 무사 계급 성장은 일본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사들은 단순한 군사력이 아니라 독자적인 가치관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충성, 명예, 무용을 중시하는 무사도 정신은 가마쿠라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씨앗은 헤이안 말기에 뿌려졌다. 무사들은 실력과 공적을 통해 출세하는 새로운 사회 이동의 경로를 만들었고, 이는 귀족의 혈통 중심 사회와는 다른 능력주의적 요소를 일본 사회에 도입했다.
흥미롭게도 헤이안 시대의 문화적 유산은 무사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신화화되었다. 귀족들의 우아한 삶은 잃어버린 황금시대로 이상화되었고, 무사들도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헤이안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여겼다. 『겐지모노가타리』는 무사 시대에도 계속 읽히며 교양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전쟁과 혼란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헤이안 시대의 평화롭고 세련된 문화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역사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함께 품는다. 헤이안 시대라는 이름 자체가 '평안'을 의미했지만, 그 평안은 오직 소수 귀족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장원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농민들, 도적과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지방 주민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하급 귀족들에게 헤이안 시대는 평안과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더욱 빛을 발했고, 후세에 전할 위대한 문화유산이 탄생했다.
헤이안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귀족문화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했던 시대의 고뇌와 변화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율령제에서 무사 정권으로의 이행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 속에서, 일본은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겐지모노가타리』를 읽고 뵤도인을 방문하며 헤이안 시대의 미의식에 감동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의미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C%9D%B4%EC%95%88_%EC%8B%9C%EB%8C%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