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미술관/물결서사/천사의 벽화길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일지라도, 활동하기에는 매우 좋은 기온이 찾아왔도다! 오만가지 생각하기 대표주자답게 쉽사리 엉덩이를 일으키지 못하는 집순이지만, 몇 년 전부터 가끔씩이나마 가까운 곳이라도 혼자 떠나보고 있다. 맨 처음 혼자 여행을 시작했던 것은 인생 가장 밑바닥을 쳤던 시기로, 내가 살면서 절대 안 하겠다고 생각했던 일 또는 아주 먼 미래로 미뤄놨던 일을 일부러 억지로라도 시도해 보자고 마음먹었던 휴직 기간 때였다. 그때 시도했던 몇몇 일들은 막상 해 보니 생각보다 별 게 없구나 싶었다. '의외로 엄청 좋았다!'라는 감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절대'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금기시할 일도 아니었다는 결론. 혼자 떠났던 여행도 혼자 영화 보기만큼 확실히 편하고, 깊이 생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앞으로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내 취향에 맞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 떠나는 것이 좀 더 간절해졌던 것은 2년 전에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았을 때였다. 심각한 불치병은 아니었지만, 확진을 위해 20일 넘게 검사에 검사에 검사를 거치는 동안 몸도 마음도 꽤 지쳐버렸다. 정기적인 추적 검사와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언젠가 시간과 돈 모두 여유가 생기더라도, 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원하는 곳에 가볼 수 없는 날이 오겠구나.'
작년 가을 큼지막하게 이것저것 사회적 연결을 해체한 나는 당분간 운동, 피아노, 읽고 쓰기 무한 반복 루틴에 돌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슬금슬금 일탈(?)의 욕구가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엄청나게 대단한 여행을 할 엄두는 나지 않는 쫄보인지라, 가까운 곳이라도 최적의 기온일 때 쪼매 움직여볼까요잉~ 싶은 마음에 앞발로 토다다닥 검색을 해본 뒤 노송동으로 훌쩍 떠나보았다.
첫 번째 들른 곳은 이번 타박타박의 주요 목적지인 '뜻밖의 미술관'. 전시를 좋아하는 것에 비해서는 많이 다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프리뷰전을 하고 나서 작가별로 개인전을 여는 것이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위의 두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데, 최은 작가님의 '심상'은 어린 시절에 발을 담그고 송사리와 열심히 눈싸움을 했던 집 앞 개울이 슈루루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박정애 작가님의 '캔버스에 유채'는 <텐트 밖은 유럽>에서 봤던 눈 덮인 마을이 떠올라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글도 음악도 그림도 여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참 중요하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던 시간.
전시를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하고 방명록까지 야무지게 쓴 다음 둘러본 곳은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물결서사'. 노송동을 검색하면서 알게 된 곳이긴 하지만, 이번 달에 열릴 북토크 때문에 더 관심이 갔던 곳이다. 꽤 다양한 분야의 책이 많이 있어서 찬찬히 둘러보던 중, 책방지기께서 오늘 2층이 비어 있으니 책 구매하시고 위에서 천천히 보셔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햇살만큼이나 친절하고 따스한 안내를 해 주셨건만! 2층 공간도 매우 궁금했건만! 책 한 권도 사려면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 죄송해요오오오~눈물만 또르르...허허허허허허허
사실 이쪽 동네는 원래 '선미촌'이라 불리던 성매매집결지였는데, 몇 년 전에 예술촌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그런데 근처 골목길을 걷다 보니, 쇠락하기도 했고 기존 건물의 원형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단층 건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방들, 애매한 빛깔의 두꺼운 커튼. 내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접했던 성매매업소의 현장이 머리에 생생하게 떠오름과 동시에 드는 생각. 장래에 '매춘'을 하는 것이 꿈인 아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 길에 접어들게 되기까지 했을 그의 수많은 선택들과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짐작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조차 너무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하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 하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거나 불명확한 감정들이 골목길을 빠져나온 뒤에도 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뜻밖의 미술관과 물결서사를 둘러보고 열심히 타박타박 걸어서 천사의 벽화길에 도착했다. 겨울 다음에 바로 여름인 거냐고 버럭 화를 낼 만큼 더운 날씨라 살짝 지치기도 했지만, 조용한 골목길을 걷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졌다(사람이 없어서 혼자 조용히 둘러보기는 좋았는데, 그만큼 누군가 찾지 않는 곳이라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드는 이중적인 감정들). 노송동 천사의 벽화길은 첫 번째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25년 동안 매년 노송동을 찾아 기부하는 얼굴 없는 천사를 기리며 만든 곳이다. 벽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래고 흐려졌지만, 기부 천사의 마음과 뜻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오히려 선명하게 남겠지. 봉봉한가도 궁금했던 장소이고 영업시간은 맞는 것 같은데, 쫄보는 물건 안 살 거면 못 들어가겠어요.=_=ㅋㅋㅋ(물결서사는 그나마 문이 열려 있어서 쫄보가 용기를 내서 알짱대다 옴;;;)
가깝지만 한 번도 내 발로 가본 적은 없는 동네여서 아주 낯선 타지로 여행을 온 듯했다. 뭐 안 가 봤으면 낯선 곳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눈부신 햇살과 함께 다채로운 색으로 기억에 남을 노송동 타박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