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에리세 감독님, 겸손이 과하십니다.
모두가 영화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꿈에 부풀어 영화를 만들고 가슴 설레이며 영화관을 찾던 위대한 '시네마 천국'의 시대는 끝났다. 코로나의 확산은 전통적인 영화의 종말을 가속화시켰다. 팬데믹이 종결되고 나서도 사람들은 예전만큼 신작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 마틴 스콜세지도 시네마의 죽음을 말하면서 <아이리시 맨>을 넷플릭스에서 공개해버렸다. 필름 시대에 걸작을 남겼던 위대한 작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고 2022년 장 뤽 고다르의 별세는 그 일련의 죽음의 마지막 대미와도 같았다. 하지만 빅토르 에리세는 아직 살아서 30년만에 신작을 들고 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가 묻고 있는 질문을 공유하는 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메타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소설 작가이자 영화 감독 미겔 가라이는 <작별의 눈빛>을 찍다가 남주 훌리오가 실종되자 결국 개봉하지 못하고 필름 릴을 창고에 처박아둔다. 그 후 미겔은 스페인 바닷가에 내려가 고기 잡는 범부로 살던 중 <미제 사건>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훌리오 실종 사건을 다루게 되면서 출연 제의를 받고 마드리드로 올라오게 된다. 이 프로그램을 본 간병인의 제보로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 훌리오를 찾아내지만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미겔도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미겔은 훌리오가 <작별의 눈빛>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면 기억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고 친구인 편집자 막스에게 문 닫은 근처 영화관에서 필름을 상영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막스는 이렇게 말한다: “드레이어 이후 더 이상 영화에서 기적은 없어” 여기서 막스가 얘기하는 기적은 맥락상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에서 관 속에 누워있던 잉거가 다시 일어나는 라스트 씬의 그 기적을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 기적은 어디까지나 디제시스 안에서의 기적이다. 그러나 미겔이 희망하고 막스가 만류하는 이 기적은 디제시스 바깥의 기적, 즉 영화 속의 영화인 <작별의 눈빛> 바깥에서 훌리오가 기억을 되찾는 기적이다. 이렇게 되면 막스가 말하는 기적이 영화 속의 기적인지 영화 바깥의 기적인지 혼동스럽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 에리세가 의도한 기적은 영화를 보고 영혼의 울림을 얻는 (영화사에서 몇 안되는) 숭고한 기적의 순간들일 것이다: 에릭 로메의 <녹색 광선>에서 해지는 수평선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는 순간,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올 때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순간,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에서 반 고흐가 밀밭 속으로 걸어들어갈때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변하는 순간.
라스트 씬에서 <작별의 눈빛>을 본 훌리오의 표정은 기억을 되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애매하다. 끝까지 물음표를 띄운채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린 빅토르 에리세가 수줍게 하고 싶었던 질문은 사실 ‘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까’가 아니었을까? 결국 훌리오를 찾아내어 그의 기억을 살리는 줄거리는 사실 맥거핀, 즉 떡밥에 불과하고, 미겔이 아무도 찾지 않던 본인의 영화 <작별의 눈빛>을 몇십년만에 단 6명 앞에서 상영하게 되는 여정이 진짜 주제라 할 수 있다. 단지 극소수이더라도 필름 시대의 역사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영화를 보고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화는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 에리세 감독님, 겸손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닌가요? <벌집의 정령>으로 영화사의 전설이 되신 분이 당신의 영화가 잊혀질까봐 걱정하다뇨.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땅에서 당신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감독님은 칸느에서 경쟁부문이 아니라 프리미어로 초대받아서 화를 내셨다죠? 결국 영화의 메시지와는 달리 내심 상을 바라셨던 거 아닌가요? 그리고 필름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디지털로 영화를 찍다니 모순 아닌가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 소품 같은 진부한 클리셰를 넣으실 거였다면 적어도 35mm 필름으로 찍어야 더 어울렸을 것 같네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거장의 귀환이라는 후광과 숨막히게 아름다운 라스트 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가의 태도와 영화의 메시지가 모순되는 점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