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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당신의 뇌가 만들어내는 거짓 기억

by 엠에스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 당신의 뇌가 만들어내는 거짓 기억>


우리는 흔히 ‘기억’을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복원하는 사진이나 비디오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의 관점에서 기억은 결코 정지된 기록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맥락, 감정 상태, 사회적 관계, 그리고 문화적 기대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이야기에 가깝다. 인간의 기억은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매 순간 ‘재조립되는 내러티브’인 것이다.


기억은 ‘재생’이 아닌 ‘재구성’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 바틀렛(Frederic Bartlett) 은 이를 가장 먼저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낯선 문화권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시간이 지난 후 재현하게 했는데, 많은 이들이 원래 이야기의 세부 요소를 자신이 익숙한 문화적 틀과 가치관에 맞게 바꾸어 기억했다. 그는 이 현상을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재구성이다(reconstructive memory)”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실제로는 그때의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지 틀(schema) 안에서 과거를 다시 해석하고 편집하는 것이다.


이때 ‘스키마’는 일종의 인지적 틀, 즉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골격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이를 기존의 스키마에 끼워 맞추려 하며, 부합하지 않는 정보는 왜곡하거나 생략한다. ‘교실’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책상, 칠판, 교사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실제로 칠판이 없었던 특별 교실이라 해도, 우리는 “교실에는 칠판이 있어야 한다”는 스키마에 따라 기억을 보정해 버린다. 이러한 ‘인지적 경제성’은 우리가 세상을 빠르게 이해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사실을 허구로, 허구를 사실로 바꾸는 위험한 효율성이기도 하다.


언어와 암시가 만든 ‘거짓의 현실’


기억 조작의 대표적 사례로는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오류 정보 효과(misinformation effect)’ 연구가 있다. 그녀는 교통사고 영상을 보여준 뒤, “차가 가볍게 부딪쳤을 때(hit)”와 “세게 들이받았을 때(smashed)”라는 단어 하나만 바꿔 질문했다. 그 결과, ‘smashed’라는 표현을 들은 집단은 실제보다 더 빠른 속도와 심한 파손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던 깨진 유리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단어 하나가 기억을 조작한 것이다.


이는 단지 심리학 실험실에서의 현상이 아니다. 법정의 목격자 증언, 언론 보도, 여론 형성, 심리치료 장면 등에서 우리는 매일 이 ‘언어의 마법’에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 빨간 코트 입고 있지 않았나요?”라는 단순한 질문이 훗날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빨간 코트를 덧입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특히 권위 있는 위치(수사관, 변호사, 의사, 심리치료사)의 질문이라면, 그 암시는 기억 속에서 현실이 된다.


이와 함께 “소스 모니터링 오류(source monitoring error)”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정보의 출처를 착각하는 현상으로, TV에서 본 장면을 실제로 내가 목격했다고 믿거나,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내 경험처럼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꿈에서 본 일을 현실로 착각하거나, 책에서 읽은 아이디어를 자신의 생각으로 믿는 일 또한 흔하다. 이 오류는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역사적 왜곡이나 사회적 선동의 심리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조작된 기억, 사회를 움직이다


로프터스의 또 다른 실험, “길 잃은 아이(lost in the mall)”는 거짓 기억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녀는 참가자 가족에게 “어릴 때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는 거짓 이야기를 들려주게 했고, 실제로는 없던 사건임에도 일부 참가자들은 생생한 감정과 구체적 장면을 기억해 냈다. “기억의 실감(sense of vividness)”이 진실 여부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법정으로 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미국에서 DNA 감식으로 무죄가 밝혀진 사례의 70% 이상이 잘못된 목격자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보고가 있다. ‘확신에 찬 기억’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해준다.


심리치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1980~199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억압된 기억 치료(repressed memory therapy)’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아동기 학대 경험을 ‘기억’하게 만든 사례를 낳았다. 치료자의 무의식적 암시가 환자의 내면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무고한 이가 피해자로 몰린 사건이 적지 않았다. 기억의 조작은 개인의 심리를 넘어, 관계와 사회적 신뢰의 기반을 붕괴시킬 수 있다.


일상 속의 작은 왜곡들


사실 거짓 기억은 거대한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기억을 편집한다. 실패보다는 성공을, 비난보다는 이유를 떠올리고, 상처는 흐릿하게, 자존심은 또렷하게 저장한다. 이는 ‘진실 착각 효과(illusory truth effect)’와 맞닿아 있다. 반복해서 듣는 정보는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점차 사실처럼 느껴지는 인지적 착시를 낳는다. SNS의 알고리즘은 이런 인간의 취약점을 이용해 ‘거짓을 진실로’ 느끼게 만든다. 기억은 개인의 뇌 속에서만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사회 전체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집단적 조작의 장(場) 속에서 재편성된다.


기억의 불완전함을 자각하는 용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출처를 기록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를 명시적으로 인식하면, 출처 착각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둘째, 가능한 한 물리적 증거를 남겨야 한다.

사진, 영상, 문서 등은 인간의 주관적 기억보다 훨씬 신뢰할 만한 기록 장치다.

셋째,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의 판단은 유보하라.

감정은 사실 인식의 가장 강력한 왜곡자이기 때문이다.

넷째, 서로 다른 출처의 기억을 교차 검증하되, 집단적 암시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억의 철학 — ‘진실’이란 무엇인가


기억의 조작 가능성은 단순한 인지 문제를 넘어, 진실과 자아의 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니체는 “기억이란 망각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우리가 기억을 선택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서사적으로 재창조되는 존재임을 뜻한다. 즉, 거짓 기억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을 의미화하려는 서사적 본능의 부산물이다.


기억의 불완전함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증거일 수도 있다. 기계는 정확히 기록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한다. 다만 그 의미가 언제나 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의 허상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한계와 주관의 경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성찰이다.


맺음말 —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지혜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언제나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되는 초안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이지만, 그 기억은 매 순간 바뀌고 있다. 우리가 기억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기억과 진술도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관용과 비판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결국,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저장고가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예비하는 인간 정신의 창조적 실험장이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성찰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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