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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쌀 Dec 11. 2019

우리에게도 첫날은 있다

성지글이 되리라

11월 1일, 공덕의 오피스텔에 첫 출근하는 날. 모두 함께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대청소'라 쓰고 '입주청소'라고 불릴 만한 그야말로 청소대잔치가 시작되었다. 이런 건 미리 입주청소 전문업체를 불러 해놓아야지 레이저를 쏘아붙이려다 휑한 사무실과 상판 들리는 싸구려 책상을 보며 눈빛을 거뒀다. 


청소하는 동안 책상을 이리저리 옮기는데, 자꾸 상판만 덜컹 하고 떨어지니 민망했던지 '훈'이 말했다. 


"우리 돈 많이 벌면 마호가니 나무 책상으로 바꿉시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책상은 얼마쯤 하려나 머릿속에 숫자를 떠올리다 싱크대에 낀 묵은 때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베이킹소다가 필요한데.' 고무장갑을 낀 채 벗겨도 벗겨도 티가 안 나는 싱크대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생각했다. 


우리집도 이렇게 안 닦는데 (우씨)

'승'은 참 조용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배송 온 청소기를 조립하고, 밀대 걸레질을 하였다. 사실 했는지 모르고 내가 또 밀기도 했을 정도로 모든 걸 싹싹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심'은 널부러진 전선 보는 걸 힘들어했다. 멀티탭을 중심으로 사방에 늘어진 갖은 전기코드를 목격할 때마다 0.001초 만에 고개를 돌렸다. 못 보겠고, 안 보이게 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고'는 처음 사회에 나올 당시 누군가 고효율로 세팅해놓지 않았을까 싶은 사람이었다. '효율적이지 않다'와 '효율적이다'로 모든 상황을 1차 판단하였다. 전선정리는 그에게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심'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와중에 '훈'은 커피기구들을 세팅하였다. 그의 커피사랑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것도 대청소날 보니, '심'이 엉켜있는 전선을 보는 심경으로 나도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훈'은 못 보던 사이 더욱 깊이 있는 핸드드립 성애자가 되어 있었다(그는 커피 책도 쓴 적이 있다). 

회의실 테이블은 캠핑장에서도 쓰기 어려운 허접함을 가지고 있고(결국 프린트기 올려놓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 의자는 '최저가'라는 수식어 외에는 그 어떤 단어로도 수식하기 어려운 모양새였지만(도대체 사진은 확인하고 구입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 그에게는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오는 길에 사온 원두를 핸드드립용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곱게 갈아주었다며 투덜댔다. 


 

대청소날 '훈'이 준비해온 커피기구 



오늘 같은 날은 이디야 커피 마셨어야지

고효율 성애자 '고'가 드디어 폭발하여 핸드드립 성애자 '훈'에게 소리쳤다. 이런 날은 이디야 커피를 마셔야 한다고(사무실 건물 1층에 이디야 커피숍이 있다). '이삿날 짜장면 먹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나는 혼자 생각하며 저러다 싸우는 건 아니겠지 불안에 떨 무렵, '훈'은 목소리 파동 1도 없이 말했다. 


"나는 커피를 안 마시면 안 마셨지, 이디야 커피는 안 마셔!"


이 말이 하고 싶었나?


이들의 대화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생각 나지 않지만 지나가며 던진 '심'의 한 마디는 명확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 사무실에는 각자의 로망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훗날 '심'의 로망 실현을 위해 그에게 전선정리의 기회를 반드시 주어야겠다 다짐했다. 



다른 음식 없이 피자만 4판
샴페인 대신 막걸리



전 회사를 퇴사하고 현 사무실로 오기까지 내게는 딱 일주일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혼자 몽골여행을 가려고 티켓을 알아봤으나 중간에 껴있던 강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비사막에 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싶었는데. 꿈 같은 일이 결국 꿈으로 남았다. 


우리의 첫날 기억을 쓰는 와중에 갑자기 고비사막이 떠오르는 이 의식의 흐름은 무엇? 


이 글이 성지글이 되길 바라며, 첫 워크숍은 몽골로 가는 걸로!

참고로 브런치에 일기를 쓰고 있는지 '훈' '고' '심' '승'은 모른다. 



+ 커피 성애자의 과거

10여 년 전에 '훈'이 차려놓은 사무실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 큰 사무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실험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내 눈에는 과학실에서나 보던 그런 기계. '훈'은 그것이 더치커피를 내리는 기계라고 하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커피 한 방울, 더더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저걸 언제 모아서 후루룩 마시나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하염없이 보며 그 생각을 했었다. 아마 '고'는 이것이야말로 비효율의 끝판왕이라고 소리쳤을지 모를 광경이었다. 
 '훈'은 여전했고 여전히 '훈'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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