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o Jun 10. 2017

"나가서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와인?"

미국 보수가 진보를 상대해온 프레이밍 전략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보수가 진보를 상대해온 비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읽었다. 미국 보수가 미국 진보를 어떤 프레이밍 전략으로 상대해서 승리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지 오웰의『1984』를 읽은 후 언어로 전략을 구사하는 예가 궁금했다. PR에서는 『프로파간다』, 인간관계에서는 『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를 읽었다. 『프로파간다』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예를 접하고 싶었다. 그렇게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JTBC 손석희 앵커의 추천도서라는 띠지 없이도 읽을 이유가 충분했다.



보수는 엄격한 아버지라면, 진보는 자상한 아버지

프레이밍 전략을 이야기하기 전에, 미국 보수와 진보를 이해하는 틀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국가를 가정으로 본다. 이 비유가 자연스러운 이유는, 국가와 같이 큰 사회집단을 가정처럼 작은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보수는 엄격한 아버지가 계시는 가정, 진보는 자상한 아버지가 계시는 가정에 가깝다.


보수의 시각을 따르면 이러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훈육을 잘 받은 경우에는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이후에는 아버지가 아이의 삶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규칙을 세워서 예외 없이 적용되도록 확실한 보상과 처벌을 해야 한다.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아이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할 일이다. 응석 부린다고 해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에게 돈을 그냥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약자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에는 반대한다.

경제 정책으로 투사해보자면,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예산은 줄이고, 시장 질서에 따라 탁월한 성과를 내온 기업가와 부자의 세금은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세워진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다. 자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녀들은 군말 없이 따른다. 국방 정책에 적용해보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며, 이에 따라 국방 예산을 늘린다. 대통령은 명령한다. 대화를 시도하거나, 외교에 의존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옳지 않다.



'세금 폭탄에서 구제해드리겠습니다?'

프레이밍을 잘 드러내는 예시로 '세금 구제'가 있다. 세금 구제 법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세금의 늪에서 국민 여러분을 구제해드리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게 '과세=괴롭힘'이라는 등식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낸다. 세금이 늘면 내가 당장에 쓸 돈이 줄어들기 때문에 괴롭힘으로 볼 수도 있다. 걷어진 세금으로 모두에게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할 수 도 있다. 다만, 세금을 낮추는 정책으로 표를 얻기 위해 고의적으로 첫 번째 장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책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합니다. 과세는 고통이다. 따라서 이 고통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입니다. 이 프레임은 '고통', '영웅' 같은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조지 레이코프 저


이처럼 과세, 고통, 구제해줄 영웅 순으로 개념이 연결되면, 세금을 걷어서 투자한다는 프레임 밖의 생각은 하기 어려워진다. '세금 구제'로 이름 붙이는 순간 질문이 이렇게 바뀌기 때문이다. "세금 내면 여러분 쓸 돈이 적어지기 때문에 세금을 줄이겠습니다. 찬성하십니까?".  상대방과 식사한 후 "나가서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제가 잘 아는 바(bar)가 있는데 와인 드시러 가실래요?"라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은 2차를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거나 합의한 적이 없다. 다만 저렇게 질문하면 무의식 중에 커피와 와인 중 어느 것이 지금 내 기분에 더 맞을지를 생각하기 때문에, 프레임 밖에 있는 '가지 않는다'를 고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레이밍 전략이 이렇게나 유용하다.


내가 해왔던 큰 오해 중 하나는 프레임 재구성을 '적당한 단어 고르는 일' 정도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프레임 재구성은 무의식적으로 믿어오던 것에 선택적으로 접근해서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뇌가 하는 일의 98%는 의식 아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적합한 관념, 비유를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다. 의식하는 신념은 실제로 내가 믿어오던 것의 절반도 안된다는 점이 생경했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서 실제로 생각하는 것의 겨우 2%만 인지하고 사는 셈이다.



'세금은 우리의 공동 자산?'

그렇다면 진보 입장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주목할 점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프레임을 부정할수록 그 프레임이 활성화된다. 즉, 상대방의 언어를 써서 상대 의견을 반박하려고 할수록, 그 반박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 프레임이 강화된다. 예를 들어, '세금 구제'라는 프레임으로 주장하는 상대에게 '세금으로부터 구제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접근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세금은 더 나은 미래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공동 자산'이라는 프레임으로 응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히틀러의 선전 장관인 괴벨스가 한 것으로 전해지는 말이 이런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동은 문장 1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생각보다 언어

다르게 말해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관련된 프레임이 활성화된다. 앞서 보았듯이 '세금을 늘리면 여러분이 쓸 돈이 줄어드는데 세금 늘릴까요 말까요?'라고 물어보면 증세하자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언어는 머릿속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합하게 표현해야 한다. 내용만큼이나 표현이 중요하다. '표현이 서툴러도 진심은 언젠가 전달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보다 프레임

프레임은 사실보다 더 세다. 진실이 받아들여지려면 머리 속 프레임이 그것과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사실은 튕겨나간다. 사실을 제시한다고 해서 진보 세력이 보수 세력의 표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다. 이미 튼튼한 보수의 프레임, 엄격한 아버지로서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극빈층이 보수에게 투표하는 경우를 '사실보다 강한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현대 경제학과 외교 이론의 전제 중 하나는 '이익에 반하는 행동은 비합리적이다'라는 것이다. 즉, 유권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투표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실에서는 내 이익을 대변해줄 사람보다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 투표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 측 정책을 따랐을 때 더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이라는 정체성에 표를 던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많은 일은 옳고 그름이 아닌 선택의 문제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아버지 중에 어느 분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세금을 얼마나 내는지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선택의 문제이다. 시민으로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둘 다 그르다고 할 수 없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지금까지 내가 접해왔던 많은 주장들이 '옳다는 이유 만으로' 받아들였다. 하나의 주장이 옳으면 그 반대 주장은 그르다는 잘못된 전제하에 판단을 한 적이 적지 않다. 두 주장이 모두 그르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각 주장이 은연중에 전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일한 내용도 표현과 프레이밍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도 이 책을 통해서 진보를 '응원해주고 싶은 언더독(Underdog)'으로 프레이밍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파간다』의 저자도 '선전이라는 개념'을 선전하고 있다고 느꼈던 기억이 났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진보의 사고를 어떻게 프레이밍 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책만의 묘미였다.


JTBC 교양 프로그램인 《썰전》을 챙겨본다. 특정 사안에서는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가 절충의 여지없이 대립한다. '두 분 견해가 많이 다르구나'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는지, 각자 어떤 프레임으로 사안을 대하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매주 보는 프로그램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JTBC 《썰전》222화, 사드(THAAD) 관련, 2017. 06. 08 방영분


매거진의 이전글 역활을 역할로 고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 비언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