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채온 작가론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는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by 김윤경

채온 평론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는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채온 작가는 대담한 붓질, 자유로운 필치로 캔버스 평면에 순간의 기분과 감정을 담아내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억되고 각인된 것들을 평면 위에 시각화하면서 일정한 패턴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해 왔다. 자유를 표방하는 화법, 즉 전통의 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구도,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을 쓰는 과감함과 생경함, 무엇인지 모를,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듯한 형태와 색의 암시적 표현에서 어느덧 그만의 습관, 작가적 시선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좋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덕목은 아마도 감정이나 의도의 전달, 그리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는 적절한 화법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한다. 감정을 전달하는 것. 그것은 그림이 평범한 사물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때때로 그것은 말이나 글보다, 그리고 어쩌면 음악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특별한 어떤 대상이나 순간을 묘사하는, 재현에 입각한 그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특유의 가장자리 처리로 인해 마치 움직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 내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붉은 사각형 그림 앞에서 숭고한 밝은 빛,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황홀경을 경험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 종교의 영적 경험과 비교되기도 하는 이러한 미적 경험의 효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채온 작가는 걷거나 이동하면서 보는 먼 풍경, 스쳐 지나가는 것,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되고 각인되는 흔적과 같은 것을 시각화한다.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그의 그림들은 미술사 속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언뜻 연상시키는가 하면 꽃이나 산, 바람 등과 같은 자연 현상 같기도 한 이미지들의 향연이다. 그림의 주제가 되는 대상, 그가 보았던 인물이나 꽃 등은 화폭에 옮겨지는 순간 그의 몸짓과 움직임 속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진화한다. 빠르게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잔상을 남기며 강하게 각인되는 한 줄 연기를 부여잡듯 그는 자신의 캔버스 위에 노랑과 분홍, 입자가 고운 펄의 물감을 잔뜩 풀어놓는다. 관객을 압도하는 큰 캔버스 위에 정형화되지 않은 꽃과 같은 형상이 마치 바람에 몹시 흩날리는 듯 생생한 움직임을 전달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 연기와 같은 어떤 흔적, 분위기 등은 최근 꽃을 더욱 진지하게 그리기 시작한 채온 작가와 마찬가지로 17세기 북유럽 바니타스(Vanitas) 정물 화가들이 나타내려고 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바티나스 정물화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 세속적 즐거움의 무가치함을 상기시키는 여러 상징적인 오브제들에 대한 그림이며 그 용어는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라고 시작하는 구약 성경의 전도서(The Book of Ecclesiastes)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철학을 담은 이들 정물 화가들의 그림의 모태가 되었는데 해골, 꺼져 가는 촛불, 모래시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비누 방울, 하루 살이, 시들고 있는 과일이나 꽃 등을 묘사, 현세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며 악기, 와인, 책 등 세속적 즐거움을 상징하는 여러 오브제들과 함께 구성되어 삶과 죽음의 요소를 한 화면에서 보여 준다고 평가받는다.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바니타스는 매우 흥미롭다. 모든 게 헛되다고 시작하여 헛되다며 끝맺는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 가삐 가고

남쪽으로 불어 갔다 북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세상만사 속절없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

“보아라 여기 새로운 것이 있구나!” 하더라도 믿지 마라. 그런 일은 우리가 나기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는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바니타스 화가들은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간다’는 허무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과도하게 많은 오브제들을 지나치게 꼼꼼하게 묘사함로써 그들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어필하고자 하였다. 전혀 다른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바니타스 화가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허무주의, 찰나의 아름다움 등의 요소와 묘한 교집합을 갖는 채온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지나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의 움직임, 그 리듬감과 속도감을 포착하며 그들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아프고 아름다운, 복잡다단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채온 작가는 결과로써의 회화 자체보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의 행위로써의 회화는 일 순간 지나가는 아름다움, 그 찬란한 순간을 부여잡으려는 몸부림이다. 바쁜 일상 속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이미지들 중 어떤 것들이 그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고 결국 그림이 되게 했을까? 그의 작업실 한편에 걸려 있는 영화 프랭크(Frank)의 가면처럼 그는 캔버스 앞에서 춤을 추듯 그가 본 것들을 여과 없이 풀어놓는다. 인형 탈을 뒤집어쓴 채 격한 공연을 펼쳐 보이는 프랭크처럼 그림 앞에서 어떤 말도 없이 온통 순간에만 집중하는 화가. 공연이 끝난 후의 프랭크처럼 화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림 속을 빠져나온다. 결과로써의 그림은 또 다른 흔적이 된다. 그 속에서 어떤 사람은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의 꽃을 느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저물어 가는 석양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인생의 순간을 반추하게 하는 매개체. 스쳐 지나가는 것들, 사라져 버리는 연기 같은 것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일이란 정말이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리알티 윤즈 아트랩(Realti Yoon’s Art Lab)

화가, 미술번역가 김윤경


keyword
작가의 이전글최자은 작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