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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은 작가론

골목 어귀의, 깊은 숲 속의 위안

by 김윤경

최자은 평론/골목 어귀의, 깊은 숲 속의 위안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코로나’라는 재난을 거치며 우리는 더욱더 디지털 문화, 가상현실 등에 익숙해졌고 ‘거리두기’, ‘언택트’ 등의 용어는 인터넷상에서 보게 되는 평평한 바다와 사막, 꽃 등의 자연에 대한 경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분명 실경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반응일 수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표현하며 자신의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 낸다. 프랑스 화가이자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가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아마도 그가 다른 화가들과 차별되는 방식으로 자연을 표현했다는 것,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예고편이 되어 주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윌리엄 터너(J. M. W. Turner) 등의 서로 대조적인, 그리고 자신과도 대조되는 화가를 좋아했다는 그는 지금 우리가 대자연 앞에서 오히려 생경함을 느끼게 되었듯 자신의 눈에 비친 자연을 지각하고 표현하였다. 서로 반대되는 색을 병치시켜 명멸하는 빛이 캔버스 위에서조차 살아 있는 듯 시시각각으로 관객의 시각을 교란시키는 옵 아트(Op-art),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를 비롯한 여러 양식의 사조에 영향을 미쳤고 견고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시골 풍경을 모두 화폭에 담고 싶어 했던 모네는 빛과 계절의 변화를 잡아 내느라 같은 풍경을 여러 번 그렸는데 그 풍경들 중 유명한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건초 더미, 루앙 대성당, 그리고 그가 아꼈던 정원의 백합 등이었다. 자연을 보는 눈, 해석, 표현하는 능력, 소재의 선택을 위한 취향 등은 개개인의 예술가마다 다르지만 모네의 작업 방식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사라져 버리는 빛의 시간을 담는 것이었고 이는 당대의 전통적 풍경화풍으로 미루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자연의 움직임, 그 세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 화가였다. 알제리에서 군 복무를 하며 북아프리카의 강한 빛과 생생한 색채의 효과를 몸소 체험했던 그에게 자연의 묘사를 통한 빛과 색의 표현은 곧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었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그의 시지각과 기억을 지배한, 그리하여 평생을 바쳐 구현해 내야 했던 화두가 되었다.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도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더 잘 구현해 내기 위해 형식에 더욱 몰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들은 자신의 의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고안해 내기도 한다. 모네를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꼽는 최자은 작가 또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썼던 보색을 병치하여 흥미로운 화면을 구성하는데, 모네가 그랬듯 자연을 관찰하고 의지하였으며 그것이 주는 위로, 감정의 정화 등을 화폭에 옮겨 놓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보라색과 초록색의 배열은 모네뿐 아니라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역시 즐겨 쓴 기법인데 후에 영국의 옵아트 화가인 브리짓 라일리(Bridget Riley) 또한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영향을 밝힌 바 있다. 최자은 작가의 화면에는 그들이 찬미한 빛과 색채의 향연, 그리고 그들을 채우고 또한 끊임없이 지우며 생성되는 질감이 더해 주는 깊이가 있다. 서로 다른 양식의 그림의 주인공들에게서 찾는 이러한 공통점은 아마도 이들이 다른 공간과 시대를 살면서도 불변하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작업한 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표현한 빛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일 수밖에 없다. 현대로 오면서 인상주의의 빛은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이나 토템(Totem)의 성격이 강한 조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 걸쳐 작업한 빛과 공간 예술 운동(Light and Space movement)의 주요 작가인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메리 콜스(Mary Corse) 등에 의해 계승되고 더욱 실험적으로 제시되었다. 이들은 유리, 네온사인, 형광 조명, 레진(Resin)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며 이러한 실험을 더욱 극대화하였는데 ‘회화’라는 전통적인 매체를 고수하면서도 콜라주(Collage),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의 요소들을 접목하여 자신의 양식을 구축해 오고 있는 최자은 작가의 화법 또한 그림을 통해 자신이 지각한 빛을 화면에 구축하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최자은 작가에게 캔버스는 길을 잃지 않으려 갖는 하나의 ‘지도’이다. 문자 그대로 캔버스 위에 지도나 좌표를 그리기도 하고 붙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그림’이란 행위는 진정한 자아의 발견으로 이끌어 주는 지도와 같은, 단순한 사각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통해 수련을 하고 위안을 얻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림을 통해 자신을 타이르고 정진한다. 골목이나 숲길을 산책하기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그림이 인상주의 대가들의 화면을 언뜻 연상시키는 것은 아마도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 그 동시성을 매일의 수련처럼 캔버스에 담고자 했던 인상주의자들의 심리, 현상학, 감정적 유산이 갖는 영원성, 그 무의식적이고도 강렬한 비물질적 언어를 자신의 양식으로 재해석한 데에 있을 것이다. 깊은 숲의 신비함 혹은 아늑함, 그 속에서 만나는 약하지만 아름다운 동, 식물이 건네는 위로, 그리운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걸어 다녔던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이 주는 애틋함 등의 정감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겨 담는 과정을 통해 힘든 시간을 견디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산과 들, 그리고 거리로 나와 자연과 대화하며 캔버스에 매일 같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최자은 작가에게도 그림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매일의 일기이며 기도이다.

숲에서, 그리고 골목 어귀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최자은 작가의 화면에는 겁먹은 커다란 눈망울을 금방이라도 끔뻑거릴 것 같은 말이나 사슴의 얼굴, 자그마한 푸른 코끼리 등의 동물들이 있고 노란 해바라기를 비롯한 정겨운 식물들이 있다. 독일의 사진작가 발터 셸스(Walter Schels)가 찍은 일련의 동물 초상은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놀라움을 전달하는데, 얼굴을 ‘영혼의 거울’로 표현하며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많이 닮은 모습으로 제시되었다.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동질감에서 최자은 작가는 위로를 얻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그러한 자신의 취약함에 대한 자각 등에서 오는 슬픔을 말없이 달래 주는 동, 식물과 자연 속에서 그녀는 다시 살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최자은 작가의 그림은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주체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자연은 윌리엄 터너를 좋아했던 클로드 모네의 화풍, 모네와 조르주 쇠라를 좋아했던 브리짓 라일리, 모네를 비롯한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보았던 자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향이 종교와도 같이 그림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상심에 이르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 그녀의 화면 속 초록잎들과 호수 같은, 자신처럼 연약하지만 정겨운 사슴의 눈, 내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보았을 오래된 책, 그들이 거닐었을 골목 어귀에서 느꼈을 따스함이 그림 속에서 우리에게 같은 위로를 전달한다.

리알티 윤즈 아트랩(Realti Yoon’s Artlab)

화가, 미술번역가 김윤경

최자은, Something or Nothing,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2020
최자은, Lullaby, Acrylic on canvas, 2020
최자은, Silk Blanket, Acrylic on canvas, 2020
최자은, Daydreaming, Acrylic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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