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백수, 수어통역사 백수진 인터뷰
나름 존재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백수진을 만난 이후 더 작게 쪼개질 것도 없다고 여겼던 교만함, 그러니까 그 알량한 믿음이 무너졌다. 특히 그가 “청인도 이제 청인의 접근권을 고민해야 할 때”라며 웃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위계는 흔들렸고, 마음은 울렁거렸다.
고다(Grandchildren Of Deaf Adults)라는 정체성을 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배워온 사람. 사회의 시혜적 시선을 농인과 함께 깨고, 변화의 중심에는 존재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
하반기의 시작이자 숫자 7이 주는 은근한 행운이 깃든 7월.
그 첫 주에 우리는 신촌에서 행운처럼 백수진을 만났다.
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사실 제가 지금껏 “수어통역사 백수진입니다.”라고만 소개했어요. 저의 글을 읽으셨다고 하니 제 정체성을 먼저 밝히자면 저는 고다(Grandchildren Of Deaf Adults)예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인이신, 농인의 손녀인데요. 제가 태어나서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20년을 같이 살았어요. 어릴 적엔 홈사인으로 소통했고, 수어를 본격적으로 배운 건 13년 정도 됐어요. 통역사로 활동한 지는 9년째이고요. 그렇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수어백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1. 왜 수어백수일까요?
제 ‘수어이름’이 웃는 여자인데, 웃는 여자랑 비슷한 사인(이름)이 정말 많아요. 볼 쪽에서 시작하는 사인이 비슷한 게 많은 거예요. 주변에서 “이런 이름 너무 흔해서 어떻게 쓰냐”고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별명인 ‘백수’에 새끼손가락만 빼서 이런 사인이 만들어졌고요. 다들 그렇게 부르셔서 수어백수로 정해졌어요.
2. 덕분에 수어이름을 별도로 짓는 농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수어이름은 시각적인 특징 또는 성격 등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던데, 수진 님께서도 다른 분의 얼굴이름을 지어준 적이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어떤 감각을 토대로 만들어 드렸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수어이름은 청인이 함부로 지으면 ‘감히!’ 이런 느낌이에요. 농인의 특징이나 성격 또는 정체성을 반영해 정해지기 때문에 농문화 안에서 농인이 직접 지어주는 것이 일종의 룰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럼에도 제가 만들어드린 경우는 수어 레슨 진행할 때. 수강생 대부분이 청인이시고 농문화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농문화를 가르쳐 드리면서 “본인의 이름을 만들어 보세요.” 했을 때 짓기 어려워하시거든요. 그럼 “머리가 기니까 혹은 보조개가 있으니 이런 사인은 어때요.” 하면서 조언이나 제안을 드리기도 해요. 그리고 “나중에 농인을 만나게 되면, 꼭 농인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세요!”라고 말씀을 드리죠.
농문화에서는 수어이름에 대해 늘 이야기해요.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됐어요?” 하고요. 어떤 분은 ‘술’이라는 수어이름을 쓰시더라고요. 이유를 여쭤보니까, 원래는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술을 너무 자주 마셔서, 주변에서 그냥 “너 이름 술로 해라ㅋㅋ”하고 붙여줬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서로 자기 수어이름 이야기하고, 누가 지어줬는지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거든요. 저도 농인 교수님께서 지어주신 거고요. 농학교 가면 선배들이 지어주기도 해요. 왜냐하면 농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데프 패밀리’는 5~10% 정도예요. 대부분은 청인 가정에서 자라기 때문에, 농문화를 처음 배우게 되는 공간이 농학교예요. 그래서 그 안에서 선배들이 이름을 만들어주고,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농사회 안에 자리매김하게 되는 거죠.
3. 사실 소통의 방식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에 의문을 갖고 시작한 기획이라 홈사인으로 소통해 오신 경험이 엄청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언어 이전의 소통으로 홈사인에 관해 얘기를 조금 듣고 싶은데요.
집마다 홈사인이 다 다르더라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훨씬 넘기도 했고, 제가 본격적으로 수어를 배운 다음부터는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그때 썼던 홈사인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건 화장실이요. 수어로는 화장실을 WC(지문자)로 표현하거든요. 근데 저희 할머니랑 같이 썼던 화장실 사인은 정말 적나라한 동작이었어요. 대변 사인도 마찬가지고요. 저희 할머니는 무학농인이시기도 하고, 한국어를 잘 모르시기도 하고요. 근데 어쩌면 저한테 맞춰 주셨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기본적인 수어는 사용했었어요. ‘밥 먹어, 학교 다녀올게, 아빠 오니?’ 이런 일상적인 표현의 수어요.
4. 청인들이 사용하는 음성언어, 한국어 같은 경우는 직함 같이 말에서 예를 차리는 게 엄청 중요하잖아요. 근데 수어를 사용하다 보면 얼굴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어쩐지 서양 문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금 더 수평적인 느낌이 들어요. 수진 님이 생각하시는 수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존댓말이 없는 건 아니에요. 수어 문법 중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수지거든요. 손이 아닌 고개나 어깨, 표정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요. 고개를 살짝 숙이거나 어깨를 말거나 했을 때,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다만 서로를 직함을 부르거나 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 지회장님을 부를 때에도, 정식 직함보다 얼굴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에요.
아, 제가 수어에 진짜 매력을 느꼈을 땐 찐 수어를 볼 때였어요. 저희 고모부도 농인이신데, 젊으셨을 때 좀 노셨던… 분이에요. (웃음) 고모부와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너무 적나라한 수어를 쓰시는 거예요. 욕도 욕인데 차원이 아예 달라요. 한국어로 흔히 쓰는 욕은 정말 애기 수준이고 ‘목을 비틀어 버린다.’ 이런 수어를 쓰시는데, 와… 이게 장면이 다 보이고 진짜 비틀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 생생한 이야기가 보일 때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요즘은 한국어 대응식 수어가 많아졌거든요. 구화를 배우시는 분들이 늘다 보니까 한국어를 배우시는 분이 많아졌는데, 3-40대 이상 농인 분들의 경우에는 찐 한국 수어를 쓰시는 분이 많아요. 그분들의 수어는 정말 빠르면서도, 그림이 그려지는 듯해요. 저도 아직 거기까지 가는 중이에요. 수어는 원래 그림을 그리듯이 얘기를 해야 한다 하더라고요.
5. 비슷한 맥락에서 도상성을 가진 수어들과 시각적 표현에 놀라시며 공부하셨다는 글을 봤는데, 대표적으로 어떤 표현들에 감탄을 금치 못하셨을까요?
도상성은 수어를 처음 배울 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에요. 집, 전화기 같은 단어는 손동작만 봐도 다들 “어, 수어 쉽네?” 하면서 재미있게 접근하세요. 사물의 모양이나 기능을 그대로 따서 표현하니까요.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건 ‘분류사’ 예요. 너무 어려워서 아직 저도 완벽히 익히진 못했어요. 예를 들어 안경은 안경 모양 자체를 표현할 수도 있고, 안경을 쓰는 동작으로 나타낼 수도 있어요.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거죠. 또 예를 들어 차가 밀리는 상황에서도, 단순히 차라는 수어 하나로 끝나지 않아요. 차가 뒤로 쭉 밀려 있을 수도 있고, 병렬로 밀려 있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수어가 완전히 달라져요. 정해진 표현이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과 맥락과 형상에 따라 조형적으로 구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분류사가 특히 재밌어요. 정답이 없고 표현의 자유도가 높다 보니 저도 계속 배우고 찾아가고 있어요.
6. 수어를 사용하신 지 13년 차가 되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른 분이 수어를 하시는 걸 봤을 때 단번에 이해나 체득이 힘든 것들이 있으실까요?
수어를 보면 의미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내가 직접 하려고 하면 어렵더라고요. 영어도 많이 들어야 한 마디 겨우 나오듯이, 수어도 많이 보고 따라 해봐야 할 수 있어요. 제가 예전에는 비수지 때문에 ‘모르다’라는 수어가 어려웠어요. 수지(손동작) 자체는 단순한데, 모르다의 비수지(표정)가 잘 안 붙더라고요. 농인 친구가 수어와 얼굴이 따로 논다고 조언을 해줘서 한참을 거울 보고 표정 연습을 했었어요. 비수지는 일종의 뉘앙스, 말하자면 말투 같은 거예요. 같은 안녕하세요도 평소와, 인사하기 싫을 때의 비수지가 아예 다르잖아요. 그래서 수어를 꼭 농인에게 배우시면 좋아요. 표정이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꼭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비주얼 버나큘러(Visual Vernacular)’, 줄여서 VV라고 불리는 수어 문학 장르예요. 한국에선 이제 막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쉽게 말해 분류사와 도상성이 결합된, 시각적이고 문학적인 수어 퍼포먼스라고 보면 돼요. 실제 수어는 아주 최소한만 쓰이고, 대부분 시각적 연출과 몸의 표현, 이미지적 내러티브로 구성돼요. 이걸 처음 봤을 때 굉장히 감탄했어요. 수어가 언어를 넘어서 문학이 될 수도 있구나,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거든요. (세계농아인육상선수권' 최우수상(이미선))
7. 수어통역사는 음성을 수어로 통역해 주는 수어 통역과 수어를 음성으로 통역하는 음성 통역 등을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수어통역사는 농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음성통역사는 청인 중심의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할 때 어떤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으신 지 궁금합니다.
수어통역사 자격증 자체가 수어·음성·필기시험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제로 활동할 때는 양방향 통역을 모두 하게 돼요. 농인이 참석하는 행사나 미팅에서는 양쪽의 언어를 모두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에요. 저는 누비스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외부 청인들과 협업할 일이 많다 보니, 처음 미팅에 들어가면 보통 두 통역을 동시에 하는 것 같아요. 미팅이나 행사 통역처럼 양이 많고 빠른 소통이 오갈 땐 20-30분 단위로 교대해요. 영어 통역 부스 안에서 교대하는 것처럼요. 근데 그러지 못할 때도 많아요. 예전에 수어통역센터에 있을 땐 교대 인력이 없어서 혼자 몇 시간 하기도 하고… 그럼 통역 망하는 거예요. (웃음)
8. 통역이 ‘망했다’고 느끼시는 순간이 정확히 어떨 때일까요?
농인이 알아듣지 못했을 때요. 농인의 표정이 보이잖아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센터에서 일했을 때 종일 진행된 교육 통역이 있었어요. 지회장님, 부장님, 농인 분들 그리고 청인 참가자만 2-30명쯤 있었어요. 계속 통역을 하는데, 저 때문에 농인 분들께서 깨어 있으려고는 하시는데 이해는 안 되고… 이런 표정이 보일 때 ‘아 망했다.’ 생각해요. 그럼 이제 말리고, 이 자리를 피하고 싶고, 하하. 그래도 무엇보다 가장 당황스러울 때는 제가 발화자의 말이 이해가 안 될 때, 근데 끊기 어려운 상황들. 그래서 통역 전에 꼭 논의가 되어야 해요. 미리 자료를 받아서 숙지를 하고 가거나, 발화자와 미리 소통을 하고, 주최 측에도 내가 이해가 안 되거나 발화자의 속도가 빨라져 버리면 잠시 멈춰 주시거나 반복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재미없게 느껴지는 통역은 농인이 없는 수어통역이에요. 그러니까 통역이 실질적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세워지는 통역’ 일 때요. 공공기관에서, 혹은 방송이나 홍보 행사에서 ‘우리 수어통역 세웠다’를 보여주기 위해 부르는 경우가 있어요. 라이브로 나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농인 없는 수어 통역은 아무래도 현장성이 떨어지니까 흥미도 떨어져요. 그래도 그런 통역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 자리에 통역이 서 있어야, 농인이 올 수 있고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요. 다만, 통역사로서의 몰입이나 동기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죠.
9. 음성 통역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 이상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을 전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진 님의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도 말해지지 않은 것을 읽고 듣는 능력이 뛰어나신 편인가요? 간단하게 말하면 직업병일 수도 있겠고요.
직업병보다는, 저는 늘 농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대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는 태도가 생겼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친구랑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싸움이 나면 그 상황을 전달해주기도 하고요.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하잖아요. 홍대 거리에서 싸움이 났을 때, 제가 지나가며 엿들은 이야기들을 수어로 전달해 주면 농인 친구가 “이래서 수어통역사가 필요하다니까”하고 웃기도 해요.
무대에 올라가는 통역도 고마워해 주시지만, 정말 고마워해 주시는 부분들은 그런 사소한 순간에서의 통역이었던 것 같아요. 가령 가족 통역 같은 것들이요. 한 번은 제 지인 중에 어릴 적부터 농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고 독립하면서 어머니와 오래 떨어져 사신 농인이 있는데, 그분의 어머니가 일본에 계시다가 한국에 오셨어요. 마침 저도 시간이 맞아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어머니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셔서 동행했는데 한 3-4시간 정도 통역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졌거든요. 식사가 끝난 뒤에 “몇십 년 동안 얘기 못 했던 건데, 네가 있어서 후련하게 얘기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진짜 뿌듯하고 감사했어요. 가족 간의 이야기나 사적인 감정은 아무에게나 맡기기 어려운 통역이잖아요. 신뢰하는 통역사나 가까운 사람에게만 부탁하곤 하니까, 그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게 큰 영광이었어요.
10. 일상적인 수어 통역은 어느 정도까지 온 것 같나요? 어쩌면 공식 석상보다 일상생활에서의 수어가 더 자주 필요하잖아요.
지역마다 수어통역센터가 있고, 농인분들께서 필요한 일이 생기면 센터에 의뢰해서 통역을 요청하시는 방식이에요. 예를 들면 가족과 통화해야 할 때, 혹은 병원·관공서 방문, 계약서 설명처럼 혼자 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많이 요청하세요. 또 ‘손말이음센터’라고 해서, 청인과 농인이 전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수어통역사가 음성과 수어를 연결해 주는 서비스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통역 서비스도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깊은 이야기, 감정적인 대화나 복잡한 맥락이 필요한 소통은 전화나 짧은 통역으로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거든요. 그 점이 늘 아쉽죠. (그럴 땐 편지를 쓰거나 하시나요?) 그게 쉽지 않아요. 농인 대부분은 한국수어가 제1언어이고, 한국어는 제2언어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우리가 영어로 작문할 때 어려움을 느끼듯, 농인도 한국어로 긴 글을 쓰거나 편지를 작성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 보니 글로 대신하기도 어렵고, 결국 일상적인 수어통역이 더 절실해지는 거죠.
11. 저희는 언어를 전달 도구임과 동시에 권력 구조라고도 보는데요. 통역 일을 하시면서 수어가 그저 부차적인, 기능적인 수단처럼 다뤄지는 상황을 마주한 적이 있으신가요?
너무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죠. 한국어는 한국에서 주 언어, 다수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된 지도 10년이 다 됐는데, 정작 일상에선 크게 바뀐 게 없어요. 카페에서 주문 한 번 하기도 어렵고, 가족이나 친구와의 대화조차 막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청인 중심, 음성언어 중심, 다수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수어는 여전히 부차적이고 기능적인 언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행사에 수어통역사가 오면 “말씀 천천히 해주시고~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참아주세요~”하는 식의 멘트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억양이나 어감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농인 입장에선 ‘내가 안 왔으면 이런 불편함도 없었겠지’라고 느끼실까 봐 좀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행사 측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수어통역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적당한 템포로 말하는 게 맞는 거예요. 농인 때문에, 수어통역사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제 주변에는 시혜적인 시선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난 농인이고, 수어를 쓸 뿐이고, 언어가 다를 뿐이야. 중간에 연결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라는 시선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청인도 청인의 접근권을 생각할 때가 왔다고 느껴요. 한 번은 제가 활동하는 한국농인 LGBT+ 커뮤니티에서 진행했던 인터뷰를 바탕으로 실태조사와 행사를 연 적이 있어요. 그 자리는 거의 전부 농인 중심, 수어 중심이었고, 발제자도 수어, 패널도 수어로 진행됐어요. 그때 청인 접근권을 위해 음성통역도 제공했는데, 그 방식이 참 재밌었어요. ‘QR코드를 찍어서 ZOOM에 접속하세요. ASMR 방식으로 통역을 들려드릴 테니, 청인은 그걸 통해 들으세요.’ 이런 방식이었죠. 청인 참석자들은 조금 불편해했지만, 농인들은 그동안 늘 겪어왔던 거니까요. 그때 처음으로 ‘청인 접근권’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고, 이제는 그런 방식의 시도도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12. 농문화와 청인 사회의 경계에서 두 세계가 만들어낸 질서와 위계 속에서 겪은 불통의 경험이 있으실까요?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음과는 별개로, 말이 통하고 번역이 잘 되고 있어도 마음이 가 닿지 않는 순간들이요.
청인들이 농인을 그냥 장애인,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순간들이요.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만 바라볼 때요. 개인적으로는 의도와 다르게 오해의 상황이 생기거나 태도를 보고 어림짐작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요.
제가 통역 일 시작한 지 2~3년쯤 됐을 때인데, 정말 친한 농인 친구랑 영상통화로 매일 싸웠던 적이 있어요. “청인은 왜 그래?, 농인은 왜 그래” 이러면서 서로 막 울분을 토하고, 그래도 울분이 안 풀리니까 장문의 한국어를 써 보내고, 그럼 친구는 “무슨 말이야?”하고… 계속 그런 식의 불통의 상황이 있었어요. 결국엔 만나서 잘 화해했어요. 지금도 친하고요. 지금 돌이켜 보면 언어 차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수어는 시각적인 언어다 보니, 보이는 걸 먼저 말하게 되는 구조라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거든요. 결론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이유를 설명해요. 근데 한국어는 사정사정 이유부터 말하거나, 상처받을 까봐 돌려 말하잖아요. 저는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이유를 듣기 전에 상처부터 받고 그랬죠.
13. 일상에서 ‘접근성’이라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농접근성에 대해 가장 크게 갖고 계신 생각을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은 너무 매뉴얼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농인이 오면 수어통역사, 시각장애인이 오면 보도블록, 지체장애인이 오면 경사로. A 하면 B, 이런 식으로 단편적인 조치만 취해지는 것 같아요. 겉으로 보기엔 갖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은 거죠.
예를 들어 아무리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을 준비해도, 제 주변 농인들은 청인 중심으로 이뤄진 건 아예 접근 자체를 안 해요.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청인의 주도 하에 청인 수어통역사가 진행하는 행사에는 농인이 가기가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보통은 농단체, 수어 민들레, 핸드스피크, 누비스, 협회, 중앙회처럼 농인이 있는 단체에서, 농인이 홍보하는 걸 보고 접근하시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좋은 방법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농인이 함께하는 거예요. 농인이 기획하고 홍보하고 현장에서 직접 농인을 반겨주고 하는 거요. 다른 장애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인의 경우엔 특히 언어가 다르다 보니 더 그래요. 이런 점에서 보면 접근성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만들고 누가 부르고 누가 주체가 되느냐’가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느껴요.
14. 저희도 기획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당사자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당사자에게 닿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단순히 연락해서 섭외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통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막막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도 먼저 배우자는 마음으로 인터뷰부터 준비하게 됐는데요.
수진 님께서도 공공기관이나 국가기관에서 진행하는 이른바 ‘접근성을 고려한 전시’ 들을 보셨을 텐데, 실제로는 당사자성이 부족하거나 매뉴얼처럼 단편적인 접근에 그친다고 느낄 때가 있으셨을까요?
좋았던 전시가 먼저 생각나는데, 국립현대미술관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그 전시는 작품 자체에 농인이 참여하셨거든요. 농인 관람객도 실제로 많이 오시더라고요. 강연에도 많이 참석하셨고. 서울농학교랑도 연계되어서 그런지 꽤 활발하게 연결된 느낌이었어요. 홍보는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괜찮다 싶었어요.
반면에 제가 하우스 어셔 통역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전 교육 때 접근성 매니저가 오셔서 매뉴얼화된 수첩을 나눠주시더라고요. ‘화장실은 여기입니다.’, ‘신분증 주세요’ 같은 문장들이 적힌 수첩이요. 그래서 제가 “만약 농인 관객이 수어로 말씀하시면요?”하고 물어봤더니, 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소통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구나를 느꼈어요. 간단하잖아요. 필담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첩을 하나만 더 놓거나, 아주 기본적인 수어 몇 가지만 익혀도 가능한데… 하우스 통역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어만 배워 놔도 충분히 응대할 수 있어요. 그래서 더 아쉬웠죠. 접근성이라는 이름 아래 대화는 빠져 있는 경우가 아직 많은 것 같아요.
15. 최근에 대학로 연극 <로비>를 관람했는데, 작품도 좋았고 배리어프리 측면에서도 꽤 잘 갖춰져 있어서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그때 통역사분들께서 마치 연기하듯이 수어를 하시는 걸 보고 궁금해진 건데요. 통역할 때 ‘연기’라는 요소도 함께 고려하시나요?
연기랑 통역을 칼처럼 나누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특히 연극 통역은 종류가 나뉘거든요. 무대 한쪽에 앉아서 하는 ‘무대 통역’과 배우를 따라다니면서 함께 연기하는 것처럼 통역하는 ‘그림자 통역’이요. 그림자 통역은 지금까지 전부 청인 통역사들이 했는데요, 농인 입장에서는 ‘왜 배우도 아닌데 연기를 하지?’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수어 자체가 자연스럽고 전달이 잘 됐다면 괜찮았을 텐데, 오히려 오버한다고 느껴져서 방해가 된다는 피드백이 있기도 했고요.
반면, 농인이 직접 참여한 연극에서는 수어에 감정을 담긴 하지만, 액션을 과하게 하지는 않아요. ‘대사의 뉘앙스나 감정은 전달해야 해서 비수지를 활용한 것뿐이지 액션을 취한 것은 아니니 연기는 아니다!’ 하시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뉘앙스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감정도 담으려고 해요. 근데 그림자 통역 이슈가 한창일 때는 한 번 감정을 쏙 빼고, 내용만 전달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랬더니 재미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이게 정말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애매한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16. 세계농예술축제를 다녀오신 걸 봤어요. 그 게시글에서 본 것 중에 ‘암스틸퍼킹데프(I'm still fucking deaf)’라는 가사가 인상 깊더라고요. 제 마음대로 해석을 하자면 ‘그래, 나 농인이야. 근데 뭐 어쩌라고?’ 같은 태도로, 청능주의적 시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위계를 흔드는 선언처럼 느껴졌어요. 수진 님께서도 위계를 직접 뒤흔들거나, 목격한 적이 있다면요?
사실 아까 말씀드렸던 ‘청인의 접근권’ 얘기가 저한테 제일 컸던 경험이에요. 사회 전반에서 보면 청인이 갑, 농인이 을이 되는 경우가 다수잖아요. 근데 제가 일하는 곳은 아예 ‘농예술’만 하는 독보적인 회사예요. 그래서 외부에서 협업 제안이 올 때면 오히려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다들 농문화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농인과 일하고 싶고, 농예술을 다루고 싶고, 관심은 있는데 배경지식은 없고… 그런 ‘모름’과 ‘배우고 싶음’을 기본 전제로 가지고 오세요. 아까는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은 동등하게 마주하는 순간들이 생기는 거죠. 결국 중요한 건 배우려는 자세인 것 같아요. 사실 그거면 되는데.
17. 감각과 언어가 위계 없이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개인의 태도든 사회적 지원이든, 어느 차원에서든지 자유롭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농인이 있다.’라는 감각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농인이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 떠올려도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게 되죠. 대화할 때 통역사가 있다고 해도, 시선은 농인을 향해야 하고요. 통역 때문에 딜레이가 있더라도, 그 사람과 눈을 맞추고 기다릴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의 감각만 있어도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게, 기다리게 되니까요.
사회적으로는 농인의 존재가 그냥 계속 눈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너무 분리되어 있어요. 예전에는 농인을 대상으로 교육도 안 시켰어요. 집 안에만 있게 하고요. 그래서 저희 할머니가 하신 일이 지하철에서 볼펜을 파는 거였어요. 할아버지는 쌀가마니를 나르고… 그게 전부였죠. 그 뒤로 농학교가 생기긴 했지만, 전국에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밖에 없어요. 심지어 거기서도 기숙사 생활을 하고요. 지금은 인공와우나 보청기 사용으로 구화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일반학교에 보냈다가 결국 소통 문제로 다시 농학교로 가는 경우도 있어요.
한 번은 중학교까지는 구화로만 소통했다고 하는데 결국 수어를 배우러 온 친구가 있었거든요. 근데 저랑도 대화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농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찍은 영상을 봤는데, 수어를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 이 아이는 그냥 자기 언어가 없었던 거구나’하고 느꼈어요. 통합교육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결국은 자신의 언어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 언어가 있어야 애착관계도 형성할 수 있잖아요. 결국 변화는 복잡한 게 아니라, 존재를 알아채는 감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18. 엄청나게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대외적인 업무 외에도 개인적인 블로그도 많이 쓰시고요. 수어와 농인에 대한 정보,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는 글도 많고 수진 님의 생각, 활동이 꼼꼼히 적혀 있어서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수어와 농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해요.
저의 친구는 다 농인이에요. 이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계속 봐왔기 때문에, 친구들이 곧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누가 내 친구 건드리면 화나는 마음, 다들 알잖아요. 저한테는 그 마음이 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에 정말 멋진 농인 지인이 많아요. 글로벌하게 활동하시거든요. 그런 분들 곁에 있으니까 괜히 나도 좋은 일을 하는 것 같고, 멋진 통역사가 된 기분도 느끼고요.
그리고 사실 통역이라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어떻게 교도소를, 법원을, 해외의 농페스티벌을 가보겠어요. 어떤 면에서는 배우와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거라 내가 해볼 수 없는 도전들을 해보게 된다는 점에서요. 성격도 사고방식도 그 순간만큼은 빌려 입는 느낌이라, 그런 맛을 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계속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되는 일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통역 자체의 재미도 있고요.
19. ‘우리는 모두 달 아래 살아간다’는 문장처럼, 저마다 다른 조건과 감각으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수진 님께서는 ‘나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느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저의 필요성이 느껴질 때요. “이건 수진 통역사님이 와줘야 돼.” 그런 말을 들을 때, 제가 어디론가 불리고 거기서 제 쓸모가 있다고 느껴질 때요.
그리고 차별이 많은 구조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요. 저 같은 경우에는 농인 지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한국어보다 수어를 더 쓰려고 해요. ‘나는 지금 너랑 같이 살아가고 있어.’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고 싶거든요. 사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고, 먼저 실천하신 통역사님이 계세요. 처음엔 ‘유난 아닌가’ 싶었어요. 통역할 수 있으면서 왜 굳이 농인인 척까지 해야 할까 했는데… 농인 지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결국 소속감을 느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농인들과 사적으로 있을 때는 통역사 역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요. 그냥 같이 있는 사람으로, 같은 언어인 수어를 쓰는 사람으로 있고 싶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같이 살아가는 감각이에요.
인터뷰 내내 백수진은 그의 수어 이름처럼 ‘웃는 여자’의 얼굴로 웃기도 했고, 질문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으로 우리를 꿰뚫어 보기도 했지만, 속에 단단하게 자리한 단호함만큼은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특히 농문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는 그런 면면을 오히려 선명히 드러냈을 뿐이었다.
백수진은 인터뷰 제안에 응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농인과 농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더 담기길 바랐다. 그는 청인이자 수어 통역사로 인터뷰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농인의 존재와 사회적 참여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았고, 그 모습은 우리가 처음 이메일로 어색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농문화와 농인에 대한 감각, 그리고 그로 인해 켜켜이 쌓여왔던 불통과 위계를 허물었다. 단단하고 솔직하며 거침없는 그의 답변들은 우리가 불통 앞에 또다시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건넸다.
완전한 소통을 위해 누구보다 불통에 맞서는 이들을 찾아가는 이 인터뷰는,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마주할 용기를 요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달 아래 살아간다. 그 말인즉, 예외 없이 누구도 불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대신에 우리는 그 간극을 이해하고,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어두운 밤 조용히 곁을 밝혀주는 달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Interviewee 백수진
Interview 엄나영
Research 배정아
Edit 배정아, 엄나영
Photography 김윤이, 배정아
Design 김윤이
© 2025 arttdal. 김윤이, 배정아, 엄나영
우리는 분명 듣고 있는데, 왜 서로에게 닿지 못할까.
〈우리는 모두 달 아래 살아가〉는 아뜨달의 인터뷰 시리즈로, 모두가 같은 달 아래 존재함에도 감각의 위계와 소통의 불균형이 지속되는 현실을 은유합니다. 우리는 ‘불통’을 감각의 부재가 아닌 내면에 자리한 위계의 문제로 바라보며, 그 간극을 드러내고 해체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