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 <추상화>
긁어내고 덧입혀진 색의 층위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흔적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 속에서 감정은 빛으로 환원되고, 침묵조차 노래처럼 울린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린다.
왜 그럴까. 결함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흔들림은 결함이나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다. 호수에 물결이 일듯 흔들림은 자연스럽다.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단단하게 세워가는 삶의 필요조건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불안과 분노, 허무 같은 감정도 억누르기만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거울이다. 스쳐 지나가며 나를 비춰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다.
‘색의 결’이라는 치유의 돋보기
일상에서 감정이 삐딱선을 탈 때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색층으로 바라본다. 격정이 휘몰아칠 때조차 고삐 풀린 격정을 ‘색의 결’로 관찰하면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진다. 마치 감정이 손에 잡히는 듯 보이고, 그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빛이 느껴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의 회화처럼, 감정도 색처럼 긁히고 덧칠되며 스스로 존재감을 새긴다. 캔버스에 올린 색채를 긁어낸 자국은 상처 같지만, 덧입혀진 색은 세월의 상처를 품은 유물처럼 깊은 빛을 우려낸다. 삶도 그렇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과 감정이 덧입혀질 때 그 상처는 나만의 질감이 된다.
리히터의 <추상화>(1986)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다. 그러나 안에서 일렁이는 색층은 마치 숨을 쉬듯 살아있다. 흘러내린 듯한 붓자국, 거칠게 긁힌 흔적, 불완전하게 덮인 색층. 붉은색이 깔렸다가 푸른색을 밀어내고, 다시 회색이 덮였다가 긁혀 나간다. 화면은 끝내 어느 하나의 지배적 색조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표정과 닮았다. 기쁨과 슬픔, 불안과 희망이 섞이며 만들어낸 고유한 흔적 말이다. 우리의 삶도 계획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 스며들어 삶의 화면을 다채롭게 가꾼다. 예술은 고투의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통제와 우연, 고요함과 흔들림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한다는 점에서 삶과 예술은 닮았다.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되찾는 힘은 반복적인 성찰 속에 생긴다. 감정을 억제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흐름에 내맡길 때, 새로운 자신과 민나게 된다. 그 과정은 캔버스 위에 색을 쌓는 것과 비슷하다. 한 번의 붓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또 다른 색을 덧칠하면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도 한다. 내면의 상처도 그런 것 같다. 상처로 점철된 감정에 이해와 용서가 스며들면, 결의 표정은 한결 더 깊고 풍부해진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흐름에 맡기는 일이다. 감정은 강물과 같다. 붙잡으면 고여서 썩게 되지만, 흐르게 두면 언젠가 맑아진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호흡을 찾는다. 나는 타인의 시선보다 내가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더 중시한다. 외부의 인정이나 평가가 삶의 리듬을 멈추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시선은 또 다른 파동을 만들어내곤 한다.
파동을 타며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 흔들림은 성장의 안내자가 된다. 배워야 할 것은 흔들림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찾는 일이다. 리히터가 우연과 계획을 오가며 색을 쌓아 올리듯, 나도 감정의 흐름 속에서 나만의 색을 찾아야 한다. 흔들림은 삶의 결을 두텁게 하고 내면에 새로운 빛을 쌓는다. 감정의 결을 따라 걷다 보면, 그것은 결국 나를 더 깊고 넓은 세계로 이끄는 스승임을 알게 된다. 감정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곧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린다. 흔들림이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