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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 이어폰

"아무것도 듣지 않아도, 나는 귀에 그것을 꽂는다."

by 천휘영

[CONTINUITY NOTE – 무선 이어폰]


무선 이어폰이 상용화된 이후,
나에게 쓸모없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


외출할 때,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걷는 습관.


나는 걷는 동안 음악을 듣지도, 영상을 보지도 않는다.
혼자 식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식사를 다 마친 후, 여유롭게 음악이나 영상을 즐기는 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물에는,
아티스트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의도를 온전히 느끼려면 집중해서 보고,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선 이어폰을 꽂는다.


줄 이어폰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꼬인 줄을 풀어내는 수고로움이 당연했다.
그 수고로움은 ‘목적’이 있었기에 감수할 수 있었다.


마치 종이사전을 한 장 한 장 넘겨 단어를 찾던 시절처럼.
이제는 전자사전으로 단번에 검색할 수 있듯,
수고로움은 사라졌다.


수고가 사라지니, 목적성도 흐려졌다.


동시에, 우리의 도파민을 자극하며
시간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플랫폼들이 쏟아졌다.
이제 사람들은 무선 이어폰을 꽂은 채,
방해받지 않는 ‘자기 취향의 시간’을 산다.


그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나 역시 그 매혹에 취했다.


하지만 매혹이 깊어질수록,
끊어낼 수 없는 불안정함이 남았다.

무선 이어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답답함과 지루함이 몰려온다.


마치 안경을 벗은 걸 잊은 채 세수를 하는 사람처럼,
나는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아무것도 듣지 않지만 꽂고 있는 무선 이어폰.
그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내가
심신 안정을 위해 스스로 투여하는 작은 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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